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능이 되려다 무능해졌다"…미국의 진보는 왜 실패했나

입력 2026-02-18 14:20
수정 2026-02-18 14:21
정치는 넘쳐나는데 삶은 왜 늘 부족한가. 아파트 값은 치솟고, 전기요금과 교통·의료 같은 공공서비스는 갈수록 부담이 커진다. 청년은 집을 구하기 어렵고, 기업은 규제에 막혀 투자와 혁신을 미룬다. 정치권은 언제나 ‘분배’와 ‘공정’을 외치지만 정작 시민의 삶을 실질적으로 바꾸는 공급의 문제는 좀처럼 해결되지 않는다. 정치권엔 분열과 증오만 가득하다. 민주주의의 본산이라 불리는 미국조차 ‘상대 정당이 집권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공포 섞인 혐오가 정치를 지배하고 있다.



이 혼돈의 한복판에서 미국 정치를 가장 날카롭게 분석해온 언론인 에즈라 클라인과 데릭 톰슨이 공동 집필한 책 <어번던스>가 국내에 출간됐다.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른 이 책은 빌 게이츠와 버락 오바마가 동시에 추천하며 미국 정치권에서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미국 민주당 지도부가 돌려 읽은 필독서로도 알려졌다. 하지만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은 미국만의 것이 아니다. 왜 우리는 더 많이 만들고 더 빨리 실행할 수 있는데도 그러지 못하는가. 왜 민주주의는 갈수록 더 많은 약속을 내놓으면서도 시민의 삶을 개선하는 능력은 약해지는가.

저자들은 오늘날 민주주의의 위기를 ‘결핍의 정치’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며 분열을 심화시키는 정치적 양극화가 확산되는 동안 정작 시민이 필요로 하는 주거·에너지·교통·과학기술 같은 기반은 충분히 공급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정치가 무엇을 나눌지를 두고 끝없이 싸우는 사이, 무엇을 만들고 구축할지는 뒷전으로 밀려났다는 진단이다.

책은 미국 리버럴(진보) 진영의 심장부인 샌프란시스코와 뉴욕의 사례를 든다. 이들은 주거를 인권이라 외치지만, 정작 내 집 앞의 신규 주택 건설은 복잡한 규제와 민원을 앞세워 가로막는다. 기후 위기를 걱정하면서도 탄소 배출이 없는 원자력 발전소 폐쇄를 주장하고, 태양광 단지 건설에는 환경 훼손을 이유로 반대한다.

저자들은 이를 ‘만능이 되려다 무능해진 리버럴리즘’이라 비판한다. 하나의 공공 프로젝트에 환경, 인권, 고용, 복지 등 너무 많은 사회적 가치를 집어넣으려다 보니, 정작 프로젝트 자체는 예산을 초과하고 공기가 지연되며 결국 좌초된다는 지적이다. 1970년대에 설계된 낡은 규제들이 2020년대의 혁신을 가로막는 블랙홀이 된 셈이다. 오늘의 결핍은 우연한 실패가 아니라 과거의 선택이 낳은 결과다.

이 책이 미국 사회에 파장을 일으킨 이유는 저자들의 성향 때문이다. 대표적인 진보 논객인 에즈라 클라인은 2024년 미국 대선 결과를 목도하며 리버럴 진영의 통치 실패를 가감 없이 고백한다. 그는 보수주의자들이 정부의 역할을 축소하려 싸우는 동안, 진보주의자들은 정부를 복잡한 절차의 덫에 빠뜨려 무력하게 만들었다고 분석한다.

"우리는 왜 더 이상 위대한 것을 건설하지 못하는가?" 저자들은 이 질문에 ‘풍요의 정치’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여기서 풍요는 단순한 물질적 부를 의미하지 않는다.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만드는 데 필요한 것들이 충분히 공급되는 상태를 뜻한다. 저렴한 주택이 충분히 지어지고, 청정에너지가 저렴하게 생산되며, 혁신적인 치료제가 규제의 벽을 넘어 환자에게 도달할 때 비로소 민주주의의 효능감이 살아난다는 논리다. 책은 2차 세계대전 당시의 페니실린 개발이나 코로나19 당시의 백신 개발(워프 스피드 작전)을 예로 들며, 정부가 ‘장애물을 탐지하고 제거하는 탐정’ 역할을 수행할 때 어떤 기적이 일어나는지 보여준다.

이를 위해서는 정치의 질문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고 저자들은 강조한다. 무엇을 나눌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만들 것인가, 어떻게 더 많이 건설하고 발명하고 실행할 것인가를 중심에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제도의 재설계도 제시한다. 복잡하게 얽힌 규제를 정비하고, 공공 프로젝트의 목표를 명확히 하며, 과학기술과 인프라 구축을 가로막는 장벽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만능 기관이 아니라, 장애물을 탐지하고 제거하는 ‘문제 해결사’가 돼야 한다. 기업과 시장의 혁신을 촉진하고, 공공 부문이 필요한 영역에서는 과감하게 투자하고 실행하는 능력을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상대를 악마화하는 ‘결핍의 정치’에 매몰될 것인가, 아니면 시민의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하는 ‘공급과 풍요의 정치’로 나아갈 것인가. 오늘의 민주주의를 다시 묻게 한다.

설지연 기자 sj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