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학기에 애들은 어디 가고…"연차 내고 왔다" 뜻밖의 진풍경 [현장+]

입력 2026-02-24 20:08
수정 2026-02-24 21:19

"요즘은 애들보다 어른이 더 많이 와요."

24일 오전 10시, 서울 종로구 창신동 문구·완구 거리 3월 초 개학을 불과 일주일 앞둔 시점이지만, 골목의 분위기는 우리가 떠올리는 '신학기 대목'과는 사뭇 달랐다.

예년 같으면 알림장과 공책, 실내화를 사려는 학부모와 아이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을 거리다. 형형색색 책가방이 가게 앞을 메우고, 계산대마다 긴 줄이 이어지던 시기다. 그러나 이날 골목을 채운 것은 2030 성인 소비자들이었다.

애니메이션 캐릭터 피규어 매장에는 이미 계산대 앞까지 줄이 늘어서 있었고, 손님들은 종이봉투 대신 큼직한 피규어 박스를 안고 매장을 빠져나왔다. 진열대 앞에서는 박스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제품 상태를 확인하는 모습도 쉽게 눈에 띄었다.

반면 몇 걸음 떨어진 전통 문구 매대는 한산했다. 공책과 연필, 색연필 세트가 가지런히 쌓여 있었지만, 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드물었다. 신학기를 상징하던 물건들이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인파가 몰린 매장을 바라보던 상인들은 변화를 체감하고 있었다. 한 상인은 "요즘은 일본 피규어가 제일 잘 나간다"며 "벌써 몇 개월째 인기를 얻으면서 국내 완구나 연필은 완전히 밀렸다"고 말했다. 신학기 특수 대신 캐릭터 굿즈와 한정판 피규어가 골목의 중심이 된 셈이다.◇'산리오' 찍고 '건담' 담고… 학용품 대신 취향 쫓아 몰리는 ‘키덜트족’
이날 기자가 찾은 한 완구 매장은 문을 열자마자 30여 명의 방문객이 한꺼번에 들어섰다. 매장 안은 금세 사람들로 가득 찼다.

진열대 앞에서는 '체인소맨' 피규어를 손에 든 20~30대 남성들이 박스 상태를 꼼꼼히 살폈고, 산리오 캐릭터 만들기 세트 앞에서는 여학생들이 "이걸로 같이 만들면 되겠네"라며 소곤거렸다. 신학기 시즌임에도 어린이보다 청년층과 성인 손님이 더 눈에 띄었다.

이제 대학생이 된다는 이모(19) 씨는 친구와 함께 매장을 돌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이 씨는 "산리오 장난감 종류가 다양하고 가격도 저렴해 일부러 친구들과 놀러 왔다"며 "개강 준비를 하러 왔다기보다는 구경하러 온 느낌"이라고 말했다.

매장 안 건담 프라모델 코너에는 '기동전사 건담 수성의 마녀' 등 인기 제품이 빼곡하게 진열돼 있었다. 유희왕 피규어와 공룡 골격을 조립하는 '프라노사우루스' 시리즈도 눈길을 끌었다.

포켓몬 피규어를 모은다는 남모(29) 씨는 "온라인보다 직접 보고 사는 게 좋다"며 "다양한 캐릭터를 한 번에 확인할 수 있고 가격도 비교적 저렴해 혼자서도 자주 찾는다"고 말했다.

매장 곳곳에서는 외국인 관광객의 모습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이날 현장 방문객의 약 20%는 중국인과 일본인 등 외국인이었다. 창신동이 더 이상 학용품을 사러 오는 동네 상권에 머물지 않고, 관광객과 취미 소비자들이 일부러 찾는 공간으로 성격을 넓혀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중국 인기 캐릭터인 '라부부(Labubu)' 랜덤 뽑기 상자를 신중하게 고르던 한 중국인 관광객은 "동묘시장을 구경하다 자연스럽게 이곳까지 오게 됐다"며 "가격도 괜찮고 종류도 다양해 둘러보는 재미가 있다"고 전했다.◇SNS선 이미 '피규어 맛집'… 어릴 적 향수 쫓아 연차 내고 오는 직장인들
상인들 사이에서 "요즘은 아이들보다 20~30대가 더 큰손"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창신동에서 캐릭터숍을 운영하는 김모(61) 씨는 "문구 완구를 주로 팔긴 하지만, 요즘은 주말이면 성인 커플들이 데이트 코스로 많이 온다"며 "어릴 적 향수를 느끼려는 사람도 있고, SNS에서 유행하는 캐릭터를 직접 보고 체험하려는 경우도 많다"고 설명했다.

연차를 내고 방문했다는 30대 직장인 이모 씨와 임모 씨 역시 "캐릭터 상품을 좋아하는 친구들 부탁으로 대리 구매를 하기도 하고, 사고 싶던 피규어가 있어 찾았다"며 "예전에는 일본 여행을 가야 살 수 있던 제품을 여기서도 구할 수 있어 만족스럽다"고 했다.

이 같은 열기는 온라인에서도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다. SNS에는 창신동 문구·완구 거리를 다녀온 후기들이 잇따라 올라온다. 한 방문객은 "고전 제품부터 최근 생산된 굿즈까지 다양한 장르의 제품이 많아 구경하기 좋았다. 2시간을 알차게 쓰고 왔다"고 적었다. 또 다른 이용자는 "최근 키덜트 숍이 많이 생겨 공유해본다"며 "몬스터 피규어 종류가 다양한데 가격이 정말 저렴하다"고 극찬했다.

2030 방문객들은 "볼거리와 놀거리가 많다", "장난감부터 문구류, 체험 게임까지 한 번에 즐길 수 있어 방문하기 좋다"고 입을 모은다. 창신동 문구·완구 거리는 오전 8시부터 오후 7시까지 운영되며, 매장별로 영업시간과 휴무일은 다소 상이하다.◇11조원대로 커진 시장… 아이들 줄어든 빈자리 채우는 키덜트 매장
2030'키덜트(키즈+어덜트)' 소비자들이 몰리면서 창신동 일대에는 성인 취향을 겨냥한 문구·완구 매장도 잇따라 들어서고 있다. 지난해 문을 연 '동대문 토이마켓'을 비롯해 '승진완구', '토이월드' 등 대형 매장에는 한정판 캐릭터 굿즈와 피규어를 찾는 발길이 꾸준히 이어진다. 과거 학용품 중심이던 상권이 취향 기반 소비 공간으로 빠르게 재편되는 모습이다.

시장 규모도 이를 뒷받침한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 따르면 국내 키덜트 시장은 2014년 5000억원에서 2020년 1조6000억원으로 성장했으며, 향후 11조원 규모까지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글로벌 흐름 역시 비슷하다. 일본 완구 시장은 2023년 약 10조4500억엔 규모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고, 미국에서도 팬데믹 이후 성인 중심 장난감 판매량이 37% 급증했다. 취향을 중심으로 한 소비가 하나의 산업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반면 아이들을 주 고객으로 삼아온 전통 문방구 시장은 점차 위축되고 있다. 1970년대 형성된 창신동 문구·완구시장에는 한때 100개가 넘는 매장이 들어섰지만, 최근 1~2년 사이 약 10곳이 문을 닫았다. 전국적으로도 문구점 수는 2022년 8900개에서 2023년 8300개, 2024년 7800개로 감소세를 이어가고 있다.

현장에서 만난 한 상인은 "아이들도 줄었지만 요즘은 다 온라인으로 구매한다"며 "예전 신학기 대목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고 씁쓸해했다.
박상경 한경닷컴 기자 highseoul@hankyung.com
유지희 한경닷컴 기자 keeph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