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식의 와인 랩소디 <64>
‘인생 황혼이면 어떠랴, 은빛 설원을 달려라’. 전국 그랜드 시니어 기술선수권대회(12회)가 지난 2월 강원도 평창 모나용평에서 열렸다. 대한스키지도자연맹(이하 연맹)이 주최한 이 대회에는 만 61세 이상이면 스키 지도자 자격증 없이도 참가할 수 있다. 고령층 스키 인구의 저변 확대를 위해서다.
김충식 연맹 부회장은 “우리나라 스키어들은 50대에 들어서면 대부분 슬로프를 떠난다. 그러나 겨울스포츠의 꽃인 스키의 진짜 매력은 인생 황혼기부터다. 쾌속 질주를 마친 후 이어지는 아프레 스키(après-ski) 타임을 통해 여유로운 삶과 성취감, 새로운 행복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최근 국내에도 잘 알려진 ‘아프레 스키’는 한마디로 뒤풀이 문화를 말한다. 프랑스어로 ‘스키를 탄 후’라는 의미. 스키가 끝난 후 갖는 와인모임이 대표적이다. 일부 리조트의 경우 대형 파티형 이벤트로 구성해 직접 운영하기도 한다.
이번 대회 전날 밤 연맹 관계자 등과 와인모임을 가졌다. 다들 저녁 식사를 마친 상태라 디저트 와인 한 종류로 간단히 끝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야기가 길어지면서 와인 종류도 화이트에서 ‘와인 맥주’로 이어졌다. 비록 마시는 순서는 바뀌었지만 겨울밤 소박한 술자리는 깊어만 갔다.
먼저 포트와인(그라함 퀸타 도스 말베도스 빈티지 포트, 2010)은 무화과 빵과 함께 마셨다. 둘 다 당도가 높다. 온몸이 자지러질 정도. 잘 익은 살구 맛과 초콜릿 향이 알코올과 섞이면서 기대 이상의 만족감을 주었다. 술이 약한 김 부회장은 “역시 달콤한 와인이 최고”라며 연신 건배를 제의했다. 그러나 정작 이 와인의 알코올 도수는 19도로 높다.
이어서 마신 와인은 네이키드 소비뇽 블랑.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짙은 풀 향이 나타났다. 이번 대회 스태프로 참여한 신모 씨는 “첫 모금에서 곱게 핀 꽃망울이 툭 터지는 것 같은 강렬한 향이 다가왔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어 “청정 청포도 본연의 상큼한 산미가 오래도록 남아 분위기를 살렸다”고 말했다.
이 와인은 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말보 지역에서 생산됐다. 뉴질랜드 남섬 최고 북단에 위치한 곳이다. 스테인리스 스틸 발효 및 숙성 덕분에 깔끔한 맛이 장점. 풋풋한 풀 향의 구스베리는 물론 레몬과 복숭아 향을 잡을 수 있다. 편의점 등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가정비 좋은 와인이다. 수입사는 씨에스알와인.
끝으로 ‘와인 맥주’라는 별칭으로 유명한 듀체스 드 부르고뉴를 마셨다. 직역하면 ‘부르고뉴의 공작부인’이다. 이름처럼 향과 맛이 독특했다. 초보자들은 대부분 와인으로 착각한다. 병 모양과 붉은 컬러, 상큼한 신맛 때문이다. 실제 이 맥주의 숙성 과정에는 프랑스 보르도 샤토에서 구입한 오크통을 사용한다.
그러나 벨기에 서부 플란데런 지방에서 생산된 정통 레드 에일 맥주다. 에일이란 냉장고가 없던 시절 보리 맥아를 단기간 ‘상면 발효’시켜 양조한 술이다. 발효 온도는 상온(18~25도)으로 라거에 비해 알코올 도수가 높고 묵직한 맛과 향이 특징이다.
반면 라거는 맥주통 아래(하면) 저온(9~15도) 발효로 투명한 빛깔을 가지고 있다. 시원하고 깨끗한 맛을 찾는 사람들이 좋아한다. 국내에서 판매되는 맥주 대부분이 라거 계열이다.
3월의 스키장에는 먹고 마시고 담소 나누기를 즐기러 오는 시니어들이 많다. 스키는 뒷전이다. 뒤풀이 자리가 한번 펼쳐지면 젊은 날의 무용담이 끝없이 이어지기도 한다. 영락없는 ‘꼰대 스타일’이지만 와인 덕분에 지루하지 않다. 자칫 움츠러들기 쉬운 계절, 스키와 와인은 최고 낭만이자 건강 비결이다.
김동식 와인 칼럼니스트,
국제와인전문가(WSET Level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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