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직 전환을 하지 말자는 게 아닙니다. 최소한 공정하고 합리적인 절차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한전KPS 정규직 노조가 소속된 한국노총 산하 전국전력산업노동조합연맹(전력연맹) 간부들은 설 연휴 직전인 지난 12일 서울 중구 모처에서 한국경제신문을 만나 “7000여명의 기존 직원들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이 크다”며 “정부가 말하는 '공정함'이 무엇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정부 주도로 한전KPS가 발전설비 정비 하도급업체 근로자 약 600명을 직접 고용(직고용)하기로 한 가운데 형평성·공정성 논란이 커지고 있다. 정부는 지난 10일 발전설비 정비 분야 협력업체 노동자를 직접 고용하는 내용의 노정 합의서를 공개했다. 하청의 정규 전환 논의는 지난해 6월 태안화력발전소에서 한전KPS 하청 노동자 고 김충현 씨가 설비 작업 중 숨진 사고 이후 급물살을 탔다. 정부는 민주노총과는 ‘발전산업 고용·안전 협의체’를, 한국노총과는 ‘발전산업 정의로운 전환 협의체’를 각각 구성해 운영해 왔다.
그런데 정부는 최근 민주노총 중심의 고용·안전 협의체와의 합의에 따라 한전KPS 하청 노동자 직접고용 방침을 발표했다. 한국노총이 배제된 협상 구조와 발표 과정에 대해 전력연맹은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600명 대졸 공채로…"7000명 기존 직원과 청년들 역차별" 반발특히 정규직 전환자들의 처우 기준이 갈등의 핵심이다. 한전KPS는 이전 문재인 정부(2018년~2020년) 때도 정부 정책에 따라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한 바 있다. 당시엔 하청 직원들을 5·6급 별정직으로 채용했지만, 이번에는 대졸 공채(4급)로 전환도 거론되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내부 반발이 확산하고 있다는 게 전력연맹의 설명이다. 이는 하청·계약직 직원이었다가 경력직 시험을 통과해 정규직으로 입사한 직원들과도 역차별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전 정규직 전환자들은 경력을 절반(최대 7년)만 인정받았지만 이번 직고용 대상자들은 경력을 전부 정규직 호봉으로 인정 받을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고용·안전협의체' 합의문에 '한전KPS 협력업체 근무기간은 경력으로 인정한다'는 문구가 담기면서다.
이에 대해 남태섭 전력연맹 수석부위원장은 “공기업 입사를 위해 수년간 시험을 준비한 직원들 입장에선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이라며 "경력직 시험을 통과해 정규직으로 입사한 직원들도 반발이 엄청나다"고 했다. 남 부위원장은 "7000여 한전KPS 직원 뿐 아니라 공공기관 취업을 준비하는 수십만명의 청년들에 대한 명백한 역차별”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부가 공개한 합의서에서 동일노동·동일임금에 따른 '임금 개선'을 약속한 것도 논란이 되고 있다. 이에 대해 박근태 전력연맹 조직본부장은 “정규직은 발전소 핵심 설비를 담당하는 기술직이고 협력업체 업무는 외곽설비 중심 기능직에 가깝다”며 동일노동으로 보기 어려운 점이 있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정부 관계자는 "구체적인 경력 합산 기간이나 전환 이후 직급은 추후 구성될 노사전 협의체에서 정하게 된다"며 구체적으로 정해진 것이 없다고 설명했다. 전력연맹 관계자는 "노사전 협의체에서 정할 내용을 고용안전 협의체에서 정해 발표한 것은 부적절하다"고 주장했다.
○정규직 된 전 협력업체 직원 "동일노동·동일임금 주장 어불성설"노사전 협의체 구성도 공정하지 못하다는 게 전력연맹 측의 주장이다. 합의문에 따르면 노사전협의체는 한전KPS 측(노·사 포함 4인), 한전KPS 하청노동자 측 4인, 전문가 위원 6인과 위원장 1인으로 구성한다고 돼 있다. 정규직 노조를 개별 당사자가 아니라 '사측'과 하나로 묶어 버렸다.
이는 문재인 정부 당시인 2017년 만든 '공공부문 비정규직 전환 가이드라인'과도 어긋난다는게 전력 연맹 측의 설명이다. 해당 가이드에서는 비정규직 처우 개선과 관련해 사측과 비정규직노동자, 정규직노동자, 전문가가 함께 논의를 진행하도록 돼 있고, 실제로 정규직 노동자들은 비정규직, 사측과 별도의 주체이자 같은 숫자로 참여 인원을 구성해 참여했다. 전력연맹 측은 “이번 노사전 협의체 구조 자체가 기울어진 운동장”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한전KPS 노조는 19일 서울 여의도 한국노총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의 정규직 전환 정책을 비판했다. 김종일 한전KPS노조위원장은 “공정과 상식이 파괴된 역차별적인 합의"라며 "이에 따라 현장 직원들의 분노와 취준생들의 허탈감과 좌절감이 극에 달했다”라고 강조했다. 협력업체에 8년 넘게 근무하다가 공개채용을 통해 한전 KPS에 입사한 김성일 조장(서인천사업처)도 “협력업체 직원들과 한전KPS 직원들의 역무 자체가 구분돼 있고 하는 일 역시 다르다”며 “자격증 등 전문성을 갖추고 서류심사, 인·적성·신체검사, 면접, 신원조회 등 철 저한 단계별 채용 절차를 통과한 기존 직원들과 동일선상에서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한국발전산업노동조합은 이날 성명을 내고 "고용·안전 협의체 합의안에 담긴 ‘한전KPS의 하도급 노동자 직접고용’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라 당연한 결론"이라며 "정규직화를 잘못된 일이라고 비판하는 전력연맹은 스스로를 귀족노조라는 굴레 속에 가두고 국민으로부터 고립을 자초한다"고 지적했다.
한 인사노무 전문가는 "공공기관 정규직 전환 정책이 또다시 추진되는 가운데, 고용 안정과 공정 채용 사이에서 충돌이 재발하는 모양새"라며 "제2의 인천국제공항공사 노노갈등으로 번지지 않으려면, 정규직 전환의 직무 분석 기준과 처우 산정 과정, 이해관계자 참여 구조를 투명하게 공개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곽용희 기자 ky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