2000년대 초반 주요 법무법인의 합병으로 본격화된 국내 대형 로펌 시대가 25년을 맞았습니다. 개인 송사 중심에서 기업자문, M&A, 경영권 분쟁, TMT 등 전문·세분화된 법률 서비스 체계로 전환되며, 대형 로펌들은 한국 경제 성장의 든든한 조력자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이번 기획을 통해 주요 로펌의 탄생부터 성장기까지의 역사를 조명하며, 대한민국 리걸 마켓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조망합니다.
'전관'과 '송무'. 법무법인 바른을 떠올리면 먼저 따라붙는 수식어다. 다만 이 로펌의 출발점은 오히려 '도전'에 가까웠다. 1998년 재조 출신 변호사들이 혼탁했던 법조 관행에 문제를 제기하며 "우리는 바르게 가자"는 기치로 문을 연 것이 시작이었다. 이 로펌은 서울중앙지방법원 인근 강남 테헤란로에 터를 잡고 꾸준히 존재감을 키워왔다. 다른 로펌들이 주목하지 않았던 법무 분야를 발굴·육성하며 2020년대에도 우상향 성장을 이어왔다는 평가다.
바른은 '빅6(김앤장·태평양·광장·세종·율촌·화우)' 자리를 노리는 대표적 로펌으로 꼽힌다. 국내 10대 로펌 반열에 오른 지도 오래다. 작년 부가가치세 신고 기준 연매출 1076억원을 기록했다. 2020년부터 2022년까지 3년간 연매출 800억원대를 유지하다가 2023년 창사 이후 처음으로 연매출 1000억원(부가가치세 신고 기준)을 돌파한 데 이어 3년 연속 1000억원을 넘겼다.
브로커 아닌 변호사가 상담... '투명성'의 시대정신바른은 1990년대 말 혼탁한 변호사 시장에서 출발했다. 당시 민·형사 송무 시장은 서울 서초동에 밀집한 전직 판사·검사 출신 변호사들이 주도했다. 개인 단위로 운영되던 법률사무소들은 브로커 역할을 하는 사무장을 앞세워 사건을 수임했다. 전관 변호사들은 사무소에 이름만 올린 채 암암리에 영업을 이어갔고, 탈세와 사건 청탁 비리가 잇따라 불거졌다.
1997년 '의정부 법조비리 사건'이 터지면서 변호사 시장에 대한 불신은 더욱 커졌다. 판사 15명이 서울지방법원 의정부지원 일대에서 형사사건을 맡던 변호사로부터 명절 떡값 등의 명목으로 브로커를 통해 수백만원을 받은 정황이 드러나면서다. 판사들은 대거 정직 및 경고 처분을 받았고 지원장도 사퇴했지만, '사무장 없이 송무가 가능하냐'는 근본적인 의문이 제기됐다.
이 같은 시대정신은 1998년 법복을 벗은 젊은 평판사 3명에게도 이어졌다. 강훈 변호사(서울고등법원·사법연수원 14기), 홍지욱 변호사(서울지방법원 남부지원·16기), 김재호 변호사(서울가정법원·16기)가 그 주인공이다. 여기에 검사와 청와대 경제비서관을 지내고 기업 자문 경험을 갖춘 김찬진 변호사(고등고시 15회)가 가세했다.
네 사람의 공통된 인식은 만연한 법조 비리에 순응하지 않고 "우리는 바르게 하자"는 것이었다. 사건을 소개하는 브로커를 일절 쓰지 않고 변호사가 직접 사건을 수임하는 것을 원칙으로 세웠다. 조직이 커진 뒤에도 파트너 변호사가 저연차(어쏘) 변호사에게 이름만 빌려주는 '매명(賣名)'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1998년 2월 '바른법률사무소'가 출범했고, 초대 대표는 강훈 변호사가 맡았다.
바른行 택한 우수 전관들, 업계도 '지각변동'사무장이 아닌 변호사가 직접 고객을 상대한다는 점이 알려지자 바른은 의뢰인뿐 아니라 같은 철학을 공유한 변호사들 사이에서도 빠르게 입소문을 탔다. 개인 개업 후 사무장 영업으로 고수익을 올리는 것이 관행처럼 여겨지던 고위 전관들이 잇따라 합류했다. 평판사 출신들이 세운 신생 로펌은 이 시기를 기점으로 본격적인 '전관 로펌'으로 자리매김했다.
27년간 법원에 몸담고 1999년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를 끝으로 퇴임한 뒤 바른의 2대 대표로 합류한 조중한 변호사(1기)가 기폭제가 됐다. 같은 해 말 정귀호 대법관(15회)이 6년 임기를 마치고 바른에 영입되면서 변호사 업계의 이목이 집중됐다. 2000년에는 고등법원 부장판사 출신 박인호 변호사(3기)도 바른에 합류했다. 세 사람은 창립 초기 바른의 송무 진영을 이끌었다.
소수 정예를 앞세운 바른의 송무 성과도 전방위로 나타났다. 당시 국내 두 번째로 높은 소송물가액을 기록한 5500억원 규모 한국가스공사 통영기지 탱크공사 가처분 사건에서 대우를 상대했다. 2001년에는 글로벌 금융사 JP모건을 대리해 아르헨티나 국채 투자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 대한투자신탁증권과의 합의를 이끌어냈다.
국내 기업을 대리한 굵직한 소송에서도 성과를 냈다. 두산중공업을 대리해 400여명의 희망퇴직자가 제기한 600억원 규모 퇴직금 소송에서 1심 패소를 뒤집고 2심 승소에 이어 2002년 최종 승소 판결을 받아냈다. 커피 가격 담합으로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29억원의 과징금을 부과받은 동서식품을 대리해 2002년 대법원 파기환송 판결도 이끌어냈다.
넓어진 인재 풀, 쌓이는 승전보... 급성장한 2000년대전관 영입으로 외형을 키운 바른은 2003년부터 인재 풀을 한층 넓혔다. 강금실 변호사가 법무부 장관에 임명된 이후 검찰 인사 파동이 이어지며 검사장급 인사들이 대거 변호사 시장으로 이동했다. 명로승 법무부 차관(3기), 정동기(8기)·문성우(11기) 대검찰청 차장검사 등이 대표적이다. 이듬해에는 정인진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7기), 2005년에는 김동건 서울고등법원장(1기)과 김치중 특허법원 부장판사(10기)가 합류했다.
2005년 사명을 '법무법인 바른'으로 변경한 뒤 기업 자문 역량도 강화했다. 국내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로펌 '김·신·유'의 매니징파트너였던 박기태 변호사(14기)를 필두로 한 자문팀을 영입했다. 2005년 국내 1호 로펌인 김장리, 2007년 법무법인 세종과의 합병을 추진했으나 성사되지는 못했다.
형사 사건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냈다.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매각 과정과 관련해 배임 혐의로 기소된 이강원 전 외환은행장을 대리해 1심부터 2010년 대법원까지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 신한은행이 450억원 규모의 배임 및 횡령 혐의로 고발한 신상훈 전 사장을 대리해 2013년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 판결을 이끌어냈다.
2008년에는 변호사 수가 100명을 넘어서면서 리더십 구조를 개편했다. 경영전담 대표변호사 제도를 도입해 총괄대표와 이원화하는 체계를 구축했다. 강훈 변호사가 초대 경영대표를, 김동건 변호사가 총괄대표를 맡았다. 2011년에는 서울지하철 2호선 삼성역 인근에 '바른빌딩'을 매입해 대형로펌 가운데 처음으로 자체 사옥을 보유했다.
니치 마켓 발굴하고 종합 로펌으로 도약2010년대 들어 바른은 체질 개선에 나섰다. 2012년 전관 변호사가 판사·검사로 재직하던 마지막 근무지 사건을 수임할 수 없도록 한 규제로 전관 역량이 제약을 받으면서다. 2015년 조현관 전 서울지방국세청장을 영입했고, 2016년에는 법무법인 양헌에서 이현 변호사(22기)의 부동산금융팀을, 2017년에는 법무법인 KCL에서 서혜숙 변호사(28기)의 공정거래팀을 각각 영입했다.
송무 경쟁력은 흔들리지 않았다. 2014년 쌍용자동차 해고무효확인 소송에서 대법원 파기환송 판결을 이끌어냈다. 2016년 액화천연가스(LNG) 저장탱크 건설공사 입찰 담합 사건과 관련해 SK건설을 대리해 유일하게 과징금 불복 소송에서 승소했다.
동시에 다른 대형로펌이 주목하지 않았던 '니치 마켓'에도 눈을 돌렸다. 업계 터줏대감으로 꼽히는 가사·상속 분야가 대표적이다. 2013년 법인 내부에 상속신탁연구회를 설립한 이후 상속과 기업 승계 분야를 집중 공략했다. 그 결과 2022년에는 금융권이 아닌 대형로펌 가운데 처음으로 자산관리 서비스를 전담하는 EP(Estate Planning)센터를 출범시켰다. 이동훈 대표변호사(23기)가 직접 EP센터 총괄을 맡아 이끌었으며 조웅규 변호사(41기)가 자산승계본부장으로 활동 중이다.
도산 분야 역시 경쟁력을 키웠다. 2018년 레이크힐스순천을 회생법원 1호 '한국형 프리패키지 제도(P플랜)' 사건으로 회생 개시 결정을 이끌어낸 뒤 골프존으로의 매각까지 성사시켰다. 회생 절차 이후 인수합병(M&A)까지 로펌이 일괄 수행한 드문 사례다. 2017년에는 공익사단법인 '정'을 설립했고, 2020년에는 대형 로펌 최초로 싱가포르 사무소를 개설하는 등 사회공헌과 해외 진출도 병행했다.
젊어진 바른, 대형화 기지개 켤까바른은 양적 성장을 거듭했다. 2023년 창사 이후 처음으로 연매출 1000억원을 달성했다. 공정거래위원회와 퀄컴 간 1조원대 과징금 분쟁에서 공정위를 대리해 승소했고, HD현대중공업의 6300억원대 통상임금 소송에서 근로자 측을 대리해 승소하며 100억원대 성공보수를 거둔 영향이 컸다. 출범 당시 6명에 불과했던 변호사 수는 작년 10월 기준 한국 및 외국 변호사를 포함해 281명으로 늘었다.
바른이 2026년 마주한 과제는 신속한 의사결정 체계 확보다. 법무법인 지평, 대륙아주, 동인, 와이케이(YK) 등 연매출 1000억원대 중대형 로펌과의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송무 강점을 넘어 고부가가치 기업 자문과 신규 영역 확장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총괄대표가 확실한 주도권을 갖고 신속하게 결정을 내리는 역량이 핵심 경쟁력으로 꼽힌다. 2025년부터 50대 중반의 비교적 젊은 리더십을 내세운 이동훈·이영희·김도형 경영대표 체제의 다음 행보에 업계의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박시온 기자 ushire90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