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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글로벌 소비 시장에서 ‘가격은 올릴수록 더 잘 팔린다’는 ‘베블런 효과’가 힘을 잃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일부 명품 기업의 실적이 떨어지면서다. 팬데믹 이후 인플레이션과 공급망 교란 등을 이유로 가격을 올린 브랜드 대신 쓸모를 선택하는 ‘듀프(고가 제품의 저렴한 대체재)’ 소비로 소비자가 이동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계속 올라가는 명품 가격18일 미국 노동통계국(BLS)에 따르면 지난해 동안 보석과 시계 등 럭셔리 소비재의 가격 인상률은 4.7%였다. 같은 일반 소비자 물가 상승률의 두 배에 가깝다.
글로벌 컨설팅 기업 베인앤컴퍼니와 알타감마가 발표한 ‘2025년 글로벌 럭셔리 시장 보고서’에 따르면 2024~2025년에 전 세계적으로 약 5000만 명의 소비자가 럭셔리 시장에서 이탈한 것으로 추산된다. 이들 대부분은 과거 명품 시장의 성장을 견인했던 이른바 ‘아스피레이셔널(Aspirational·동경형)’ 소비자인 중산층이었다.
이들 상당수는 스마트 컨슈머’로 진화해 듀프 시장으로 이동했다는 분석도 있다. 브랜드 이름보다 제품의 성분과 제조사를 확인하고 구매하는 소비자가 늘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명품 화장품의 성분을 분석하고, 동일한 제조사에서 만든 저렴한 제품을 찾아내는 ‘프라이스 디코딩’ 능력을 갖추게 됐다는 분석이다.
이런 시장 변화는 글로벌 명품 기업 실적으로 이어졌다. 세계 최대 명품 업체인 루이뷔통모에헤네시(LVMH)의 작년 매출은 808억 유로로 전년 대비 5% 감소했다. 그룹의 핵심 수익원인 패션 및 가죽 부문은 8% 역성장을 기록했다. 이는 단순한 경기 부침이 아니라, 명품 소비의 저변을 지탱하던 중산층이 붕괴하고 있다는 구조적 신호라는 분석이 나온다.
LVMH의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은 지난달 열린 2025년 실적 발표 컨퍼런스 콜에서 이례적으로 어두운 전망을 내놓았다. 그는 “지정학적 불확실성과 경제적 도전 속에서도 회복력을 보였지만 2026년 전망에 대해서는 다소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했다.
글로벌 뷰티 시장에서는 ‘가격 대비 성능’을 앞세운 듀프 브랜드들이 시장 판도를 뒤집고 있다. 미국의 저가 색조 브랜드 ‘e.l.f. 뷰티’가 대표적이다. e.l.f. 뷰티는 2026 회계연도 3분기(2025년 12월 마감)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38% 급증한 4억 8950만 달러를 기록했다. 이는 월가 컨센서스를 상회하는 ‘어닝 서프라이즈’였다.
타랑 아민 e.l.f. 뷰티 CEO는 실적 발표 직후 인터뷰에서 “우리의 가치 제안과 강력한 혁신 엔진이 브랜드를 지속해서 성장시키고 있다”며 “소비자들은 더 이상 ‘비싼 것이 좋은 것’이라는 낡은 공식에 속지 않는다”고 말했다. 반면 전통의 뷰티 강자 에스티로더의 2025년 1~9월 매출 증가율은 3.4%에 그쳤다.
유통업계도 '튜프 현상' 확산유통업계에서는 ‘PB의 르네상스’가 열렸다는 평가가 나온다. 미국 코스트코, 타겟, 월마트 등 대형 유통사들은 듀프 트렌드에 발맞춰 자체 브랜드 라인업을 공격적으로 확장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뉴머레이터의 데이터에 따르면, 작년 미국 가구의 99%가 PB 제품을 구매한 경험이 있다. PB와 내셔널 브랜드(NB) 간의 가격 격차는 2019년 대비 38% 벌어졌다. 코스트코의 PB인 ‘커클랜드 시그니처’는 룰루레몬과 비슷한 디자인의 레깅스를 출시하며 품절 대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런 듀프 열풍은 법적 분쟁으로 이어지고 했다. 룰루레몬과 코스트코 간의 소송이 대표적이다. ‘요가복의 샤넬’로 불리는 룰루레몬은 코스트코가 판매하는 PB 의류가 자사의 인기 제품인 ‘얼라인 팬츠’, ‘디파인 재킷’의 트레이드 드레스를 침해했다고 주장하며 캘리포니아 중부 연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트레이드 드레스란 제품의 고유한 이미지를 형성하는 색채, 크기, 모양 등 외관적 요소를 의미한다. 상표와 달리 기능적이지 않은 요소까지 포괄적으로 보호하는 개념이다.
룰루레몬 측은 “코스트코 제품이 로고만 없을 뿐, 특유의 ‘오메가’ 모양 절개선, 지퍼 형태, 소매 구조, ‘타이드워터 틸’ 같은 특정 색상 명까지 모방하여 소비자가 혼동을 일으킨다”고 비판했다. 틱톡 등에서 ‘#LululemonDupes’라는 해시태그와 코스트코 제품이 바이럴 되는 현상을 지적하며, 이것이 브랜드 가치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코스트코 측은 “해당 디자인 요소들은 활동성을 위한 ‘기능적인 것’이며, 룰루레몬만의 독점적 권리가 될 수 없다”고 맞서고 있다. 포덤 로스쿨의 수잔 스카피디 교수는 “이번 소송은 패션 업계에서 어디까지를 영감으로 보고 어디부터를 불법적 도용으로 볼 것인가를 가르는 중대한 분수령이 될 것”이라며 “룰루레몬이 패소한다면 듀프 시장은 ‘법적 면죄부’를 얻어 더욱 폭발적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듀프 옹호론자들은 이를 ‘시장의 민주화’라고 부른다. 고가 브랜드가 독점하던 스타일과 효능을 대중에게 돌려준다는 논리다. 반론도 만만치 않다. 지식재산권(IP) 전문가들은 듀프가 창작자의 혁신 의지를 꺾고, R&D 투자를 위축시킬 수 있다고 경고한다.
듀프 현상은 거시경제에도 영향을 미친다. ‘지정학적 인플레이션’의 완충재 역할을 할 수 있다. 공급망 불안과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물가 압력을 듀프 제품들이 흡수하고, 소비자 물가 지수(CPI) 내 의류 및 화장품 항목의 급격한 상승을 억제한다.
글로벌 공급망 판도도 변할 수 있다. 과거에는 명품 브랜드 기업이 기획하고 제조사에 하청을 주는 구조였다. 최근에는 제조 능력을 갖춘 ODM(제조업자개발생산) 기업이 시장의 주도권을 쥐는 경우가 늘었다. 이런 글로벌 듀프 현상의 수혜 국가로 한국이 꼽힌다. 브랜드를 만들어내는 ‘제조 생태계’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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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완 기자 kjw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