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법무부가 ‘엡스타인 파일’을 공개한 이후 파장이 확산되고 있다.
현재 미국 정부에서 관세 협상을 주도하고 있는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이 제프리 엡스타인과 이메일을 주고받은 것이 확인돼 사퇴압력을 받고 있다. 그는 엡스타인의 섬에 방문한 적이 없다고 했었지만 관련 자료가 공개되자 가족들과 함께 그의 섬을 방문한 적이 있다고 인정했다. 미국 정계에서는 사퇴 의견이 나오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도 사진이 공개돼 수세에 몰리고 있다.
엡스타인 파일은 엡스타인 사건 관련 수사 및 재판 기록이다. 지난 1월 30일(현지 시간) 문서 300만 쪽, 사진 18만 장, 영상 2000개가 공개됐다.
러트닉 상무장관은 지난 2월 10일 연방 상원 세출위원회 상무·법사·과학 소위원회의 청문회에 출석해 엡스타인과 만남을 지속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지난해 “엡스타인과 2005년 만난 뒤 혐오감을 느껴 다시 만난 적이 없다”고 말했지만 이번 청문회에서 엡스타인이 2005년 뉴욕 맨해튼에서 이웃으로 지내기 시작할 때부터 2019년 감옥에서 숨질 때까지 세 차례 만났다고 증언했다.
민주당에서는 러트닉 장관의 거짓 해명에 즉각 사임을 요구했다. 공화당에서도 사임 요구가 나왔다. 토머스 메시 하원의원은 “대통령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라도 사임하는 게 맞다”고 밝혔다. 캐럴라인 레빗 백악관 대변인은 2월 10일(현지 시간) 브리핑에서 “러트닉 장관은 트럼프 대통령 팀의 매우 중요한 구성원이며 대통령은 그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지지한다”고 사임 반대 의사를 밝혔다. 폴리티코는 러트닉 장관의 사임이 단기간 내 현실화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전망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2000년 파티장에서 엡스타인, 길레인 맥스웰(엡스타인 전 연인), 멜라니아와 함께 넷이 웃고 있는 사진이 공개돼 논란이 있었다. 이번 문서가 공개되면서 트럼프의 이름은 여러 차례 등장했지만 범죄에 대한 내용은 없었다. 트럼프는 2월 3일(현지 시간) 백악관에서 “엡스타인 파일에서 나에 대한 것은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고 모두 음모론”이라며 “이제는 국가가 다른 일로 넘어가야 할 때”라고 말했다. 그는 엡스타인의 범죄에 대해 모른다고 주장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이 과거 경찰서장과의 통화에서 “(그의 범행을)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고 말한 사실이 드러났다. 미 법무부가 1월 30일 추가로 공개한 엡스타인 수사 기록에는 연방수사국(FBI) 면담 요약본이 포함됐다.
2006년 7월 트럼프는 플로리다주 팜비치 경찰서장 마이클 라이터에게 전화를 걸어 “당신이 그를 막고 있어서 다행이다. 모두 그가 이런 일을 해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2006년 7월은 엡스타인의 성범죄 혐의가 처음으로 드러난 해다.
2009년 은퇴한 라이터 당시 서장은 이를 처음 보도한 마이애미 헤럴드에 “해당 FBI 면담 내용의 세부 사항은 사실”이라고 확인했다. 그러나 법무부는 “대통령이 20년 전 수사기관에 연락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별도의 입증 자료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엡스타인은 헤지펀드 매니저 출신으로 빌 클린턴 전 대통령,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 등 미국의 유력 인사들과 친분이 있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는 1994년부터 2004년까지 본인이 소유한 섬에서 유력 인사들이 미성년자를 포함한 여성들과 성관계를 맺도록 알선했다. 2008년 플로리다주 법원에서 미성년자 성매매 혐의에 유죄 판결을 받아 약 13개월간 복역 후 출소했다. 이후 미성년자 성범죄 혐의와 미성년자 인신매매 혐의로 2019년에 수감됐다. 그는 수감 직후인 2019년 8월 10일 뉴욕 교도소에서 사망했다.
엡스타인 파일은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 각국의 유력 인사들과 왕실에 큰 타격을 줬다. 영국은 왕실, 정치권 모두 논란이 됐다. 영국의 앤드루 마운트배튼윈저 전 왕자는 바닥에 누워 있는 여성 위로 네 발로 엎드린 모습의 사진이 공개됐다. 아프가니스탄 재건 투자 기회에 관한 기밀 내용도 엡스타인에게 이메일로 넘긴 것으로 나타났다. 그는 작위와 칭호를 박탈당했다. 영국의 전 주미 영국대사 피터 멘델슨 의원도 엡스타인 파일 공개 이후 40년간 있었던 노동당에서 자진 탈당하고 상원 의원직도 사임했다. 엡스타인이 미성년자 성매매 알선 혐의로 유죄를 받은 2008년 이후 그와 소통한 이메일이 공개됐기 때문이다. 현재는 엡스타인에게 거액을 받고 정부 내부 정보를 유출했다는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다. 멘델슨을 주미 대사로 추천한 모건 맥스 위니 총리 비서실장도 자리에서 물러났다.
노르웨이 왕세자비인 메테마리트와의 이메일도 공개돼 논란이 됐다. 2011년부터 2014년까지 엡스타인과 이메일로 부적절한 친분을 유지한 사실이 밝혀졌다. 엡스타인 파일에서 메테마리트의 이름이 최소 1000번 이상 등장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메일에서는 “파리가 불륜하기에 좋다”며 “스칸디나비아 여성이 신붓감으로 더 낫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프랑스는 자크 랑 전 문화장관이 엡스타인과 이메일을 주고받은 정황이 드러났다. 그는 논란 이후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슬로바키아의 미로슬라우 라이차크 국가안보 고문은 엡스타인과 젊은 여성에 대한 이메일을 주고받았다. 이후 고문직에서 사임했다. 폴리티코는 오히려 유럽에서 더 큰 파장이 일어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엡스타인 파일과 관련해 트럼프의 정치적 부담이 커진 가운데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과의 핵 협상을 재개해 군사적 압박을 시작했다. 2월 6일 트럼프 대통령의 중동특사 스티브 윗코프와 이란 외무장관인 아바스 아라그치는 오만 수도 무스카트에서 간접 회담 형식으로 8개월 만에 핵 협상을 재개했다.
미국 싱크탱크 과학국제안보연구소(ISIS)가 내놓은 보고서에 따르면 2월 8일 촬영된 인공위성 사진에서 이란 중부 이스파한의 지하 핵시설 출입구 3곳이 모두 흙으로 덮인 것으로 확인됐다. 미국이 군사적으로 계속 압박하고 있어 이란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핵시설 보호에 나선 것이라는 분석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이 합의하지 않으면 “매우 가혹할 것”이라고 계속 압박했다. 미국 정계 일각에서는 엡스타인 파일을 덮기 위해 이란과의 긴장을 높이는 전략을 쓰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 notionvc: 704feef0-a291-456c-aeab-6865ec0189b9 -->
배현의 인턴기자 baehyeonu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