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에 방산장비 불법 우회 수출"…배터리 장비社 덜미

입력 2026-02-26 17:34
수정 2026-02-27 00:46
관세청이 러시아에 방위산업 장비를 불법 수출한 혐의로 국내 배터리 장비 기업 네 곳을 압수수색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군사용으로 쓰일 수 있는 품목을 러시아에 수출하지 못하도록 했는데 이 기업들이 정부 승인 없이 제3국을 통해 러시아로 배터리 장비를 우회 수출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일부 업체가 “러시아로 반입될지 모르고 수출했다”고 주장했지만 관세청은 고의성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튀르키예 통해 러시아 수출
26일 업계에 따르면 최근 관세청은 러시아에 방산 장비를 불법 납품한 혐의로 코스닥시장 상장사를 비롯한 네 개 배터리 장비 업체의 본사를 압수수색했다. 이 업체들은 2023년 이후 산업통상자원부(현 산업통상부)의 전략물자 수출 허가를 받지 않은 배터리 장비를 중국과 튀르키예 등을 거쳐 러시아에 판매한 혐의를 받는다. 한 업체는 러시아 기업의 한국 지사에 제품을 공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과 튀르키예에 수출한 일부 회사는 “배터리 장비가 러시아로 반입될지 모르고 정상 절차에 따라 판매했다”고 항변했다. 하지만 관세청은 이 기업들이 러시아로 수출될 가능성을 충분히 인지한 것으로 판단했다. 수출에 관여한 물류업체와 로펌, 관세사 등이 “법적 리스크 때문에 수출하지 않는 게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냈으나 이를 묵살했다는 정황을 포착해서다. 특정 업체는 이번 거래에서 수백억원의 부당이익을 챙기고 관련 증거 자료를 빼돌린 것으로 전해졌다.

배터리는 드론과 군용 통신 장비 등에 들어가는 방산 필수 부품이다. 이에 따라 정부는 2023년 일부 배터리 완제품을 러시아로 수출할 때 ‘상황 허가’(무기 전용 가능성이 있는 품목을 수출할 때 필요한 사전 허가)를 받는 대상으로 정했다. 2024년엔 배터리 제조 설비 및 장비 등으로 규제 대상을 넓혀 원칙적으로 배터리 관련 품목 수출을 금지했다. 러시아 수출 제한 품목도 2022년 3월 57개에서 2024년 9월 1402개로 늘렸다. ◇“불법 알면서 웃돈 주고 팔았다”러시아는 미국과 유럽연합(EU)의 제재로 주요 품목 수입이 막히자 제3국을 경유해 수입하는 형태로 우회로를 모색해왔다. 교역 대상 업체에 법적 리스크를 지우는 대가로 웃돈을 주면서 각종 방산 장비와 물품을 조달했다. 이번에 관세청 압수수색을 받은 기업들도 통상적인 가격보다 15%가량 높은 금액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이 업체들이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정체)과 중국의 저가 물량 공세로 어려움에 처하자 러시아와의 거래에 응한 것으로 관세청은 판단했다.

업계에서는 신뢰도 하락을 우려하고 있다. 불법 수출 의혹을 받는 배터리 장비 기업들은 이번 조사로 타격을 받으면 다른 고객사에 제품 납기를 맞추지 못할 수 있어서다. 국내 배터리 대기업도 영향권에 놓일 전망이다. 압수수색을 받은 장비 기업들의 시장 점유율이 높아 대체 기업을 구하기 어렵거나 추가 비용이 들 것으로 업계는 전망하고 있다.

관세청의 칼날이 K배터리 전반으로 확대될 가능성도 있다. 관세청은 지난해 러시아에 방산 장비를 수출한 혐의로 한 업체를 조사하는 과정에 배터리 장비를 우회 수출한 네 개 업체를 파악하고 압수수색에 나섰다. 이 때문에 네 개 업체와 거래한 다른 기업으로 조사 대상이 늘어날 수 있다.

업계 관계자는 “배터리 모듈과 장비를 생산하는 데 수십 개에서 수백 개 부품이 들어가기 때문에 압수수색 대상 기업과 거래한 다른 기업으로 불똥이 튈 수 있다”고 내다봤다.

원종환/성상훈 기자 won040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