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여성 이사비율 42%...EU 최상위권 이끈 비결은

입력 2026-03-04 08:36
수정 2026-03-04 08:37
[한경ESG] 여성 리더 ?
‘Balance for Better Business(B4BB)’ 안드레아 더모디 프로그 디렉터



아일랜드는 최근 몇 년 사이 기업 이사회 내 여성 비율이 가장 가파르게 상승한 국가 중 하나로 꼽힌다. 현재 유럽연합(EU) 내 대기업 이사회 여성 비율 5위를 기록하며, 2018년 16위에서 7년 만에 큰 폭으로 도약했다. 특히 아일랜드 대표 상장기업군인 ISEQ20 기업의 이사회 여성 비율은 42%로, EU 기준선으로 거론되는 40%를 넘어섰다. ISEQ20은 아일랜드 증권거래소에 상장된 기업 가운데 시가총액과 거래 규모를 기준으로 선정한 상위 20개 기업으로 구성돼 있다.

이 같은 변화의 중심에는 기업이 주도하고 정부가 지원하는 독립 기구 ‘Balance for Better Business(B4BB)’가 있다. B4BB는 매년 아일랜드 기업의 이사회와 고위 경영진 성별 구성 데이터를 공개하고, 노동시장 연구를 통해 업종별·조직별 장벽을 진단한다. 목표는 아일랜드 기업의 이사회와 고위 리더십에서 여성 비율 40% 이상을 달성하는 것이다.

B4BB는 정부가 설립했지만 기업 주도 검토 그룹(기업 주도, 공공 지원) 형태로 운영되며, 궁극적으로 더 나은 사회적 결과를 목표로 한다. 특히 주목할 점은 법적 강제 대신 ‘자율(자발적 목표 설정)’을 택했다는 점이다.

안드레아 더모디 B4BB 디렉터는 구체적인 로드맵과 실행 도구 제공을 통해 기업이 스스로 목표를 설정하도록 유도하는 방식을 택하면서 전향적인 변화를 이끌고 있다. 더모디 디렉터는 글로벌 금융권에서 20년 이상 다양성·형평성·포용(DEI) 전략을 실무로 이끈 장본인이다.

그는 글로벌 금융기관인 스테이트스트리트(State Street)의 유럽·중동·아프리카(EMEA) 지역 다양성·포용성(Diversity & Inclusion) 부문을 총괄하며 관련 분야의 전문성을 쌓았다. 현재는 아일랜드 현지에서 컨설팅사 더모디(Dermody)를 운영하며 헬스케어·기술·엔지니어링·금융·항공 등 다양한 산업을 자문하고 있다. 그는 “다양한 리더십을 갖춘 기업은 의사결정의 질이 높고 리스크 관리에 탁월하다”며 “기술·금융·생명과학 등 혁신이 중요한 산업에서 다양성은 새로운 사고를 여는 열쇠”라고 말했다.

이처럼 아일랜드의 성별 다양성 지표가 단기간에 급상승한 배경에 대해 더모디 디렉터는 ‘자발적 목표 설정’과 ‘데이터 기반의 투명성’을 핵심 요인으로 꼽았다. 그는 “법적 강제성이 있는 쿼터제 대신 기업이 자발적으로 목표를 세우도록 유도했다”며 “강제 할당은 숫자를 맞추는 데 그치기 쉽지만, 자발적 목표는 전략적 의사결정을 이끌어내고 조직 문화를 실질적으로 변화시킨다”고 말했다. 실제로 ISEQ20 기업의 이사회 여성 비율은 2018년 B4BB 설립 당시보다 24%포인트(p)나 늘어나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B4BB가 제시하는 로드맵은 산업별 상황을 고려해 기업이 선택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툴 키트’에 담겨있다. 더모디 디렉터는 이를 ‘B4BB 로드맵’이라고 부르며 “의지를 실질적 영향력으로 전환하고 변화를 가속하는 필수 도구”라고 설명했다. 승계 계획부터 리더십 개발까지, 이사회와 고위 경영진 수준에서 성별 균형을 내재화할 수 있도록 단계별 가이드와 실행 프레임을 제공하고 있다.

그는 "제조·건설·엔지니어링처럼 전통적으로 여성 인력이 부족한 분야는 채용 자체가 과제인 반면, 다른 산업에서는 여성 인재의 유지가 더 큰 고민”이라며 “각 기업의 맥락에 맞게 전략을 설계하도록 지원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강조했다.

비상장사나 민간 기업의 변화 속도는 상대적으로 더딘 편이다. 이에 대해 B4BB는 중앙통계청과 협력해 2년마다 관련 조사를 실시하며 데이터를 축적하고 있다. 더모디 디렉터는 “민간 기업은 아일랜드 전체 고용의 70% 이상을 담당하지만 이사회 성별 균형은 상장사보다 뒤처져 있다”며 “2025년 현재 민간 기업 이사회 여성 비율은 26%로, ISEQ20(42%)과 격차가 존재한다”고 말했다.

이어 “아일랜드는 거의 완전고용 상태에 가까워 인재 경쟁이 치열하다. 여성 인재를 충분히 유치하지 못하는 기업은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며 “성별 균형은 단순한 사회적 가치가 아니라 기업의 인재 경쟁력, 나아가 지속가능한 성장과 직결된 문제”라고 덧붙였다. 다음은 안드레아 더모디 디렉터와의 일문 일답.


최근 DEI(다양성·형평성·포용성)가 ESG의 핵심 요소로 부각되고 있다. 기업 경영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나.

“DEI는 ESG 중 ‘S(사회)’ 요소를 강화하고 ‘G(거버넌스)’의 질을 높인다. 이사회가 이해관계자들의 다양성을 반영할 때 비로소 환경이나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도 더 책임감 있고 미래지향적인 선택을 할 수 있다. 이제 성평등 지표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임금 격차나 승진율처럼 재무 지표와 동일한 엄격함으로 관리되어야 하는 ‘핵심성과지표(KPI)’다. 아일랜드에서는 많은 기업이 DEI 성과를 경영진 보상 체계와 연계하고 있다.”

강제 할당제 대신 ‘자발적 목표’를 선택했음에도 상장사 여성 이사 비율이 24%p나 급증했는데 비결이 궁금하다.

“세 가지 강력한 도구를 활용하고 있다. 첫째는 ‘데이터 기반의 스토리’다. 성별 균형을 이뤘을 때 기업이 어떻게 혁신하고 지속 가능하게 성장하는지 실제 사례를 보여준다. 둘째는 모든 기업의 데이터를 공개하는 ‘공개 리포트’다. 모든 데이터를 리포트로 공표해 기업들이 업계 내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자발적으로 경쟁하게 한다. 셋째는 ‘성별 임금 격차 공시’다. 50인 이상 모든 아일랜드 기업은 이를 공개해야 하며, 이는 기업들을 실질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강력한 지렛대로 작용하고 있다.”

기업들을 지원할 때,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의 프로그램과 도구를 제공했나.

“아일랜드 기업 전반의 성별 균형 진전을 지속시키고 영향력을 넓히는 데 있다. 40% 목표에 근접했거나 목표를 달성한 조직들이 그 동력을 유지하도록 돕는 동시에, 모든 부문에서 성별 균형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각 조직의 상황에 맞는 의미 있는 조치를 취하도록 지원한다. 이를 위해 ‘B4BB 로드맵’을 중심으로 승계 계획부터 리더십 개발까지 구조화된 단계와 실천 가이드를 제공한다.”

단순히 여성 수의 증가를 넘어 의사결정 방식, 리스크 관리, 혁신문화 측면에서 기업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궁금하다.

“균형 잡힌 리더십은 모든 기업의 전략적 필수 과제다. 성별 균형에 전념하는 기업은 인재 유치, 혁신 촉발, 성과 향상 측면에서 경쟁 우위를 점한다. 다양성은 특히 기술·금융·생명과학 분야에서 혁신의 전략적 동력으로 인정받는다. 포용적 관행은 신선한 사고를 이끌어내고 문제 해결을 가속하며 세계적인 인재를 끌어모은다. 경쟁적인 노동 시장에서 균형 잡힌 팀은 인재를 유치하고 유지하는 핵심 레버다.”

아일랜드 내 성별 다양성 측면에서 빠른 변화를 보인 산업은.

“산업별 맞춤 전략이 매우 중요하다. 최신 연례 보고서에 따르면 정보통신(IT) 서비스와 건설 부문이 지난 12개월 동안 이사회 내 여성 비율에서 3.9%p로 가장 높은 상승폭을 기록했다. 여성 비율이 높은 상위 3개 섹터는 정보통신, 행정 및 지원 서비스, 금융 및 보험업이다.”

비상장사(민간 기업)에서는 진전이 더딘 이유가 무엇인가.

“상장기업들은 큰 진전을 이뤘지만, 지금은 민간 비상장 기업의 격차를 줄이는 데 집중하고 있다. 민간 기업은 전체 인력의 70% 이상을 고용하지만 이사회 성별 균형은 상장사에 뒤처져 있다(2025년 현재 민간 기업 26% vs ISEQ20 42%). 그래서 우리는 중앙통계청과 협력해 2년마다 조사를 실시하고, 투명성과 공공 보고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설득을 지속하고 있다.”

한국은 여전히 여성 임원 비율이 낮다. 구조적 장벽을 깨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중간 관리직에서 고위직으로 올라가지 못하는 ‘부러진 사다리(broken rung)’ 현상이 문제다. 이는 비공식적인 네트워크 중심의 승진 구조와 무의식적 편견 때문이다. 한국 기업들은 성별 균형을 단순한 ‘여성 복지’나 ‘HR 캠페인’으로 봐서는 안 된다. 이를 ‘핵심 경영 우선순위’로 격상하고, 투명한 승진 프로세스와 유연한 근무 구조를 구축해야 한다. 아일랜드의 경우 DEI 성과를 경영진의 보상 체계와 통합하는 방식을 활용했는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기업이 얼마를 삭감했는지 트래킹하지는 않지만, 많은 상위 기업이 이를 KPI에 반영하고 있으며 그 스토리를 우리 웹사이트에 공유해 다른 기업들이 참고하게 하고 있다.”

능력주의를 강조하는 젊은 층에서는 성별 균형 목표가 역차별이라는 비판이 있다.

“B4BB의 목표는 ‘여성 40%, 남성 40%, 그리고 자율 20%’의 균형이다. 여성의 권리를 증진하는 것이 남성에게 불이익을 주는 것이 아니다. 성별 균형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 기업 성과와 사회적 건전성을 높이는 전략이다. 균형이 잡힌 조직이 더 나은 의사결정을 내리고 더 높은 회복탄력성을 보인다는 점이 입증되고 있다.”

ESG의 ‘S(사회)’는 수량화가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성별 평등 지표는 어떻게 다뤄져야 하나.

“성별 평등 지표는 ‘선택적 공시’가 아니라 KPI로 다뤄져야 한다. 이사회·리더십 대표성, 임금 격차, 승진·유지율, 기회 균등 정책 등 비교 가능한 데이터가 포함돼야 하며, 재무 지표와 동일한 엄격함으로 ESG 평가에 통합돼야 한다.”

성별 분리 데이터(gender-disaggregated data) 확보가 왜 중요한가.

“성별 분리 데이터는 ‘평균’이라는 수치 뒤에 숨겨진 실상을 드러낸다. 데이터 없이는 장벽이 어디에 있는지, 정책이 작동하는지 진단할 수 없다. 채용·승진·임금 형평성 등 타기팅된 개입을 위한 근거가 되고, 이해관계자와 투명하게 소통할 수 있게 해준다.”

최근 인공지능(AI) 기술이 채용과 평가에도 도입되고 있는데 오히려 성별 불평등을 야기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있다.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최근에 우리가 낸 보고서에서도 이 문제를 다뤘는데 실제 두 가지에 대한 우려가 있다. 우선 AI를 설계하고 거버넌스를 결정하는 자리에 여성이 배제되고 있다는 점, AI의 영향을 크게 받는 산업군에 여성이 많이 포진해 있다는 점이다. 디지털 전환 시대에 성별 균형을 지키기 위한 새로운 모니터링 체계가 필요하다.”

이미경 기자 esit917@hankyung.com│사진 서범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