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민·박강현 그리고 박찬양…박수 쏟아진 '새 얼굴'의 파이 [김수영의 스테이지&]

입력 2026-02-17 07:30
수정 2026-02-17 15:32


지난 2월 7일 오후 서울 강남구 역삼동 GS아트센터에서 진행된 '라이프 오브 파이' 낮 공연. 이날 커튼콜에서는 객석을 향해 연신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파이 역 배우를 향해 관객들의 힘찬 박수가 끊이지 않았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이는 여성 뮤지컬 배우인 박찬양이었다. 파이의 누나인 라니 얼터네이트이자 파이와 쿠마르 커버 역으로 '라이프 오브 파이'의 여정을 함께하고 있는 그에게 주어진 특별한 기회였다.

커버는 주연 배우가 불가피하게 무대에 오르지 못할 상황이 됐을 때 대신 무대에 서는 역할이다. 더블 캐스팅, 트리플 캐스팅, 심지어 쿼드 캐스팅까지 두는 한국은 특수한 일이 아니고서는 공연 기간 내내 커버 배우가 주연을 대체하는 일이 흔치 않다.

그러나 제작사 에스앤코는 박찬양 회차를 별도로 마련, 신진 배우의 도약을 위한 발돋움판을 자처했다. 2015년 데뷔해 '빨래' 제일서점 직원 역, '루쓰' 브닌나 역, '디어 에반 핸슨' 스윙 등으로 참여해 온 박찬양은 덕분에 대극장 무대 위에서 주연으로서 관객의 박수를 온몸으로 느껴볼 수 있었다.

티켓 예매의 기준으로 인지도 있는 배우를 우선시하는 시장 특성상 이러한 선택은 '도전'에 가깝다. 하지만 새로운 얼굴의 배우를 소개하고, 업계의 건강한 변화와 성장을 도모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단순한 도전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에스앤코는 박찬양 회차에 30% 할인을 적용해 신진 배우의 작품을 선택하는 데 따르는 진입 장벽을 낮췄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태평양 한 가운데 구명보트에 남겨진 소년 파이와 벵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의 227일간의 표류기를 다룬다. 원작 소설인 '파이 이야기'는 발간 1년 만에 맨부커상을 수상했고, 영화는 환상적인 영상미로 많은 이들의 '인생작'이 될 정도로 뛰어난 작품성을 자랑했다.

공연은 2021년과 2023년 각각 웨스트 엔드와 브로드웨이에서 초연해 올리비에상 9개 부문 후보·5개 부문 최다 수상, 토니상 5개 부문 후보·3개 부문 수상 기록을 썼다. 지난해 말 개막한 한국 초연은 박정민·박강현을 필두로 순항 중이다. 공연은 책에 묘사된 장면과 표현 등을 효과적으로 살려내 원작을 아는 이들의 감정을 섬세하게 건드리고, 영화의 강점으로 꼽혔던 비주얼적 요소까지 무대에서 몽환적으로 그려냈다.

박찬양은 '라이프 오브 파이'의 작품성을 극대화하는 호연을 펼쳤다. 공연은 사건 발생 시점에서 시간이 많이 흘러 가정을 꾸리는 등 새로운 삶을 사는 파이가 지난 이야기를 들려주는 소설·영화와는 달리 시점을 대폭 앞으로 끌어왔다. 파이가 사건 직후 병원에서 자신이 겪은 일을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시점 변화를 줘 배우의 감정 연기가 절정에 달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박찬양은 에너지 넘치고 씩씩한 파이부터 위기의 순간에서 인간 내면의 갈등에 집중하고, 끝내 감정을 토해내는 모습까지 어색함 없이 오갔다. 배경이 병원과 바다로 쉼 없이 옮겨지는데, 날렵하고 가벼운 박찬양의 움직임은 역동성을 극대화했다. 퍼펫티어들과의 호흡도 매끄러웠다. 하이에나와 대립하는 파이 뒤로 리처드 파커가 거친 포효를 뱉으며 등장하는 1막 엔딩에서는 어김없이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여성 파이'라는 점도 기대를 모으는 지점이었다. 한국 공연계에서는 젠더프리 시도가 꾸준히 이어져 매번 화제가 됐는데, 이번 박찬양 파이에 대해서도 호평이 쏟아졌다. 색다른 관점에서 신선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는 평이 주를 잇는다. 패기 있고 단단한 무드의 남성 배우들과는 또 다른 한층 날렵하고 민첩한, 때로는 사랑스럽기까지 한 파이를 만나볼 수 있었다. 특히 공연은 원작과 달리 파이에게 형이 아닌 누나가 있는 설정을 취했는데 덕분에 '남매 케미'에 이어 박찬양 회차에서는 '자매 케미'까지 만나볼 수 있었다.

박찬양의 무대는 새로운 가능성의 문을 대폭 열어준 실험의 장이었다. 그만의 신선함과 특색 있는 호연은 "아는 맛이 전부가 아니다"라는 사고의 전환을 일으켰다. 훌륭한 배우를 만났다는 뿌듯함을 안고 공연장을 떠나는 경험을 선사했다.

공연 이후 박찬양은 한경닷컴에 "두려웠지만 다시 오지 않을 기회라 믿고 '하겠습니다'라고 답했다. 함께한 모든 분의 격려와 도움 속에 준비했고, 2026년 2월 7일, 그 응원을 안고 선 무대는 결혼식 다음으로 가장 잊지 못할 순간으로 남을 것 같다"며 "우리 파이 팀에게 감사의 인사 전하고 싶다"고 소감을 밝혔다.

김수영 한경닷컴 기자 swimming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