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공휴일엔 온 가족이 모여 텔레비전(TV) 특선 영화를 보던 시절도 이제는 조금 철 지난 얘기다. 떠들썩한 명절의 소란이 지나가는 사이, 마음의 허기를 채우는 건 직접 경험하는 예술이다. 이 중에서도 개인의 취향을 채우는 문화생활이 있다면 미술 전시 나들이를 꼽을 수 있다. 차례상을 차리는 정성만큼이나 풍성한 ‘미술의 성찬’이 도심 곳곳에 차려졌기 때문이다. 소진된 활력을 되찾고, 쳇바퀴 같은 일상에 신선한 영감을 불어넣고 싶다면 긴 연휴 동안 미술관에 가보는 것은 어떨까. 연휴에 즐길 수준 높은 전시를 소개한다.◇초사람부터 모네 ‘수련’까지 한눈에국립현대미술관은 가족 나들이로 고르기 좋은 첫 번째 선택지다. 동시대 미술의 흐름을 느끼고 싶다면 서울 소격동에 있는 서울관으로, 고전 예술의 멋을 되새기고 싶다면 과천에 자리 잡은 과천관을 찾으면 좋다. 서울관에선 지난달 개막한 ‘소멸의 시학: 삭는 미술에 대하여’가 한창 진행 중이다. 불후(不朽·썩지 아니함)의 명작을 보관하는 장소인 미술관의 역할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전시다. 잡초를 눈사람 모양으로 뭉친 고사리 작가의 ‘초사람’ 등 차차 분해되고 소멸하는 작품 50여 점을 선보인다.
과천관에선 국립현대미술관이 그간 수집한 국제미술 소장품 중 엄선한 40여 점을 소개하는 ‘MMCA 해외 명작: 수련과 샹들리에’가 열리고 있다. 빛의 화가 클로드 모네의 역작으로 ‘이건희 컬렉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수련이 있는 연못’과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노란 모자에 빨간 치마를 입은 앙드레(독서)’ 등이 걸렸다. 현재 세계 미술계가 주목하는 작가 아이 웨이웨이의 ‘검은 샹들리에’도 볼 수 있다.
서울시립미술관 본관과 분관들도 연휴 기간 변함없이 관객을 맞는다. 서소문동 본관에선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인 최재은의 대규모 개인전 ‘최재은: 약속(Where Beings Be)’이 열리고 있다. 조각부터 영상, 설치, 건축까지 매체를 가리지 않고 생명과 자연의 관계를 이야기해 온 작가의 목소리를 들어 볼 수 있다. 서울 중계동 북서울미술관에선 기술과 환경의 첨예한 관계를 전기라는 하나의 회로로 드러내는 단체전 ‘일렉트릭 쇼크’가, 사당동 남서울미술관에선 한국 추상 조각가 전국광 개인전 ‘전국광: 쌓는 친구, 허무는 친구’가 진행 중이다.◇‘까치 호랑이’ 민화의 해학
민속놀이를 즐겼던 명절의 분위기를 느끼고 싶다면 서울 한남동 리움미술관을 추천한다. 옛 조상들이 즐겨 그렸던 민화인 호작도를 소개하는 상설기획전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1592년 제작되어 현재까지 전하는 국내 최고(最古) 까치 호랑이 그림이 이번에 최초로 공개되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마스코트였던 호돌이부터 지난해 세계적인 K-컬처 신드롬을 낳은 넷플릭스 영화 ‘케이팝데몬헌터스’의 인기 캐릭터 더피까지, 시대를 거쳐 재창작된 까치 호랑이 그림의 원류를 짚어볼 수 있다.
전통 민화는 서울 삼청동 갤러리현대에서도 볼 수 있다. 구관에서 조선 말 궁중회화와 민화 27점을 추린 전시 ‘장엄과 창의: 한국 민화의 변주’로 새해 첫 전시를 열었기 때문이다. 민중의 소망이 여과 없이 담겨 있는 수준 높은 민화들이 걸렸다. 옆 공간인 신관과 두가헌 갤러리에선 이런 전통회화를 계승하는 한국 작가 6명의 작품 75점을 소개하는 전시 ‘화이도(?以道)’가 열리고 있어 전통과 현대를 넘나드는 관람이 가능하다.◇지역에서도 다채로운 전시 한가득수준급 미술 작품이 서울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지역에서도 다채로운 전시가 열리고 있다. 전남도립미술관에선 김선두 작가의 ‘색의 결, 획의 숨’이 열리고 있다. 전남 장흥 출신으로 고향의 기억을 담아낸 ‘남도 시리즈’ 등 40여 년간 폭넓은 조형 세계를 구축한 김선두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지난해 추상회화의 선구자로 불리는 스웨덴 여성 작가 힐마 아프 클린트의 전시를 열어 주목받은 부산현대미술관은 ‘2025 부산현대미술관 플랫폼_나의 집이 나’라는 독특한 전시를 열고 있다. 인구 감소, 지역 소멸, 1인 가구, 고령화, 돌봄 등 ‘축소’의 언어로 읽어내야 하는 오늘날 도시의 모습을 탐색하는 전시다. 청주 문화제조창에 자리 잡은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의 ‘조우(遭遇), 모던아트협회 1957- 1960’은 한국 화단의 부흥을 이끈 1세대 모더니스트의 정체성을 담아낸 전시로 호평받고 있다. 한묵, 유영국, 황염수 등이 서구 모더니즘을 한국적으로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벌인 치열한 논의의 산물인 156점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유승목 기자 mo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