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핵 억지 구조가 '미국 의존형'에서 '유럽 기술 자립형'으로 이동하려는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카롤 나브로츠키 폴란드 대통령이 러시아의 군사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자국도 핵무기를 보유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다. 러시아의 군사적 위협이 고조되고, 미국 핵우산의 신뢰도가 약해지면서 유럽의 자체 핵무장론이 정치적 선언을 넘어 기술 검토 단계에 돌입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18일 독일 DPA통신에 따르면 나브로츠키 대통령은 폴란드 폴사트뉴스에 "국제 규정을 충분히 존중하면서 폴란드가 핵 역량을 갖추는 길이 우리가 가야할 길"이라고 밝혔다. 그는 폴란드가 무력 충돌의 현장과 국경을 직접 맞대고 있는 만큼 핵무기 프로그램을 통해 국가안보를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만 핵무기 프로그램이 언제 시작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동유럽 국가인 폴란드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동맹국 벨라루스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나브로츠키 대통령은 폴란드가 핵무기 프로그램을 추구한다면 러시아가 어떻게 나올지 우려되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러시아는 어떤 일에도 공격적으로 반응할 것"이라고 말했다. 폴란드가 자체 핵무기를 보유해야 한다는 그의 구상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핵공유 체제 아래 자국 영토에 미국 핵무기를 배치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힌 안제이 두다 전 대통령보다 한 발 더 나아간 것이다. 도널드 투스크 폴란드 총리도 지난해 의회 연설에서 "핵무기를 확보해야 한다"며 "재래식 무기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했다.
유럽 각국에선 자체 핵무장론이 분출하고 있다.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는 지난달 29일 의회 연설에서 "유럽 동맹국과 공동 핵우산 개발 논의를 진행 중"이라고 했다. 최근 자체 핵 방어 체계 개발을 활발히 논의하고 있는 독일이 핵 개발 참여 가능성을 공식 언급한 것이다. 2차 세계대전 패전국인 독일은 1990년 통일 당시의 '4+2 협정'(미·소련·영·프 및 동·서독)과 1969년 서명한 핵확산금지조약에 따라 자체 핵무기 개발이 금지돼 있다. 전문가들은 독일이 마음만 먹으면 즉각 핵무장이 가능한 기술력을 보유한 것으로 보고 있다.
울프 크리스테르손 스웨덴 총리도 지난달 27일 현지 언론에 "영국·프랑스와 핵 전력 협의를 논의하고 있다"며 "위험한 국가들이 핵무기를 보유하는 한, 건전한 민주주의 국가들도 핵무기를 보유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스웨덴 매체인 '다겐스 니헤테르'는 사설에서 "미국 말고 다른 핵 억지력 옵션을 진지하게 논의해야 한다"고 했다.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고(高)관세 부과와 그린란드 병합 시도에 홍역을 치른 유럽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서방 자유 진영을 지탱해온 미국과의 대서양 동맹 붕괴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미국의 핵우산이 더는 유럽을 보호해주지 않을 것이라는 위기감이 커지면서 기존 핵보유국인 영국·프랑스에 더해 2차 대전 패전국인 독일, 전통적 중립국이었던 스웨덴까지 핵 개발 논의에 팔을 걷어붙인 모양새다.
유럽 핵우산은 핵보유국인 프랑스(핵탄두 290기 보유)와 영국(220기)을 축으로 논의될 전망이다. 양국은 지난해 핵공유를 골자로 한 '노스우드 선언'을 채택하고 군 수뇌부와 고위급 외교관으로 구성된 핵 조율 그룹을 설치했다. 프랑스는 사상 처음으로 공중 전략핵 시뮬레이션 '포커' 훈련에 영국을 초청했다.
방산테크 업계 관계자는 "유럽에서 나오는 핵무장 논의는 정치적 선언이 아니라 핵무기 설계, 연료주기, 운반체, 지휘통제(C3I)까지 이어지는 기술 체인을 실제로 어떻게 통합하느냐의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며 "유럽에는 이미 원심분리기 기술, 핵폭발 시뮬레이션에 쓰이는 슈퍼컴퓨팅, 재돌입체·고체연료 로켓·스텔스 항공기 같은 핵탄두 운반 플랫폼, 위성·지상 레이더를 묶는 실시간 전장 네트워크 등의 기술을 모두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
강경주 기자 qurasoh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