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없는 예술, 경계없는 관객을 표방하며 개관한 GS아트센터가 올해 프로그램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예술가들의 작품 세계를 깊이 조명하는 프로그램 '예술가들' 시리즈의 첫 주인공은 동시대 무용계에서 가장 급진적인 실험가로 꼽히는 영국의 안무가 웨인 맥그리거. 공연과 전시, 포럼을 아우르는 입체적인 구성으로 그의 작품 세계를 다뤄본다.
이번 시즌은 '예술X기술X인간'이라는 키워드를 전면에 내건다. 인공지능과 알고리즘, 데이터와 신체 감각이 충돌하고 교차하는 지점에서 예술은 어떤 미래를 상상할 수 있을까. 맥그리거는 그 질문을 가장 집요하게 파고 들었다. 그는 영국 로열발레단 최초의 현대무용가 출신 상임 안무가이자 파리오페라발레단·아메리칸발레시어터·마린스키발레단 등 세계 정상급 발레단의 러브콜을 받아온 인물이다. 2024년 영국 국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으며 예술적 공로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오는 3월 27~28일 GS아트센터에서 한국 초연을 갖는 맥그리거의 '딥스타리아'(Deepstaria)는 2024년 몽펠리에 댄스 페스티벌에서 공개된 최신작이다. 심해에서 끊임없이 형태를 바꾸는 해파리 종(種)에서 작품의 이름을 빌렸다. 심연과 우주, 생성과 소멸을 오가는 이미지 속에서 인간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작품이다.
지금이야 AI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됐지만 맥그리거는 오래전부터 AI를 창작 파트너로 여겨왔다. 맥그리거는 AI를 '11번째 무용수'로 여겼다. 그의 작품은 통상 10명의 무용수가 무대에 오르는 구성을 취하는데 여기에 알고리즘과 인공지능 시스템이 실시간으로 움직임과 사운드, 구조에 개입한다. 인간 무용수 10명에 더해 보이지 않는 존재 하나가 창작에 참여하는 셈.
딥스타리아에서도 인공지능 오디오 엔진이 실시간으로 재구성하는 사운드 스케이프가 무대를 감싸게 된다. 빛을 99.965% 흡수하는 밴타블랙 기술이 구현한 암흑의 공간 속에서, 무용수들은 해파리처럼 유영하며 유기적이고도 비인간적인 움직임을 보여줄 예정이다. 기술은 전면에 드러나지만 중심에는 언제나 신체가 있다. 맥그리거가 제시하는 미래 예술은 기술의 과시라기 보다는 인간 감각의 확장을 추구한다.
공연에 앞서 3월 24부터 4월 5일까지는 체험형 전시 '기계와 몸: 무한의 변주'가 열린다. 맥그리거의 예술 여정을 관객이 미리 경험해 볼 수 있도록 꾸몄다. '퓨처 셀프(Future Self)'는 미디어 아트 그룹 랜덤 인터내셔널, 작곡가 막스 리히터와의 협업작이다. 1만 개의 LED 조명이 관람객의 신체 이미지를 인식해 3차원의 빛 패턴으로 변환한다. 몸은 데이터가 되고, 데이터는 다시 감각적 풍경으로 환원된다.
또 다른 축은 AI 안무 툴 AISOMA다. 구글과 공동 개발한 이 플랫폼은 30년에 걸친 맥그리거의 안무 아카이브를 머신러닝으로 학습해 사용자의 움직임을 분석하고 새로운 동작을 제안한다. 인간의 몸이 남긴 기억이 알고리즘을 통해 다시 인간에게 되돌아오는 구조를 보여준다. 이와 함께 '예술과 기술, 그리고 인간이 함께 만드는 미래 공동체'를 주제로 한 포럼, 무용수 대상 워크숍, 어린이 예술X기술 프로그램 '아트 플래닛'(4월 3~5일)도 연계된다.
5월에는 국립발레단과 함께 맥그리거의 컨템퍼러리 작품인 '인프라'를 한국에서 처음 올린다. 시각예술가 줄리언 오피, 음악가 막스 리히터와 협업으로 탄생한 작품. 도시의 군중과 개인의 고독을 병치해 맥그리거 특유의 날카롭고 섬세한 신체 언어를 발레의 문법 안으로 끌어들인 수작이다. 맥그리거는 외신과 인터뷰하며 "기술은 인간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무엇인지 더 깊이 묻게 한다"고 말한 바 있다. 딥스타리아를 비롯해 이번 GS아트센터 프로그램은 그가 오랫동안 탐구해온 질문?기술과 공존하는 시대, 인간의 몸은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가?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결국 이번 무대는 AI의 시대에 다시 인간을 사유하게 만드는 웨인 맥그리거라는 예술가의 현재를 확인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이해원 기자 um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