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영화제 찾은 정지영 감독…"4·3은 아직 이름 없는 사건"

입력 2026-02-19 10:56
수정 2026-02-19 11:04
지난 2월 12일 칸, 베니스와 함께 3대 영화제로 꼽히는 베를린국제영화제가 열렸다. 제76회를 맞는 올해의 영화제에서는 정지영 감독의 <내 이름은>, 홍상수 감독의 <그녀가 돌아온 날> 그리고 유재인 감독의 <지우러 가는 날>을 포함한 총 3편의 한국영화가 상영된다. 아울러 주목할 만한 것은 경쟁부문의 심사위원 중 한 명으로 배두나 배우가 선정되었다는 사실이다. 경쟁 섹션에는 한국 작품이 없지만 한국 영화(인)들의 활약이 기대되는 에디션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세 편의 작품 중 <내 이름은>은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노장 정지영 감독의 첫 베를린 참여작이면서 동시에 영화는 상업 영화로서의 첫 제주 4·3 영화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도 (비교적) 널리 알려지지 않은 제주 4·3 참상이 해외 관객들에게 공개되는 매우 의미있는 상영이 아닐 수 없다. 베를린 현지에서 프리미어 상영을 마친 정지영 감독을 만나 작품 전반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제주 4·3 사건에 대한 감독 본인의 생각들을 들어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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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단 베를린 초청을 축하 드린다. 베를린에 오랜만에 오신 소감은 어떤지 궁금하다.

"베를린은 12년 전에 베를린 한국영화제로 방문했던 것이 마지막이다. 그때는 겨울이 아니라 이렇게 추운걸 몰랐는데 이번에 와보니 정말 춥더라. 걸어 다니며 거리를 즐길 엄두가 안 날 정도로 말이다. 왜 독일에 철학자가 많이 배출되었는지 새삼 깨달았다 (웃음)."

▶ <부러진 화살> (2012)을 포함, 감독님은 늘 어려운 영화를 선택하시지 않나. 한국사회의 치부와도 같은 사건들, 혹은 가려진 역사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위해 용기를 내야 하는 프로젝트 말이다. 이번 영화는 제주 4·3 사건을 다룬 영화다. 언제부터 품어 왔던 주제인가.

"솔직히 말해서 제주 4·3 사건에 대해서 내가 언젠가 영화를 찍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물론 알고 있는 사건이었고, 중요한 사안이지만 내가 아닌 더 합당한 감독들이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다. 가령 제주도에 살고 있는 장선우 감독이 제주 이 사건에 대한 영화를 준비한 적도 있었고, 다른 선배 감독이 준비한 적도 있었다. 다만 그들의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았고 수년이 흐른 상태에서 시나리오 공모 당선작을 받게 되었다. 영화화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긴 했지만 그때도 시나리오 자체가 그렇게 만족스럽진 않았는데 이 영화에서 다루고 있는 ‘이름’에 대한 이슈, 즉 이름을 찾는 혹은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라면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각색만 2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 아직도 턱없이 부족하긴 하지만 제주 4·3 사건을 다룬 영화가 최근에 와서 많이 제작되고 공개되고 있다. 그럼에도 감독님이 제주 출신이 아니기에 망설여지거나 더 신경 쓴 부분도 있지 않았는지.

"사실 크게 두렵지 않았던 것이 제주에 거주하시는 분들, 그리고 오피니언 리더들을 중심으로 영화의 추진위원단을 구성했다. 또한 그 분들 역시 나의 전작들, 예를 들어 <남부군>이나 <부러진 화살> 등을 좋아해 주시고, 내가 제주 4·3 사건을 그릴 수 있을 정도의 용기가 있는 감독이라고 믿어주었다. 물론 제주도민들에게 아직 공개가 안된 상태라 그 반응이 궁금하긴 하지만 모든 영화에는 호불호가 존재하기 마련이 아닌가.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영화를 만들 수가 없다 (웃음)."

▶ 프리미어 상영 후의 Q&A에서도 하신 말씀이지만 영화에는 3개의 타임라인이 존재하지 않는가. 소년의 어린시절, 그리고 현재의 이야기, 엄마의 과거(4·3 사건) 이야기라는 시점으로 말이다. 영옥/정순의 과거로 거슬러가는 단순한 방식이 아닌, 이런 복수의 시간을 교차시킨 이유가 있을지.

"나는 역사를 단순 재현하는 일을 경계하는 편이다. 역사를 재현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역사가 현시점에서 어떤 가치와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을지 생각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 현시점에서 과거 사건을 맥락화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이 영화에서도 4·3 사건이 일어난 시점, 그리고 1998년에 소년이 엄마를 기억하는 시점, 그리고 현재에 어른이 되어 버린 소년의 시점을 통해 이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들, 그리고 사건의 인식 자체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그리고 싶었다. 그리고 이 긴 시간을 걸쳐 추모와 정리, 그리고 화해가 이루어지길 바랐다."



▶ 제목이 함유하듯, 이 영화에서 ‘이름’이란 의미가 굉장히 중요하지 않은가. 이는 어떤 비극적인 사건으로 인해 자신의 이름을 버려야 했던 캐릭터의 여정을 함축하기도 하고 제주 4.3 사건에서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피해자들을 떠올리게도 한다.

"그렇다. 이 영화는 어찌보면 이름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제주 4·3 사건은 아직도 그 공식 이름, 즉 명칭이 없는 사건으로 남아있다. 지금도 이름이 안 지어졌을 정도로 인식도 낮고 논쟁도 많은 예민한 이슈인 것이다. 또 다른 한면에는 이름을 밝히지 못하고 살고 있는 피해자들이 있다. 극중 영옥/정순처럼 말이다. 그들에게 이름을 찾아주는 작업이 역사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영화적으로도 필요하다."

▶ 염혜란 배우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소년들>에서 분량이 많지 않았음에도 설경구 배우의 부인으로 꽤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 영화에서 ‘영옥’ 혹은 ‘정순’은 어떤 인물이며 염혜란과는 어떤 이미지를 공유하는지.

"염혜란 배우에게 아직 얘기해 준 적이 없지만 혜란 배우는 제주의 여성들을 닮았다. 아마도 이런 이미지가 있어 <폭싹 속았수다>에도 캐스팅된 것이 아닌가 싶은데 그녀에게는 제주 여성들이 가진 남다른 강인함과 생명력이 보인다. 이번 영화의 캐스팅에 있어 두 번도 망설이지 않고 그녀를 떠올린 이유다. 촬영을 시작할 시기는 이미 <폭싹 속았수다>의 촬영을 마친 이후라 제주도 사투리도 완벽하게 갖추고 있더라."

▶ 영화에서 염혜란 배우 캐릭터가 계속 선글라스를 쓰고 등장하지 않나. 그런 설정이 임권택 감독의 <짝코>를 떠올리게 한다. <짝코>에서 송기열 캐릭터가 권력에 눈이 먼 설정을 선글라스로 은유했다면 이 영화에서 정순의 선글라스는 반대의 맥락에서 무언가를 애써 보지 않으려고 쓰는 듯한 설정으로 보인다.

"맞다. 여기서 정순의 선글라스는 중의적인 의미를 갖는다. 첫 번째는 그녀가 학살의 현장을 목격했을 때 비추던 햇빛 트라우마에 대한 표상이고, 두 번째는 존재하는 진실을 부정해서 (혹은 부정해서 볼 수 밖에 없는) 본다는 의미이다. <내 이름은>은 그녀가 진실을 직시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 제주에서의 촬영은 날씨가 좋아도, 나빠도 힘들다고 들었다. 특히 이 영화에서는 제주의 특정한 지형이 등장해야 하는 장면들이 많지 않나. 예를 들어 보리밭이나 산 언덕처럼 상징적인 장소들도 있고 말이다. 촬영 과정은 어땠는지.

"매우 힘들었다 (웃음). 제주 출신의 피디가 있어서 로케이션은 어렵지 않게 찾았지만 제주의 날씨가 워낙 예측 불가해서 원하는 장면을 담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보리밭 씬 같은 경우 강풍이 불어야 하는데 그날 유난히 바람이 없었다. 제주는 바람 아닌가 (웃음). 바람의 섬에서 바람이 안 부는 날도 있더라. 학살 시퀀스에서도 햇빛이 쏟아져 내리길 바랐다. 비극의 참상이 일어나는 그때, 자연만큼은 아름답게, 그래서 그 역설을 대비하고 싶었다. 다만 제주의 날씨가 허락하지 않더라. 결국 현재의 버전은 내가 원하는 만큼 빛이 쏟아지는 장면은 아니다."

▶ <한란>을 포함해서 제주 4·3 사건을 다룬 최근 영화들이 대부분 4월 3일 가까이에 개봉을 시도했지만 여러가지 여건으로 쉽지 않았다. <내 이름은>은 제주 4·3 사건을 다룬 영화중 실제로 4월 3일에 개봉하게 되는 첫 영화가 아닐까 싶다. 이 영화가 제주의 유족들에게, 그리고 이 영화로 제주 4·3 사건을 처음 접하게 되는 관객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기를 바라는가.

"앞서 언급했듯 이번 영화가 상업 영화로서는 처음으로 제주 4·3 사건을 다루는 영화이고, 난 이 작품을 통해 비극의 역사가 더 알려지기 바란다. 이 영화는 말하자면 제주 4·3 사건을 그리는 영화라기보다는 이 사건을 찾아가는 영화다. 이 영화가 많은 이들에게 변화의 서막이 되길 바란다."

▶ 감독님은 언제까지 이렇게 힘든 영화만 하실텐가.

"힘든 것, 쉬운 것을 구분한 적은 없다 (웃음). 다만 그때 그때 이끌리는 이야기를 하는 편인데 늘 그렇더라. 이번에 준비하는 작품은 김구의 죽음에 대한 것이다. 김구라는 인물은 널리 알려진 인물이지만 사실상 한국영화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한 적이 많지 않더라. 조선 영화까지 포함해서 불과 한 4편 정도의 영화가 만들어 진 것 같다. 이번 작품에서는 김구라는 인물 그리고 그의 죽음까지의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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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영 감독 역시 언급하듯, 베를린에서의 <내 이름은> 상영은 분명 다른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홀로코스트와 전쟁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나라 그리고 피해자와 가해자가 지금껏 공존하는 나라가 아닌가. 아마도 영화 속 제주와 독일은 많은 점에서 비슷한 점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 그러므로 베를린의 관객들은 더 많은 생각과 공감을 했을 것이다. 이 영화가 한국의 관객들 그리고 지금도 비슷한 참상을 겪고 있는 나라들의 관객들에게 까지 작은 빛과 희망을 가져다 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베를린=김효정 영화평론가?아르떼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