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볍고, 편하지만, 힙하게…다시 봄날 맞은 '미니멀리즘'

입력 2026-02-26 16:46
수정 2026-02-26 16:47

올봄 패션은 어딘지 모르게 익숙하다. 유행을 타지 않으면서 오래 입을 수 있고, 하나의 아이템으로 여러 상황을 커버할 수 있는 ‘두 벌 같은 한 벌’ 패션이 선택받는다. 패션업계에선 다가오는 봄 패션 키워드로 ‘실용’을 꼽았다. 하나의 옷을 자주 입다 보니 언제 걸쳐도 몸에 부담을 주지 않는 착용감이 중요해졌다. 간결한 실루엣에 소재는 가벼워졌다. 다음 계절이 와도 활용할 수 있도록 레이어드가 가능한 아이템이면 최적이다. 최대한 멋을 내지 않은 무난한 옷이 유행인 걸까 싶겠지만, 선택의 안목은 분명해야 한다. 2026년의 봄 패션은 ‘꾸안꾸’(꾸민 듯 안 꾸민 듯)의 극대화다.하이패션 문법 벗어던진 럭셔리
명품 브랜드 샤넬은 2026 공방 컬렉션을 공개하며 미국 뉴욕의 낡은 지하철역을 런웨이로 삼아 화제를 모았다. 통상 화려한 장식과 빛나는 조명이 압도하는 장소에서 ‘부’의 미학을 과시하던 것과는 다른 행보다. 마티유 블라지 샤넬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뉴욕 지하철은 각기 다른 계층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뒤섞이는 공간”이라며 “더없이 자유로운 플랫폼을 배경 삼아 뉴욕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여성의 모습을 그리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컬렉션 룩 또한 ‘오트 쿠튀르’(최고급 맞춤복) 특유의 비실용성을 덜었다. 런웨이 포문을 연 건 샤넬의 상징과도 같은 트위드 재킷이 아니라 아웃도어에서나 볼 법한 하프 집업 디자인의 쿼터 스웨터 차림의 모델이었다. 하프 집업은 네크라인에서 가슴선까지 지퍼로 여닫는 형태의 니트 혹은 스웨트셔츠다. 본래 하이패션과는 거리가 먼 옷이다. 1930년대 스포츠웨어에서 출발해 1990년대에 이르러선 셔츠 위에 겹쳐 입는 비즈니스 캐주얼 문법으로 자리 잡은 대중 디자인이다. 이처럼 샤넬 모델이 집업 스웨터에 청바지를 입은 채 지하철 플랫폼 앞에 선 모습은 올해 트렌드를 잘 보여준다. 럭셔리조차 ‘과시’를 벗어던진 것. 아무리 명품 옷이라도 아끼며 옷장에 모셔두기만 할 수는 없다. 소비자들이 출퇴근과 일상, 휴식과 여행까지 아우를 수 있는 옷을 찾으면서 과시적인 디자인보다 착용 빈도와 활용도가 높은 아이템이 힘을 얻는 추세다.힘 빼고 쿨하게 그렇다고 무조건 기본템만 걸치는 것은 재미가 없다. 겉으로 보기에는 힘을 뺀 듯한 내추럴한 옷차림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디테일이 있어 세련된 감각을 언뜻 내비쳐야 ‘패피’(패션 피플)가 될 수 있다. 펑퍼짐한 실루엣의 투박한 집업 점퍼에 꽃무늬 프린트 스커트를 매치하는 도전을 해보자. 예상하지 못한 색다른 조합의 패션이 올봄엔 먹힌다. 꾸민 티를 내지 않되 옷의 완성도와 취향은 분명히 드러나는 미감이 중요하다.

보편적인 스웨트셔츠에 여성 노동자의 옷차림을 상징하는 앞치마를 덧입힌 미우미우의 선택도 흥미롭다. 슈슈통과 맥캔디는 다소 와일드한 집업 톱에 톡 튀는 셔츠 드레스, 프릴 스커트, 롱 삭스, 샌들 힐 등 로맨틱한 아이템을 매치해 소녀적인 감성을 덧입혔다. 집업 점퍼를 오피스웨어에 활용할 수도 있다.

패션계가 주목하는 올해의 컬러는 뭘까. 화이트, 샌드 베이지, 소프트 그레이, 연한 블루 등 채도가 낮은 뉴트럴 색상 선호도가 높다. 절제된 색이 평범해 보일 수 있지만, 옷감이나 소재의 대비를 주는 것으로 시각적 재미를 만든다. 동일한 색상이라도 매트한 가죽과 은은한 광택의 새틴 소재를 함께 쓰는 식으로 원단 조직을 다르게 구성해 변주를 주는 것이다. 작은 액세서리나 양말, 신발 등을 강렬한 원색으로 매치해 분위기를 환기하는 것도 좋다. 그럼에도 디테일이 부족하다면 몇 가지 옷을 겹쳐 입어 보자. 그 자체로도 개성 있지만 날씨가 더워질 때마다 하나씩 벗어던지면 완전히 다른 스타일이 된다.더 얇고 더 가볍게‘튜닝의 끝은 순정’이라는 말이 있다. 원본을 다양하게 변주해 봐도 결국은 원본이 낫다는 뜻이다. 한동안 유행하던 화려한 패턴과 과감한 실루엣에 질린 이들이 과거의 상징적 아이템을 찾고 있다는 점도 주목해 볼 추세다. 올봄 패션 하우스들이 힘을 빼고 속속 1990년대의 미니멀리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아이템을 내놓는 이유다. 어깨를 부풀린 파워숄더 재킷과 화려한 주름 스커트 등 1980년대 패션의 과장된 실루엣이 피로감을 주면서 1990년대에는 그 반작용으로 절제, 미니멀, 무심함을 미학으로 삼은 쿨한 패션 트렌드가 지배했다. 올해 봄 빅토리아베컴, 톰포드, 우영미 컬렉션에서도 1990년대 스타일의 슬립 드레스가 런웨이를 장식하며 미니멀의 부활을 알렸다. 우영미 컬렉션의 슬립 드레스는 섬세한 레이스 장식으로 포인트를 더했다.


브랜드들은 경량화에도 집중하고 있다. 점점 더 편한 옷을 찾는 대중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다. 단순히 무게를 줄이는 데만 그치지는 않는다. 소재 기술 진화로 얇아진 원단에도 형태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내구성을 확보하면서 실루엣의 완성도는 더욱 높아졌다. 구찌의 새 아티스틱 디렉터 뎀나 바잘리아는 1990년대 톰포드 시절 디자인을 오마주하며 ‘그 시대 옷, 가방, 신발보다 무조건 더 가볍게’를 모토로 삼았다. 프라다 또한 1990년대 미니멀 재킷의 구조를 살리되 테크 나일론과 경량 울 블렌드를 활용해 활동성이 큰 상황에서도 부담을 줄였다.

안혜원 기자 anh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