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시장은 ‘경제의 거울’입니다. 증시에 상장된 기업의 실적이 좋아지고 나라 경제의 기초체력이 튼튼해지면 주가지수는 자연히 올라갑니다. 물론 증시는 투자자의 기대를 미리 반영해 실물경제보다 먼저 움직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경기가 호전되기 전에 주가가 먼저 오르는 거죠. 우리나라 증시의 활황세는 한국 경제의 저성장이나 구조개혁 부진의 문제가 앞으로 개선될 것이라는 기대가 반영된 것으로 보입니다.
어떤 요소가 이런 기대를 만들까요? 정부의 역량일까요, 아니면 기업의 경쟁력일까요? 두 가지 요소만 놓고 보면 단연 기업이 더 중요합니다. 삼성·현대차 등 한국 기업의 경쟁력이 세계시장을 선도하고, 실적으로 증명되고 있으며, 한국 증시의 시가총액이 더 커질 것이라고 믿는 거죠. 지수 3000포인트에 막혔던 우리나라 증시가 ‘오천피(코스피 5000)’ 시대에 접어든 것은 바로 한국 기업의 힘에서 비롯됩니다.
한국 기업은 의사결정이 빠르고 장기적 관점에서 대규모 투자를 집행하는 강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한국 기업이 다 그런 건 아닙니다. 과감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기업주(owner)가 경영을 진두지휘할 때 가능한 일이죠. 첨단기술 경쟁과 글로벌 시장 각축전이 치열한 지금, 한국식 ‘오너경영’의 장점이 다시 주목받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4·5면에서 기업지배구조의 중요성, 한국식 지배구조의 특징과 변천사 등을 공부해보겠습니다. 지배구조가 기업 미래와 경쟁력 좌우
장기 투자, 신속 결정이 '오천피'시대 열어
기업지배구조(corporate governance)라고 하면 어렵게 느껴지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부분은 경제가 건전하게 발전하기 위한 중요 요소여서 공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누가 기업을 지배하는가’
기업지배구조는 말 그대로 누가 기업을 사실상 지배하고 있는가에 관한 겁니다. 예를 들어 대주주의 지분 구성, 전문경영인의 독립성, 이사회에 대한 감시 장치 등의 제도를 보면 그 기업의 실질적 지배자를 알 수 있습니다. 기업지배구조는 주주·이사회·채권자·종업원 등의 의견 차이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이들의 권한을 배분하고 감시·견제합니다. 기업이 지속가능한지, 계속 성장할 수 있는지 운명을 판가름 짓는 중요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세 가지 지배구조 유형
기업지배구조의 유형에는 주주, 이해관계자, 소유주 가족 또는 계열사 중심 등 세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주주의 이익을 가장 중시하는 ‘주주자본주의 모델(Shareholder Capitalism)’을 봅시다. 주주는 대개 기업의 주가, 수익성, 배당금 규모, 소수주주 의견 존중 등에 민감합니다. 이 모델은 ‘기업의 주인은 주주’라는 철학을 바탕으로 주주가치를 극대화하려 합니다. 미국과 영국에서 주로 발달한 이 모델은 경영진의 성과도 주가와 연결시키는 경향이 있어요. 이 때문에 경영진이 단기 실적에 치중하고 장기 투자나 구조개혁은 뒷전으로 미루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습니다. 아무튼 이를 ‘주식시장이 통제하는 회사’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다음으로 독일 등 유럽에 많은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모델(Stakeholder Capitalism)’입니다. 이 모델은 주주뿐 아니라 근로자·채권자·지역사회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이익을 고려합니다. 은행이 기업의 지분과 채권을 보유하고 오랜 기간 거래를 이어온 경우가 많아 주식시장보다는 은행 등 금융기관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특징적인 것은 이사회가 2개라는 점입니다. 일반적인 이사회 같은 기능을 하는 경영이사회가 있고, 이를 주주와 종업원 대표가 참여하는 감독이사회가 감시하고 최종 승인을 합니다. 이런 지배구조에선 근로자의 고용이 안정되고 사회적 갈등이 줄어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의사결정의 속도가 느리고 시장 환경 변화에 대한 대응력이 떨어집니다.
마지막으로 ‘가족 기반(Family based) 또는 계열사 모델’입니다. 오너가 그룹과 계열사를 지배할 수 있도록 지분 구조를 짜온 우리나라의 많은 기업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일본의 경우, 같은 계열 안의 기업끼리 서로 지분을 교차해 소유하고, 주거래은행도 핵심적 지분을 갖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너의 강한 리더십이 강점이지만, 소수 주주의 권익이 침해되거나 경영권 승계 과정의 불법·탈법 논란이 자주 벌어집니다.
세계경제 뒤흔들기도
기업지배구조는 주주를 대신해 회사를 경영하는 전문경영인(일종의 대리인)의 일탈을 막기 위한 제도로 고안됐습니다. 그런데 경영인의 과도한 공격경영, 회계부정 문제 등은 개별 기업을 넘어 경제와 금융시스템 전반을 위기로 몰아넣습니다. 2001년 미국 에너지 대기업 엔론, 2002년엔 정보기술(IT) 기업 월드컴이 대규모 회계부정을 저지르면서 큰 문제가 됐어요. 금융파생상품에 무리하게 투자한 리먼 브러더스의 파산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까지 불러왔죠. 한 기업이나 금융산업 전반에서 이런 문제를 감시하고 통제하지 않으면 나라 경제는 물론 세계 경제가 휘청이게 됩니다. 그래서 기업지배구조에 대한 관심과 제도 발전이 이후 가속화했습니다.
우리나라도 1980~1990년대 낮은 지분율로 그룹 전체를 지배하는 대기업 오너들의 문제가 많이 지적됐습니다. 그룹 관계사 간 복잡한 상호출자, 이를 기반으로 한 오너의 그룹 지배, 오너 경영자의 독단적 의사결정과 감시 시스템 미흡이 큰 문제로 대두됐습니다. 1997년 외환위기를 불러오는 빌미가 되기도 했죠. NIE 포인트 1. 기업지배구조 문제가 대두한 배경에 대해 알아보자.
2. 주주자본주의 모델에서도 대규모 회계부정이 발생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3. 한국식 오너경영의 과거 문제점에 대해 정리해보자. '주인 없는 회사가 선진적' 인식은 편견
"정답은 없다"…세계가 K-거버넌스 주목
기업지배구조 개념은 출발 시점부터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전제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토대로 기업의 통제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여겼죠. 그러나 학자에 따라서는 소유·경영 분리의 이점이 과장됐거나, 20세기 후반 미국의 대기업 지배구조를 일반화한 개념일 뿐이라는 시각도 있습니다. 최근 연구는 소유와 경영의 분리 수준을 넘어섭니다. 경영자나 지배주주가 정보를 독점하고, 외부 투자자와 이해관계자는 여기에 접근하기 어렵다면 큰 문제입니다. 소유와 경영이 분리됐다고 이런 문제가 자연적으로 해소되는 건 아닙니다. 초고속 성장 신화를 이어가는 유니콘 기업(기업가치 10억달러 이상 스타트업)은 창업자와 소수 지배주주에게 차등 의결권을 보장하기도 합니다.
학계에서도 인정받는 오너경영
소유와 경영의 분리가 ‘신화’일 수 있다는 시각은 한국 기업의 지배구조를 새롭게 평가하는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나라 재벌의 지배구조는 이른바 ‘정경유착’을 만들었고, 사익 추구와 내부거래 남용 등 바람직하지 않은 기업 경영의 상징으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기업 경쟁 격화, 초불확실성 시대로 대변되는 환경 변화로 인해 한국 특유의 오너경영이 지닌 강점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첫째는 장기적 관점에서 대규모 투자를 과감하게 추진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전문경영인은 자신의 임기 안에 성과를 증명해 보이려고 장기투자를 꺼리며 단기 실적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10년 뒤를 내다보는 대규모 선제적 투자는 오너 경영자라야 가능합니다. 반도체 불황기에도 고대역폭메모리(HBM)에 공격적으로 투자한 SK하이닉스의 성공 사례는 최태원 그룹 회장의 결단이 주효했습니다.
다음으로 신속한 경영 의사결정입니다. 기술 패러다임이 바뀔 때는 기존의 성공 방식을 따라가는 게 정답이 아닙니다. 현대차그룹의 정의선 회장은 회사의 사명(mission)을 차를 만드는 기업에서 ‘모빌리티 솔루션 기업’으로 빠르게 재정의했습니다. 전기차 전용 플랫폼을 개발하고 피지컬 인공지능(AI) 및 자율주행과 연결시키면서 글로벌 업계를 선도하는 기업으로 회사의 위상을 한 단계 올려놓았습니다. 오너경영은 또 그룹 내 여러 자원을 유망 신산업에 집중시킬 수 있는 자원 동원력도 갖추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철저한 주인의식을 지녀 위기 상황에 대응하는 능력이 소유와 경영이 분리된 기업에 비해 뛰어납니다.
학계에서도 한국식 오너경영의 장점을 적잖게 조명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한국 재벌의 성장 전략과 지배구조를 분석해 세계적 명성을 얻은 장세진 싱가포르국립대(NUS) 교수의 연구를 들 수 있습니다. 장 교수는 <재벌: 한국의 기업집단(The Business Groups in South Korea)> 등의 저서를 통해 오너경영의 실질적 장점을 각종 데이터로 증명해보였습니다. 그는 오너의 강한 리더십과 빠른 결단, 그로 인한 대규모 자본 투입이 반도체·전자 등 고성장 분야에서 성공을 거둔 결정적 요소였다고 주장합니다.
투명경영 시스템으로 보완
오너경영의 장점은 ‘유능한 오너 경영자’와 ‘투명한 의사결정 시스템’이 결합됐을 때 발휘될 수 있습니다. 판단력이 흐려진 오너가 독단적 결정을 내리는데 견제 장치가 부족하다면 그룹 전체가 위험에 빠질 수 있죠. 이런 문제를 예방하기 위해 우리나라 기업은 이사회를 전문성 높은 이사들로 구성하고, 사외이사 권한을 강화하며, 준법감시(컴플라이언스) 체계를 적극 도입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투명한 오너경영을 안착시키려는 시도입니다.
최근의 코스피 5000 달성과 천스닥(코스닥 1000 시대) 개막은 오너경영의 위력이 발휘된 결과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런 요인을 빼놓고 다른 설명이 가능할까요? ‘주인 없는 회사가 선진적’이라는 인식이 근거 없는 편견이 아닐까 되짚어보는 계기로 삼았으면 합니다. NIE 포인트 1. 오천피, 천스닥과 오너 경영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자.
2. 한국 특유의 기업지배구조는 다른 나라 기업에도 적용 가능할까?
3. 투명경영 시스템이 원래 의도대로 기능할 수 있을까?
장규호 한경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daniel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