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은 어떻게 삶을 파괴하나…시대의 고통 응시한 베를린

입력 2026-02-22 17:07
수정 2026-02-23 00:19

은막의 도시 베를린에서 열린 제76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가 21일(현지시간) 막을 내렸다. 날 선 시대정신과 경계를 허무는 미학적 시도가 전 세계 영화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칸의 화려함이나 베니스의 고전적 권위 대신, 소외된 곳의 목소리에 집중하며 현실의 문제를 영화적 시각으로 치열하게 탐구하는 공론장을 자처했다.

최고 영예인 황금곰상은 튀르키예 출신의 독일 감독 일케르 차탁의 ‘옐로 레터스’에 돌아갔다. 독일 감독의 황금곰상 수상은 2004년 파티 아킨 감독 이후 22년 만이다. 권력에 의해 삶의 터전을 빼앗긴 연극인 부부의 갈등을 다룬 ‘옐로 레터스’는 국가 탄압 아래 놓인 예술가의 양심과 선택을 그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차탁 감독은 수상 소감에서 “진정한 위협은 우리 시대의 허무주의자들이 권력을 잡고 삶을 파괴하는 것”이라며 “서로 싸우지 말고 그들과 싸우자”는 강렬한 메시지를 던졌다. ◇22년 만에 황금곰상 수상한 독일이번 수상은 베를린이 견지해온 정치적 문제의식의 연장선에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베를린 영화제는 2023년 니콜라 필리베르의 ‘아다망에서’, 2024년 마티 디옵의 ‘다호메이’, 2025년 다그 요한 하우게루드의 ‘드림즈’ 등 최근 몇 년간 동시대의 뜨거운 의제를 담은 작품들을 연이어 황금곰상으로 선정해왔다. 올해 역시 국가 권력과 개인의 윤리를 다룬 작품이 최고상을 차지하며 그 선명한 행보를 이어갔다. 올해 영화제의 정체성은 아시아 배우 양자경의 수상 소감에서도 명확히 투영됐다. 아시아 여성 최초로 명예 황금곰상을 거머쥔 양자경은 “내가 어디에 속해야 하는지 헤매던 시절 베를린은 나를 반겨주었다”고 했다. 그의 발언은 베를린 영화제가 지난 76년간 지켜온 시대의 통증을 응시하고 정형화된 문법에 도전하는 실험적 포용성을 상징하는 대목이다.

경쟁 부문에 오른 작품들은 ‘사적인 균열과 정치적 압력이 투사된 시간’으로 정의된다. 특히 ‘제 구실을 못하는 가족’은 올해 가장 눈에 띄는 키워드였다. 은곰상 심사위원상을 받은 랜스 해머 감독의 ‘바다의 여왕(Queen at Sea)’는 치매 환자와 그를 지켜보는 가족의 고통을 섬세하게 포착해 울림을 주었다. 또한 코르넬 문드루초 감독의 신작 ‘바닷가에서(At the Sea)’ 역시 알코올 의존증 재활 후 돌아온 여성이 가족 내부에서 겪는 불가능에 가까운 화해 과정을 흥미롭게 풀어내며 가족이라는 안식처의 붕괴를 날카롭게 응시했다. 고립된 인간에 대한 탐구 역시 두드러졌다. 베를린은 연대의 당위성을 외치기보다 ‘왜 연대가 어려운지’를 고립의 미학을 통해 조명했다. 은곰상 주연상을 받은 산드라 훌러 주연의 ‘로즈’ 등은 부와 소외 속에서의 불편한 공존을 통해 유대가 어떻게 고립을 해소하는지 질문했다. 은곰상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에민 알페르 감독의 ‘샐베이션’(Salvation)은 튀르키예 산악지대의 분쟁을 통해 정치적 사건이 개인의 삶을 조여오는 방식을 탐구했다. ◇정치적 발언 영화제 내내 쏟아져한국 영화는 수상 소식은 없었으나 깊이 있는 시선으로 주목받았다. 홍상수 감독은 ‘그녀가 돌아온 날’로 파노라마 부문에 이름을 올렸고, 정지영 감독은 제주 4·3 사건을 다룬 ‘내 이름은’을 통해 베를린의 사회적 안목에 응답했다. 배우 배두나는 경쟁 부문 국제심사위원으로 참여해 황금곰과 은곰 수상작 선정 과정에 함께했다.

영화제의 또 다른 뜨거운 화두는 ‘예술가의 정치적 발언’에 있었다. 발단은 심사위원장을 맡은 거장 빔 벤더스 감독의 개막식 발언이었다. 당시 그는 가자지구 전쟁에 관한 질문을 받자 “우리가 정치판에 들어설 수는 없다”고 답했는데 이를 두고 영화제의 시대정신이 퇴색됐다는 여론의 뭇매가 이어졌다. 이 논란은 역설적으로 영화제 기간 내내 팔레스타인 문제와 각국의 독재 정권을 향한 영화인들의 더욱 거센 정치적 발언을 이끌어내는 도화선이 됐다. 실제로 은곰상 수상자를 포함한 많은 예술가들은 시상대 위에서 수감된 반체제 인사들과 가자지구의 비극을 언급하며 연대를 표명했다. 제76회 베를리날레는 삶의 조건을 탐구하고 불의에 맞서는 목소리들을 한데 모아 영화가 미래를 향한 성찰의 주춧돌이 될 수 있음을 입증하며 막을 내렸다.

유승목 기자/베를린=김효정 영화평론가·아르떼 객원기자 mo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