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오전 8시 문 닫힌 서울 중구 신세계백화점 앞에는 이른 아침부터 20여명이 줄을 서 있었다. 오전 10시 30분 백화점이 문을 열면 명품 매장에 가장 먼저 들어가 마음에 드는 상품을 사려는 이른바 ‘오픈런’ 현장이다. 주요 브랜드들이 인상을 앞둔 만큼 미리 제품을 구매하려는 고객들인가 싶었지만 가까이 다가가 말을 걸어보니 10명 중 8명은 중국인 고객이다. 이 백화점 한 명품매장 직원은 “꾸준히 중국인 고객이 많긴 했지만 연휴에 가까워지면 고객 비중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늘었다”고 전했다.
인근 롯데백화점 한 화장품 매장에도 직원이 4명이나 되지만 모두 고객을 응대하느라 쉴 틈이 없다. 가까이 다가가니 귀에 들리는 말은 명품 매장과 마찬가지로 한국어가 아닌 중국어. 이 매장 직원은 "최근 들어 외국인, 특히 중국인 고객이 확 늘었다"며 "한번에 몇 백만원어치 사가는 고객들이 종종 있는데, 조금 전 한 고객도 가족들 선물을 산다며 한번에 400만원어치 넘게 사가지고 갔다"고 말했다.
中관광객 전년대비 52% 증가 예상백화점·면세점 등 유통업계는 연휴 기간 한국의 설과 중국의 춘절을 동시에 맞아 분주한 모습이다. 춘절은 우리나라 설날에 해당하는 중국의 가장 큰 명절이다. 올해는 춘절 연휴는 15일부터 23일까지 총 9일로 역대 가장 길다.
16일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에 따르면 이번 춘절 기간 방한 중국인은 19만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춘절 연휴 혼잡을 피하고 여행 경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 연휴 2주 전부터 한국을 미리 찾았던 관광객 수를 더하면 최대 25만명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춘절 연휴 기간에 방한하는 중국인 숫자로는 역대 최대 규모로, 작년 춘제 연휴 기간과 비교하면 52% 늘어난 수치다.
특히 이번 춘절 연휴에는 씀씀이가 큰 부유층 중국인들이 ‘큰손’으로 급부상했다. 지난해 11월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의 '대만 유사시 군사 개입 가능성' 발언 이후 중·일 갈등이 이어지면서 일본 대신 한국을 찾는 중국인이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이미 중국 관광객들의 씀씀이는 매출 성장률 부문에서 다른 외국인들을 압도하고 있다. 2024년 기준으로 중국인 관광객 1인당 평균 지출액은 1622달러(약 238만원)로 전체 외국인 평균(1372달러)을 웃돈다. 춘절 기간 중국인 관광객들의 지출할 돈만 3억3000만달러(약 4765억원)를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아예 방문 목적이 관광보다 쇼핑인 중국인 관광객들도 늘고 있다. 신세계백화점의 작년 외국인 매출은 전년 대비 90% 급증해 6000억원을 넘어서며 최대치를 기록했다. 지난달에도 외국인 매출이 900억원을 돌파하며 월별 기준 사상 최대 매출을 냈다. 주요 백화점 점포의 외국인 매출 비중은 작년 기준 롯데본점 25%, 더현대서울 20%에 달한다.
한 패션 명품 매장 직원은 “매 분기마다 한국을 방문해 신상품 의류를 구입하는 중국인 고객들이 부지기수"라며 ”일각에선 보따리상이 아니냐고 하는 시각도 있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고 전했다. 수년 째 이 매장을 자주 찾는 한 중국인 남성 고객은 한번에 사가는 의류 구입액만 2000만~3000만원이 넘는데, 매장에서 택을 바로 떼서 착용해 갈 정도로 실소비자라는 게 매장 측의 설명이다.
중화권 고객이 즐겨 찾는 카지노·숙박 시설도 춘절 특수를 누리고 있다. 1600실 규모의 제주 그랜드하얏트는 춘절 기간에 하루 최대 1590실이 예약돼 사실상 만실이다. 지난해 춘절 기간에는 하루 최대 1000실 안팎이었다. 인천 파라다이스시티도 같은 기간 평균 객실 예약률은 95%로 전일 만실에 가까운 객실 예약률을 기록하고 있다. 파라다이스 워커힐점은 아예 리뉴얼을 통해 VIP 영업 공간을 확대한 상태다.
'춘절 특수' 노리는 유통가유통업계는 중국인 관광객 유치에 팔을 걷어붙였다. 백화점 업계는 쇼핑 환급 혜택을 확대하며 큰 손 관광객 공략에 속도를 내고 있다. 업계는 통상 구매금액의 5~7% 수준이던 쇼핑 환급률을 춘절 기간에 8~12%까지 끌어올렸다. 신세계백화점은 일정 금액 이상 구매한 고객에게 신세계상품권 환급 혜택을 제공한다. 이 백화점은 외국인 VIP 고객을 위한 별도의 전용 라운지를 올해 안에 오픈하고, 외국인 VIP 서비스 역시 고도화할 예정이다. 롯데백화점 본점은 중국 전통인 ‘홍바오’(붉은 봉투)에 상품권을 담아 증정하기로 했고, 현대백화점은 더현대 서울점에서 한복 입어보기 등 체험 콘텐츠를 내세웠다.
면세점도 춘절 특수를 겨냥해 할인 쿠폰과 결제 포인트, 제휴 이벤트 등 중국인 관광객 맞춤형 서비스를 일제히 강화했다. 신세계면세점은 알리페이플러스와 손잡고 중국인 전용 할인 쿠폰 이벤트를 통해 현장 구매를 유도하며, 롯데면세점은 간편결제 포인트 지급 프로모션을 진행 중이다. 신라면세점도 구매 금액에 따라 최대 123만원 상당의 선불카드를 증정하고 있고, 오프라인 매장에서 위챗 결제 1200위안 이상 시 40위안 즉시 할인 쿠폰을 제공한다.
유통업계 관계자도 “쇼핑 한번에 수백만원에서 수천만원 씩 쓰는 큰손 고객들이 엔저 흐름을 타고 일본으로 몰려가 현지 백화점이나 쇼핑센터 매출을 큰 폭으로 올려놨는데, 최근 중국 정부의 '한일령(限日令)'으로 일본에 들어가기 어렵게 되자 한국 유통시장으로 다시 몰리고 있다”며 “춘절 연휴를 기점으로 방한 중국인 증가세가 더욱 가팔라질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안혜원 기자 anh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