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격차'라는 단어 뒤에 숨어있던 우리 제조업의 위상이 중국의 폭발적인 성장 앞에 무색해지고 있다는 내용의 국책연구원 보고서가 나왔다. 로봇·전기차·배터리·자율주행 등 미래 먹거리로 꼽히는 첨단 제조 분야에서 중국은 이미 한국을 넘어선 밸류체인 경쟁력을 확보했고 한국이 추격자로 나서야 한다는 진단이다.
24일 산업연구원은 '첨단산업의 한·중 경쟁력 분석과 정책 방향' 보고서를 통해 중국을 '생산기지'로 여기던 시점은 지나갔다고 진단했다.
2015년 '중국제조 2025' 전략 발표 이후 중국의 첨단제조 산업은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보고서는 반도체를 제외한 로봇, 배터리, 전기차 등 주요 품목이 당초 중국이 목표로 했던 국산화율을 이미 상회했다고 봤다.
연구개발(R&D) 공급망, 생산, 수요시장 등 밸류체인 전반을 평가했을 때, 반도체를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중국이 한국을 앞질렀다는 분석이다. 우리 산업의 '최후 보루'라고 여겨지는 반도체조차 메모리 분야의 경쟁력을 기반으로 장비 조달과 해외 수요 등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을 뿐, R&D 설계와 융합 서비스 부문에서는 중국에 우위를 내주고 있는 형국이라는 분석이다.반도체도 일부 분야 중국 '우위' 중국이 특히 앞서 있는 분야는 하드웨어다. 미국 제재에도 로봇 하드웨어 분야에서 '기술 자립'과 '공급망 완결성'을 구축했다고 보고서는 진단했다. 산업용 로봇의 핵심 부품인 감속기, 서보시스템 등의 국산화율은 이미 50%를 넘겼고, 휴머노이드 로봇은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상용화 단계에 진입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은 제조용 로봇 R&D 역량에서 근소하게 앞설 뿐, 생산과 해외 시장 창출 능력에서 크게 밀리고 있다.
반도체도 중국은 도전자가 아니다. 중국은 반도체 자급률 70% 목표 달성에는 미달했지만, 팹리스(설계)와 후공정 분야에서 독자적인 생태계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보고서는 화웨이, 바이두 등 빅테크 기업들이 자체 AI 칩을 설계하면서 설계 역량이 글로벌 수준으로 올라섰고, 미국의 수출 통제에 맞서 중국식 AI 기술 생태계를 공고히 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중국 전기차 시장은 이미 선도 단계에 진입했다. 2024년 기준 중국 내 전기차 판매 비중은 45.3%로 당초 목표였던 20%를 두 배 이상 초과 달성했다. 배터리 분야는 압도적이다. 소재부터 장비까지 전 공정 국산화율이 90%를 상회하며, 생산라인 핵심 장비와 소프트웨어는 100% 국산화를 이뤘다. 한국은 품질과 브랜드 신뢰성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으나, 가격 경쟁력과 원재료 조달 측면에서는 구조적 열세에 놓여 있다.
한국의 반격 용중(用中) 전략은?산업연구원은 중국에 대응해야하는 한국 산업의 SWOT 분석 결과도 내놨다. 우리 산업의 강점은 우수한 소재·부품·장비 역량과 대기업의 글로벌 브랜드 경쟁력이라는 분석이다. 미국과 유럽 등 선진 시장에서의 높은 신뢰도는 여전히 유효한 기회 요인이다.
약점은 자율주행, 휴머노이드 로봇 등 AI와 데이터, 소프트웨어 기반의 신시장 대응력이 미흡하다는 점이다. 내수 시장이 협소하고, 높은 원재료 부문의 해외 의존도, 상대적으로 부족한 정부 지원 규모와 전문 인력난은 우리 산업의 발목을 잡는 고질적 문제로 지적됐다.
보고서는 중국을 단순히 넘어야 할 대상인 '경쟁자'로만 볼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실익을 극대화할 '전략적 요충지'로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과거처럼 '초격차'를 벌려야 한다고 주장할 시점이 아니라 '기능적 분업'으로으로 대중 산업 패러다임을 바꿔야한다는 분석이다. 보고서는 "중국이 선점하려는 미래 생태계 속에서 한국만이 가질 수 있는 '깊이(Deep-Ecosystem)'를 확보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보고서는 제조 AI 전환(M-AX·제조업의 AI전환) 전략을 통해 소재·부품부터 완성품까지 이어지는 가치사슬 전반에 우리만의 특화 기술을 심어야 하고, 중국을 '대규모 테스트베드'로 활용하자는 조언도 내놨다. 중국을 더 이상 생산 기지나 단순 판매 시장으로 보지 말고, 새로운 기술과 알고리즘을 빠르게 검증할 수 있는 '학습 환경'으로 재정의해야 하자는 것이다.
중국과 선별적으로 협력하고, 제3국 공동 진출 등을 추진해야 한다고도 봤다. 특히 차세대 배터리, 자율주행 등 기술 상호보완성이 높은 분야에서는 중국과의 협력이 더욱 중요해진다는 조언이다. 한국의 핵심 기술·부품과 중국의 플랫폼 역량을 결합해 제3국 시장에 공동 진출하는 비즈니스 모델도 적극 고려해 볼 만하다. 조은교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단순히 대중 수출 의존도를 낮추는 차원을 넘어, 중국 주도의 글로벌 공급망에 어떻게 대응하고 편승하여 국익을 극대화할 것인지에 대한 전략 마련이 긴요하다"고 강조했다.
김대훈 기자 daep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