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흔들리는 날엔 '풍죽'을 [고두현의 아침 시편]

입력 2026-03-02 09:00
수정 2026-03-06 14:49
풍죽 1 성선경

사람살이로 말하자면
어려움을 당해서야 그 마음의 품새가 드러나듯
늘 푸른 대나무도 바람을 맞아야
제멋이다 몇 해 전
서울 동대문 프라자에서 간송전을 보다가
풍죽(風竹) 복사본을 한 점 구해다 놓고
한참을 잊고 지내다 새삼
액자를 하여 거실 벽에다 걸어 놓았다
마음 어지러운 어느 날
가만히 바라보니 내 마음이 다 환해진다

대숲에 든 듯 새소리
댓잎 부딪는 소리 들린다
역시 푸른 대나무도 바람을 맞아야
어려움 이겨 낸 옛 어른 풍모 보여 준다
여린 가지와 흐린 묵향 속에서
어디 저런 기품이 숨어 있었나?
새삼 찬찬히 들여다보게 한다
대숲에 든 듯
세속을 벗어난 듯
내가 잔잔히.
최근 출간된 성선경 시인의 시집 <풍죽>의 표제작입니다. 풍죽(風竹)은 ‘바람에 날리는 대나무’를 말하지요. 고난과 시련에 맞서는 선비의 지조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이 시는 상징을 앞세우기보다 생활의 풍경을 먼저 보여줍니다. 시인은 몇 해 전 간송전에서 본 풍죽의 복사본을 구해뒀다가 한참 뒤에 액자를 해 거실 벽에 걸어놓습니다.

그런 다음 “마음 어지러운 어느 날” 그림을 보면서 느낀 감각의 전환을 얘기합니다. 눈으로 보던 그림이 어느 순간 귀로 들리기 시작하면서 감각이 천천히 바뀝니다. “대숲에 든 듯 새소리/ 댓잎 부딪는 소리 들린다”에서 화면은 소리로 바뀌고, 소리는 내면의 풍경을 바꿉니다. 이때 환해지는 것은 상황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바깥의 사건은 그대로인데, 안쪽의 숨결이 바뀌는 순간이 곧 시의 변곡점이지요.

여기서 ‘바람’은 단순한 고난의 은유를 넘어섭니다. 바람은 대나무를 시험하는 외부의 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대나무의 기품을 만들어주는 내부의 손길입니다. “바람을 맞아야/ 어려움 이겨 낸 옛 어른 풍모 보여준다”라는 구절은 고난의 미화가 아니라 고난을 통과한 몸짓의 자세를 의미하지요. 흔들림 자체가 품격이 될 수 있다는 것은 흔들려도 꺾이지 않는다는 말보다 훨씬 더 섬세한 표현입니다.

바람이 없으면 잎은 움직이지 않고, 움직임이 없으면 소리도 없겠지요. 흔들리되 부러지지 않는 선, 휘어지되 꺾이지 않는 결, 그 결이 만들어 내는 소리. 대나무의 아름다움은 결국 ‘움직임의 품격’입니다. 사람으로 말하면 시련이 닥쳤을 때 드러나는 자세입니다. 바람을 맞아야 비로소 드러나는 대나무의 생태, 어려움을 통과해야 비로소 드러나는 마음의 품새. 이 둘은 거울처럼 서로를 비춥니다.

시인은 이어지는 ‘풍죽 2’에서 만고풍상을 겪는 대나무의 “그 구도가 마치 아름다울 미(美)처럼 보인다”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문득 새벽에 깨어나 책상에 앉았는데/ 벽에 걸린 풍죽을 지긋이 훔쳐봤더니/ 그 구도가 마치 아름다울 미(美)처럼 보인다/ (…) 이른 새벽 문득 깨어나/ 새로운 삶의 한길을 보는 이 기쁨/ 대나무가 대나무로만 보이지 않는/ 이 아름다움을 간송 선생께서도 이미 보셨겠지?/ 한갓 대나무도 만고풍상을 겪어/ 그것을 슬기롭게 이겨 냈을 때/ 비로소 아름다움을 얻는다는 것/ 저 바람에 흔들리는 풍죽이 오늘 새벽/ 아름다울 미(美)처럼 보인다.”

고난과 흔들림이 아름다움의 조건이 되는 역설의 미학! 고난이 ‘상처’로 남지 않고 ‘구도’로 바뀌는 순간 비로소 미학의 경지에 도달합니다. 풍죽이 아름다운 것은 바람에 흔들리면서 그 역설의 미학을 꽃피우기 때문이지요.

마음이 산란할수록 큰 소리에 지배당하기 쉽지요. 이럴 때 풍죽은 작은 소리로 우리를 어루만지고 격려하는 음표가 됩니다. 바람이 지나가며 내는 “댓잎 부딪는 소리”는 우리 마음을 자기 자리로 돌아오게 하는 신호이기도 합니다. 어지러운 흔들림 속에서도 고아한 기품을 발견하게 해주기 때문이지요.

그 발견은 우리 마음을 깨끗하게 헹궈주는 샘물과 같습니다. 오늘같이 바람이 센 날, 마음이 어지럽고 흔들리는 날에는 풍죽이 보여주는 역설의 미학을 더 깊이 새겨볼 일입니다. √ 음미해보세요 바람이 없으면 잎은 움직이지 않고, 움직임이 없으면 소리도 없겠지요. 흔들리되 부러지지 않는 선, 휘어지되 꺾이지 않는 결, 그 결이 만들어내는 소리. 대나무의 아름다움은 결국 ‘움직임의 품격’입니다. 사람으로 말하면 시련이 닥쳤을 때 드러나는 자세입니다. 바람을 맞아야 비로소 드러나는 대나무의 생태, 어려움을 통과해야 비로소 드러나는 마음의 품새. 이 둘은 거울처럼 서로를 비춥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