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라는 말이 진심을 담아내기엔 이미 너무 닳고 낡아버렸을 때,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의 주인공은 “너를 마시멜로해”라고 고백했다. 이 달콤하고 끈적한 고백을 와인으로 옮겨낸다면 그건 바로 ‘쉬뒤로’다. 한 잔에 쏟아부은 포도나무 한 그루의 농축된 달콤함은 사랑에 빠졌을 때 뇌에서 분비되는 도파민의 결정체와 같다.
‘사랑해’가 낡아버린 밤에 마시멜로 한 잔
영국의 작가 겸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의 대표작 중 하나인 이 소설은 연애라는 폭풍을 통과하는 이들을 위한 안내서다. 주인공인 '나'가 비행기 옆자리에서 우연히 만난 '클로이'와 사랑에 빠지고, 갈등하고, 마침내 이별한 뒤 새로운 사랑을 예감하기까지의 과정을 다뤘다.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줄거리지만 드 보통이 분석한 연애 심리가 전 세계 연인들의 공감을 사며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았다.
이 소설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 중 하나는 주인공이 연인에게 독특한 방식으로 고백하는 순간이다. 주인공은 클로이와 저녁을 먹다 문득 “나는 너를 마시멜로해”라고 속삭인다. “사랑해”란 말이 수천 년의 세월 동안 닳고 닳아 그 무게를 잃어버리자, 입안에서 몽글몽글하게 녹아내리는 하얗고 폭신한 마시멜로의 질감을 빌려와 마음을 재정의한 것이다.
"갑자기 내가 클로이를 사랑한다기보다는 마시멜로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중략) 그 말은 너무 남용되어 닳고 닳아버린 사랑이라는 말과는 달리, 나의 마음 상태의 본질을 정확하게 포착하는 것 같았다. (중략) 그녀는 그것이 자기가 평생 들어본 말 중 가장 달콤한 말이라고 대답했다. 그때부터 사랑은, 적어도 클로이와 나에게는, 이제 단순히 사랑이 아니었다. 그것은 입에서 맛있게 녹는, 지름 몇 밀리미터의 달콤하고 말캉말캉한 물체였다."
-알랭 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청미래, 115쪽)
이 엉뚱하고도 절실한 고백을 후각과 미각으로 느끼고 싶다면 주저 없이 '샤토 쉬뒤로'를 잔에 따라야 한다. 프랑스 보르도 남쪽에 위치한 세계적인 스위트 와인 생산지 소테른에서 나오는 쉬뒤로는 녹아내린 마시멜로 같은 질감을 유독 잘 구현해 낸 와인이다. 입 안에서 미끌거리는 질감을 만들어내는 게 특징인 세미용(포도 품종)의 비중이 약 90%로 다른 소테른 와인에 비해 훨씬 높아서다. 쉬뒤로를 한 모금 머금고 입 안에서 굴리면 마치 마시멜로를 씹었을 때처럼 부드럽고 푹신하게 달라붙는 느낌이 든다. "사랑해"란 말 대신 "마시멜로해"를 선택한 몽글몽글한 정서에 가장 가까운 와인으로 고른 이유다.
쉬뒤로가 담긴 잔을 흔들 때 올라오는 강한 바닐라 향과 카라멜 향은 캠핑장에서 불에 살짝 그을린 마시멜로 냄새를 떠올리게 한다. 세미용이 빚어낸 우아한 유질감과 묵직한 당도는 혀 위에서 살포시 머물며 마시멜로가 녹아내리는 온기를 재현한다. 이윽고 잘 익은 살구와 꿀, 구운 견과류의 은은한 잔향이 층층이 피어오른다. 누군가를 열렬히 갈구할 때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복잡하고도 찬란한 소용돌이를 빼닮았다.
고통을 겪은 뒤 성숙하는 사랑의 역설
사랑의 초기 증상이 마시멜로처럼 폭신하고 달콤한 도파민의 잔치라면, 그 뒤엔 종종 부패의 시간이 찾아오곤 한다. 상대에게 가졌던 환상이 깨지고, 나의 밑바닥이 드러나며, 관계가 눅눅하게 절망으로 젖어 드는 시기. 권태의 저주가 찾아오면 연인에게 매력을 느끼고 사랑을 시작하게 만들었던 바로 그 이유가 곧 짜증을 유발하는 원인이 되고 만다. 예컨대 그의 두 앞니 사이에 살짝 벌어진 틈부터 책장을 넘기는 방식, 시리얼 취향 따위의 사소한 것들처럼.
쉬뒤로를 비롯한 소테른도 부패의 시간을 거쳐야 한다. 소테른은 귀부병(곰팡이균)에 감염된 포도를 이용해 만드는 '귀부 와인'의 한 종류다. 귀부병에 걸린 포도는 곰팡이가 포도 껍질을 파고들어 수분을 앗아간다. 이 과정에서 쭈글쭈글하게 말라 비틀어진 포도알 속에 당분과 풍미가 진하게 응축된다. 치열한 인고의 시간을 견디고 나서야 비로소 평범한 포도는 복합적인 향기와 황금색을 띤 고급 스위트 와인으로 거듭난다.
연애의 서사도 이와 유사하다. 썩어야만 달콤해지는 소테른의 역설은 아파야만 깊어지는 사랑의 문법과 정확히 일치한다. 상대에게 투사했던 완벽한 이미지가 부패하고, 비대한 자아의 수분이 빠져나가는 '자기 파괴'의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사랑은 비로소 단순한 열광을 넘어 성숙의 단계로 진입한다. 귀부병을 앓은 포도가 꿀과 살구, 사프란의 다차원적 향기를 내뿜듯, 상처를 통과한 사랑은 맹목적인 달콤함 대신 생의 씁쓸함까지 품어낸 정교한 균형감을 갖추게 된다.
사랑의 바보들에게 건네는 달콤한 위로
드 보통의 '연애 안내서'는 달콤하지만은 않다. 책 속엔 사랑이란 이름 아래 행해지는 어리석음과 집착, 불안이 우아하게 폭로돼 있다. 책장을 넘길수록 스스로의 '연애 흑역사'가 떠오를 수 있다는 점은 미리 경고한다. 주인공이 클로이와 비행기 옆자리에서 처음 만나게 된 확률이 989.727분의 1이라고 계산하는 부분을 읽을 땐, 너무 쉽게 운명이라 착각했던 과거의 인연이 떠오르고 만다. 상대에게 삐쳐 도움과 관심을 갈구하면서도 막상 그것을 주면 거부해버리는 유아적인 모습을 지켜보면 밀려오는 부끄러움을 막기 어렵다. 사랑의 온도가 식어버린 연인에게 나를 다시 사랑해달라고 매달리면서 드는 근거가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는 자조엔 심장이 시큰거린다.
사랑이란 단어가 너무 무겁게 느껴진다거나 혹은 반대로 너무 가볍게 흩날리는 것 같다면, 이 솔직한 안내서를 펼치고 쉬뒤로 한 잔을 곁들여 보길 권한다. 나만 사랑 앞에서 어리석고 미쳤던 게 아니라고, 이건 인류 공통의 철학적 숙제라고, 위로가 필요한 사랑의 바보들에게 쉬뒤로는 기꺼이 달콤한 동행이 되어줄 것이다.
어쩌면 달콤하고 몽글몽글한 액체가 목을 타고 넘어가는 순간, 문득 잊고 있던 누군가를 향해 수줍게 고백하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당신을, 정말이지 마시멜로합니다.”
신연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