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우스>(Mouse·켈리 오 설리번, 알렉스 탐슨)
파노라마 섹션에 초청된 <마우스>는 켈리 오설리번과 알렉스 탐슨 연출의 두번째 극영화다. 선댄스 영화제에서 공개되었던 이들의 데뷔 장편 <고스트라이트>(2024) 은 인디펜던트 스피릿 어워즈를 포함 미국의 독립영화와 아트하우스 영화 평단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바 있다. <고스트라이트>가 그랬듯, 이들은 이번 <마우스>에서도 가족 간 상실의 이야기를 이어 나간다. 전편이 아들을 잃은 아버지가 아마추어 연극을 통해 상실을 극복하는 과정을 서정적이면서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렸다면 이번 작품 <마우스>는 가장 친한 친구를 잃은 소녀(전편에서 딸로 나왔던 캐서린 말렌 키퍼러가 주연을 맡았다)와 딸을 잃은 엄마가 고통을 분담하는 과정과 서로가 터득한 방법을 비춘다.
영화는 고등학교 3학년이 된 캘리와 미니의 소소한 일상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들은 늘상 유행가를 따라 부르고, 작은 해프닝에 웃음을 터뜨리며 일생을 함께 보내 온 둘도 없는 단짝이다. 노래에 남다른 재능이 있는 캘리는 학교의 연극반에서도 중추를 담당하는 인사이더지만 미니는 공부 이외에 별 다른 재능도, 외모도 내세울 것이 없는 지루한 존재다. 어느 날 이들의 그토록 찬란했던 시간이 한 순간에 멈춰버린다. 캘리가 교통사고로 즉사한 것. 이 시점부터 미니는 삶의 빛을 모조리 빼앗긴 듯 방황하기 시작하고, 캘리의 엄마, 헬렌(소피 오코니도) 역시 살아나갈 방법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이 둘은 필연처럼, 혹은 운명처럼 캘리가 좋아하던 노래 연습을 함께 시작하며 상처와 함께 살아나가는 법을 익히기 시작한다.
오설리번과 탐슨은 ‘가장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라는 화두와 상황을 아마도 가장 섬세하면서도 감성적으로 그릴 수 있는 감독이 아닌가 생각된다. 영화의 앤드 크레딧에서 보여지는 추모 문구로 예측되듯, 이는 아마도(부부인) 이들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것 만큼이나 뼈 아픈 무게의 죽음을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전편과 비슷한 설정, 가령 가족의 죽음, 그리고 예술로서 극복하는 과정 등은 동어 반복으로 보일 수 있으나 영화는 궁극적으로 죽음 이후의 일상이라는 감독들의 끊임 없는 탐구와 아직 끝나지 않은 듯한 그들의 애도를 실천하고 있다. 세 번째 작품에서 역시 이들이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해도 기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이들의 꾸준한 성찰 때문이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삶의 가치를 묻는 이야기이고, 과거의 기록이면서도 미래의 스케치이기도 하다.
<내 이름은>(정지영)
정지영 감독의 <내 이름은>은 제주 4.3을 다룬 첫 상업 영화다. 아직도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제주 4.3 참상은 이 영화 속에서 세개의 시점을 통해 그려진다. 그것은 1948년 제주 4.3 이 일어났던 그 해, 그리고 1998년과 현재. 이 세개의 시점의 주인공은 ‘영옥’ (신우빈·유준상)이다. 어린 시절 그는 늘 선글라스를 쓰고 다니는 엄마가 창피했다. 그녀는 또래의 엄마들보다 나이가 훨씬 많고, 햇빛을 보면 졸도를 할 정도로 기이한 트라우마가 있다. 영옥의 엄마, ‘정순’(염혜란)은 어린 시절 지워진 기억을 찾기 위해 정신과 상담을 받기 시작한다. 치료 세션 끝에 그녀는 자신도 모른 채 기억 속에 파묻혀 있던 처참하고도 충격적인 진실과 마주한다. 그리고 그 진실 속에 영옥과 정순의 이름이, 그리고 이름 없이 묻혀 있는 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인터뷰에서 정지영 감독은 한번도 제주 4.3을 찍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없다고 말했다. 그것은 그가 수 많은 작품에서 대한민국의 아픈 치부를 그렸음에도 제주 4.3 처럼 극단적인 살상, 그리고 예민한 역사를 그가 아닌, 더 잘 그려낼 수 있을 다른 사람이 하길 바랬기 때문이라고 했다. 결국 이제까지도 대중 영화 안에서 제주 4.3은 그려지지 못했고 이 프로젝트 역시 늘 그랬듯, 어려운 영화들을 고집해 온 정지영 감독의 몫이 되었다.
영화가 베를린에서 공개된 것은 의미심장하다. 해외관객들에게 생소하겠지만 분명 제주 4.3은 국가 폭력이 자행할 수 있는 비극의 극단이라는 점에서 비슷한 역사를 가진 그들의 공감을 얻었을 것이다. 가령 영화가 플래쉬 백에 플래쉬 백을 거듭하는 것은 단순히 역사를 재현하는 것을 넘어 시대와 세대 별로 사건을 맥락화 하기 위함이다. 결국 <내 이름은>은 제주 4.3을 그리는 이야기가 아닌, 현재 시점으로 사건을 가져오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를 만든 제작진과 크라우드 펀딩에 참여한 모든 이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이 영화로 하나의 이름이라도 더 발굴할 수 있기를. 지금이라도 자신의 이름으로 살 수 있는 용기를 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 또한 영화가 베를린에서 그랬듯, 가자에서, 우크라이나에서 그리고 세계 어딘가에서 역시 이름을 빼앗긴 자들에게 위안이 될 수 있기를.
<퀸 앳 시>(Queen At Sea·랜스 해머)
올해 베를린의 경쟁작들중 가장 강력한 후보로 주목받았던 작품이다. 영화는 충격적인 오프닝으로 시작된다. 영화의 메인 캐릭터, ‘아만다’(줄리엣 비노쉬)는 치매에 걸린 엄마를 방문했다가 그녀가 양아버지인 마틴과 성관계를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아만다는 주저 없이 경찰을 부르고 이내 마틴은 체포된다. 이 어처구니 없는 사건은 마틴의 체포로만 끝나지 않는다. 거동조차 불편한 아만다의 엄마, 레슬리는 강간 사건에 연루된 피해자들이 받는 고통스러운 신체 검사들을 받아야만 한다.
아만다가 마틴을 신고한 이유는 그녀의 엄마가 중증 치매환자이고, 성관계에 동의할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엄마의 안위를 위한 것이지만 아만다의 신고로 사실상 레슬리는 더 큰 고통을 안게 된다. 치욕스럽고 고통스러운 검사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마틴과 떨어져 지내야 하는 것. 이 모든 고통과 치욕스러운 과정을 자초한 아만다는 착한 양아버지를 체포 당하게 했다는 죄책감과 유연성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사회 시스템 사이에서 혼란스럽기만 하다.
<퀸 앳 시>는 놀라운 영화다. 사려 깊은 딸의 평범한 가정 방문으로 시작한 영화는 잔잔하지만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동기와 설정들로 아주 서서히 방향을 틀어 더더욱 예측하지 못했던 엄청난 비극으로 끝을 맺는다. 이야기의 화두는 노인을 중심으로 한 복지 시스템이지만 이는 켄 로치 식 접근 방법과는 매우 다른 식으로 법칙과 인간의 관계를 응시한다. 따라서 영화에서 그려지는 유럽식 복지 시스템, 그리고 노인 정책 등은 어쩌면 표피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레슬리와 마틴의 성생활, 혹은 깊은 애정 관계는 아만다의 딸과 그녀가 새로 사귄 남자 친구의 청초한 일상과 끊임 없이 병치된다. 지금은 주름으로 뒤 덮힌 노인들의 사랑의 과거가 그렇게 시작되었던 것 처럼.
궁극적으로 영화의 화두는 노인 정책이라기 보다는 ‘시간’과 ‘기억’으로 봄이 옳을 것이다. 해머 감독은 젊음과 늙음, 기억과 망각이 어떻게 시간에 따라 같고, 달라지는지 시적이지만 첨예한 시선으로 그린다. 참으로 잔인하고도 아름다운 영화가 아닐 수 없다. 그 가운데 줄리엣 비노쉬는 명민하고도 동정 어린 눈빛을 잃지 않는다. 최고의 이야기와 최고의 연기가 만난 또 하나의 걸작이다.
<더글라스 고든 바이 더글라스 고든>(Douglas Gordon by Douglas Gordon·핀리 프렛셀)
1993년, ‘24 Hour Psycho’라는 미디어 아트 작품이 공개되었다. 바로 알프레드 히치콕의 작품, <싸이코>의 명장면인 자넷 리의 샤워장 씬을 클로즈 업과 슬로우 모션을 통해 24시간으로 늘린 작품이다. 작품은 표절과 새로운 형태의 미디어 아트라는 양분된 평가를 받았지만 궁극적으로 이 작품을 만든 ‘더글라스 고든’이라는 신인 아티스트를 가장 혁신적이고 주목할 만한 새 얼굴로 등극시키는데 일조했다. 그는 터너 상 (The Turner Award) 을 포함해 뉴욕의 MOMA, 런던의 테이트 뮤지엄 등 전 세계의 가장 권위있는 시상식과 갤러리에서 화려한 데뷔를 할 수 있었다.
영화 <더글라스 고든 바이 더글라스 고든>은 이 문제적 아티스트, 더글라스 고든을 훗날 발견한 한 감독의 ‘추적 다큐멘터리’다. 그는 24시간 싸이코를 포함 그의 대표작들을 마주 한 이후, 이 아티스트에 대한 탐구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후 그가 더글라스 고든에게 연락을 했을 때 그는 ‘자신이 죽을 때 까지 기록하면 좋겠다’라는 조건을 내걸었지만 결국은 이 짧막한 다큐로 작품이 세상에 탄생했다. 미리 경고하건대, 100분이 채 되지 않는 이 작품은 꽤나 놀랍고, 친밀하며 전위적이다. 사실상 영화는 더글라스 고든의 작품 이야기라기 보다 인간 더글라스가 실제로 작품이 되어가는 이야기다. 그는 이제 예술을 떠나 생활 하기 힘들고, 그의 일상은 예술을 만드는 인물을 재현하는 실행에 가깝다.
일반인이 이해하기 힘든 일상임에도 영화의 울림은 크다. 특히 마지막 선언 (statement) 이 그렇다. “아름다움을 즐겨야 한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다(Let’s enjoy beauty. That’s the only we got).” 정말로 그렇다. 예술가들은 그저 “광대가 아니다” (더글라스 인용문). 정치와 사회가 바꾸거나 다음 세대에게 증여해주지 못하는 것을 예술은 할 수 있다. 고로, 그것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다. 실로 그것은 모든 것이다. 예술과 기록, 보는 사람과 만드는 사람. 그것은 늘 유기적이었으며 필연적이며 역사적인 관계였다.
베를린=김효정 영화평론가?아르떼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