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끝까지 울린다…키신·임윤찬 '최애 피아노'

입력 2026-02-19 17:39
수정 2026-02-20 01:15

피아노의 소리는 역설적으로 ‘소멸’에서 시작된다. 건반을 누르는 찰나, 정점을 찍고 곧바로 사라져버리는 운명을 타고났다. 그래서 피아니스트는 사라져가는 잔향을 필사적으로 붙들어 찰나의 음에 생명을 불어넣는 존재다. 우리 삶이 생성과 소멸이라는 우주 섭리를 따르듯, 피아노 역시 뜨겁게 태어나 고요하게 저문다.

명품으로 불리는 피아노의 비밀은 단순히 그 소리에만 있지 않다. 악기가 빚어내는 음악은 기계적인 진동을 넘어 음과 음 사이 간격, 연주자의 숨결, 객석의 호흡까지 그 모두를 껴안는다. 수백 년 된 나무의 결이 연주자의 손끝과 만날 때 보이지 않는 공기의 질감조차 하나의 악기가 돼 공명하기 시작한다.

88개의 건반은 곧 88개의 우주다. 20세기 거장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는 이 비밀스러운 본질을 이렇게 꿰뚫었다. “피아노는 타악기처럼 연주돼야 하지만, 그 울림은 노래하는 악기여야 한다.” 차가운 철현과 망치가 부딪치는 물리적 타격을 넘어 어떻게 영혼을 울리는 가창(歌唱)으로 승화시킬 것인가. 이 난해한 숙제를 풀기 위해 피아노는 장인의 고집스러운 손길과 연주자의 고독한 시간을 견디며 진화해 왔다. 우리가 임윤찬의 연주에서 목격하는 그 거대한 우주 역시 결국 악기와 인간이 맞닿아 만든 신비로운 결과물이다.

바이올린이 한 줄기 유려한 선율로 서정성의 정점을 보여준다면 피아노는 스스로 복합적인 세계를 구축한다. 다른 악기의 조력 없이도 홀로 멜로디와 화성을 구현하는 피아노. ‘1인 오케스트라’로 불리는 이 악기는 무대에서 가장 고독하지만, 동시에 가장 독보적인 주연이다. 텅 빈 무대, 덩그러니 놓인 피아노 한 대가 2000석 객석의 공기를 단숨에 압도하는 에너지는 이 악기만이 가진 마법. 단순한 목재와 철선의 조합이 어떻게 인류의 영혼을 위로하는 명기가 됐을까.

클래식 음악의 영원한 주인공이자 가장 대중적인 악기인 피아노의 세계로 들어가보자. 피아노가 빚어내는 다채로운 소리의 본질부터 그 발전의 역사, 피아니스트들의 뒷이야기, 명기를 만들어내는 장인들의 기록을 차례로 펼쳐봤다.거장들이 선택한 세계 3대 명품 피아노
판매량 1위 스타인웨이…따뜻한 음색, 뵈젠도르퍼…파지올리, 음의 한계를 확장
“도착하면 가장 먼저 공연장에 가서 피아노를 확인해요. 스타인웨이 피아노가 맞는지.”

영화 ‘그린 북’에서 천재 피아니스트 돈 셜리는 남부 순회공연을 떠나며 운전기사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는 스타인웨이 피아노가 아니면 연주하지 않는다. 영화만의 얘기가 아니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들은 공연 전 자신이 원하는 브랜드의 피아노가 반드시 준비돼야 한다는 조항을 계약서에 일일이 넣는다. 자기 피아노를 비행기로 옮기는 일을 요구하기도 한다. 물론 이 경우 오케스트라 전체 인원의 여비와 맞먹는 비용이 든다.

피아노에도 명품은 존재한다. 명성 높은 콘서트홀에 오르는 피아노는 주로 스타인웨이, 뵈젠도르퍼, 파지올리 셋 중 하나다. 판매량으로만 따지면 스타인웨이가 압도적이지만, 연주자의 취향이나 프로그램에 따라 무대에 올라가는 악기 브랜드가 매번 바뀌기 때문에 ‘부동의 1위’는 없다. 서열을 따지는 일이 부질없는 이유다. 그래도 궁금증은 남는다. 전설적인 피아니스트들이 선택한 피아노는 무엇이고, 도대체 왜 그토록 강하게 매혹됐을까.호로비츠가 사랑한 피아노, 스타인웨이 앤드 선스‘피아노의 황제’로 불리는 예브게니 키신부터 크리스티안 지메르만, 조성진, 임윤찬까지…. 이들 곁엔 ‘스타인웨이 앤드 선스’가 함께한다. 미국 뉴욕 카네기홀 등 전 세계 공연장의 90% 이상에 스타인웨이 피아노가 있고, 이 브랜드를 고집하는 연주자는 일일이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다.

스타인웨이의 강점은 ‘탁월한 반응력’이다. 핵심은 ‘액션’에 있다. 액션은 건반을 누를 때 해머가 현을 때리도록 하는 장치. 스타인웨이의 액션은 피아니스트가 건반을 누르는 힘의 세기를 정교하게 현에 전달하고, 해머가 현을 때린 즉시 본래 위치로 돌아오도록 하는 기술력이 뛰어난 것으로 유명하다. 이를 가능하도록 도운 인물이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다. 그는 평소 반응이 즉각적이고 전달력이 우수한 소리를 선호했는데, 이에 맞추기 위해 스타인웨이 기술진은 연구를 거듭했다. 현재 스타인웨이 건반은 타사 피아노보다 약 13% 더 빠르게 반복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인간의 목소리’를 닮은 피아노, 뵈젠도르퍼“모든 악기는 인간의 목소리를 닮기 위해 노력하는데, 뵈젠도르퍼는 그 목표를 매우 높은 차원에서 실현한다.”

‘피아니스트의 교과서’로 불리는 헝가리 출신 거장 언드라시 시프가 남긴 말이다. 그의 표현처럼 이 피아노는 따뜻하면서도 담백한 음색, 풍부한 울림을 자랑한다. 이그나츠 뵈젠도르퍼가 1828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만든 이 피아노 브랜드는 프리드리히 굴다, 정명훈 등이 선택한 악기로도 유명하다. 뵈젠도르퍼 소리의 비밀은 피아노 몸체를 하나의 공명체처럼 활용하는 데 있다. 보통 피아노에선 사운드보드가 공명판 역할을 하는데, 뵈젠도르퍼는 사운드보드, 건반 하단, 내부 프레임, 측판 등 전체 구조가 하나의 거대한 공명 상자처럼 진동하도록 설계됐다. 빈 전통 피아노 제작 기법에 따른 것으로, 바이올린이 울림을 만들어 내는 원리에 가깝다. 현악기 등에 주로 쓰이는 가문비나무로 전체의 80% 이상을 만든다는 것도 뵈젠도르퍼의 차별화 요소. 선명하고 화려한 소리의 스타인웨이와 다른 서정적인 사운드를 불러내기 때문에 18~19세기 고전주의 시대 음악에 잘 어울린다는 평가를 받는다.2회 연속 쇼팽 콩쿠르 우승자 배출, 파지올리이탈리아의 파지올리는 2021년(브루스 리우)과 2025년(에릭 루) 2회 연속 쇼팽 국제 콩쿠르 우승자를 탄생시키며 다시금 주목받은 브랜드다. 알프레트 브렌델, 다닐 트리포노프 등이 애정하는 피아노로도 유명하다. “이 악기는 피아노가 들려줄 수 있는 소리의 한계를 크게 확장했다”는 앤절라 휴잇의 표현처럼 명료하면서도 폭발적인 타건과 폭넓은 음색을 실현하는 피아노로 잘 알려져 있다. 파지올리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3m가 넘는 그랜드피아노를 만드는 브랜드이기도 하다. 파지올리 F308은 현존하는 피아노 중 가장 큰 모델이다.

조민선/김수현 기자 sw75j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