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5월 신구 선생님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고 큰 자극을 받았어요. '왜 나는 저분을 내 연극에서 만나 뵙지 못했을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불란서 금고' 글과 연출을 맡은 장진 감독의 말이다.
장 감독은 10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서 진행된 연극 '불란서 금고: 북벽에 오를 자 누구더냐' 제작발표회에서 이 작품의 시작점에 배우 신구가 있다고 소개했다. 장 감독은 "10년 만에 내놓는 작품이지만 10년간 고민한 건 아니었다"며 "연극의 갈증은 있는데 마음처럼 잘 써지지 않았다. 모처럼 만에 새로운 작품으로 만나서 설레기도 하고 겁도 난다"고 솔직한 심경을 전했다.
특히 신구에 대해 "이전에 '세일즈맨의 죽음'을 신구 선생님이 한다고 해서 제가 연출을 맡았는데 갑자기 기획을 하신다고 하셨다"며 "그래서 선생님과 배우로 만나지 못했다"면서 신구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이어 '고도를 기다리며'를 본 후의 감동을 이어가며 "첫 대사 하나만 쓰고 시작했다"며 "작품을 다 끝내고 나서야 이야기를 만들었다. 꿈자리에 따라 서사가 달라지고 배우들이 그 이야기를 완성해줬다"고 작품을 소개했다.
'불란서 금고'는 연극과 영화를 넘나들며 이야기꾼으로 인정받은 장진 감독이 10년 만에 집필한 신작 연극이다. 자신만의 리듬과 언어를 구축해온 장진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 다시 한 번 장진식 코미디의 정공법을 선택했다.
은행 건물 지하, '밤 12시 모든 전기가 나가면 금고를 연다'는 단 하나의 규칙 아래 이름도, 과거도 모른 채 모인 다섯이 작은 균열을 시작으로 빠르게 무너지고 각자의 계산과 욕망이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얽히며 통제 불능 상태가 된다.
1936년 생으로, 올해로 90세인 대한민국 최고령 배우 신구를 필두로 성지루, 장현성, 정영주, 장영남, 최영준, 조달환, 안두호, 김한결, 주종혁, 김슬기, 금새록까지 12인의 배우가 한 무대에 오른다. 논리와 본능, 욕망과 계산이 치밀하게 충돌하는 이 작품에서 각각의 배우들은 각자의 개성을 드러내면서 장진 특유의 리듬과 호흡을 정확히 공유한다.
전설적인 금고털이 기술자 맹인 역에는 신구와 성지루가 더블 캐스팅됐고, 교수 역의 장현성과 김한결, 밀수 역의 정영주와 장영남, 건달 역의 최영준과 주종혁, 은행원 역에 김슬기와 금새록, '그리고' 역의 조달환과 안두호가 각기 다른 결로 작품을 완성한다.
장진 감독은 탈고 다음 날인 지난해 9월 "바로 신구 선생님을 만나 대본을 드렸다"며 "제가 쓴 대본을 드린 것만으로도 영광이었고 딱 한 달 후 10월 초 선생님 생신이셔서 만났는데 그때도 답을 안 주셨다. 그때 '한 달만 시간을 다오'라고 하셨는데 중국집에서 음식과 고량주를 드시더니 '그냥 하는 걸로 하자'고 하는 게 저희 작품의 시작이었다"고 소개했다.
신구는 "지금 보니 제가 너무 성급하게 결정했던 거 같다"며 "막상 연습을 하고 작업을 해보니 극복하기 힘든 점도 있고 작품 해석에서도 어려운 점이 있어서 노욕이 아니었나 싶은 지점도 있었다"고 털어놓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에도 "작품을 봤을 때 정말 재밌었고 웃겼다"며 "그런데 다른 사람이 한다고 하면 아쉬울 거 같더라"라고 애정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작품 선택에 대해 "살아있으니 연기를 하는 것"이라며 "밥을 먹는 것처럼 연기를 하게 된다"고 했다.
신구는 "몸이 신통치가 않다"며 "여러 장애가 오고 있는데, 이걸 어떻게 극복해서 만들어볼까 하는데, 그래서 고심하고 있다"고 했다.
또 "대사 외우는 것도 힘들다"며 "외웠던 것도 금방 잊고, 돌아서면 잊어버린다. 나이먹으면 왜 이렇게 되나 모르겠다"면서 유쾌한 웃음을 보였다.
또 "얼마전 내가 형님이라 부른 이순재 씨가 돌아가셔서 이제 제가 위로 모실 분이 없어서 아쉽기 짝이 없는데, 평생 하던 일을 하는 거다"며 "여의치 않지만 최선을 다해보려고 한다"고 연기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장진 감독은 "제가 만나본 배우 중 기준 점이 가장 높다. '기본'의 수준이 높은 것"이라며 "늘 이렇게 투정의 말씀을 하시는데, 연습실에서 선생님은 자리를 안뜨고, 늘 펜을 쥐고, 제가 (성)지루 형님에게 말하는 것도 다 받아 적고, 지루 형님이 대사를 조금 잊으니 바로 알려주시더라. 그 기준점에 미치지 못해 걱정하는 거지 관객을 만나는 것에는 전혀 문제가 안 된다"고 전했다.
이어 "선생님의 많은 작품 중 한 작품이길 바란다"며 "그게 우리 작품의 의미이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장진 감독은 "신구 선생님이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 몸이 연기를 할 수 없는 상태라고 생각하셨다고 한다"며 "그래서 집에서 걷는 연습부터 하셨다고 한다. '이 작품이 당신께서 살아계신 이유'라는 문자를 받았다. 그 진심을 열심히 쫓아가려고 하고 있다"고 신구의 진심을 전했다.
신구와 더블 캐스팅이 된 성지루에 대해 장진 감독은 "사과를 미리 했다"며 "많은 사람의 주목과 관심이 쏠릴 수 있고 선생님이 역할과 잘 맞아서 형님이 쫓아간다고 느낄 수 있지만 그래도 잘 맡아주셨으면 좋겠다고 출연 제안을 했다"고 밝혔다.
성지루는 "대본을 처음 받았을 때부터 무조건 같이 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고 제가 신구 선생님한테 개인적으로 아부지라고 하는데 아부지와 같은 무대,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게 부담이기보다는 영광이었다"며 "저에겐 가슴 벅찰 정도의 감격이었다"고 소개했다.
또한 "군 전역 후 37년 만에 머리를 깎았다"며 "장진 감독님이 처음엔 지나가는 말로 하는 줄 알았는데 3번 정도 말하더라. 그래서 알겠다고 하고 연습을 하다가 나가서 20분 만에 밀고 왔다. 명분을 갖고 시원하게 밀어볼 수 있어서 감사하다"면서 시원한 헤어스타일을 공개했다.
정영주, 장영남은 전작 '꽃의 비밀'에서도 장진 감독과 호흡했다. 장진 감독은 "신구 선생님에게 말씀드린 후 바로 대본을 두 사람에게 드렸다"고 했다. 정영주와 장영남은 "여러 부분을 따지지 않고 하게 된 이유는 신구 선생님 때문이었다"고 신뢰감을 드러냈다.
정영주는 또한 "장진 감독님만의 말의 힘, '말맛'이 있다"며 "굉장히 쉽고 깊게 건드려주는 남다른 에너지가 있는 대본이라 그걸 동기화시키고 멋들어지게 표현하는 부담감이 배우로서 있었는데 이번도 사그라들지 않더라. 그렇지만 기분 좋은 스트레스였다"고 애정을 전했다.
장진 감독과 장현성은 대학교 동기다. 37년 만에 연출자와 배우로 만난 두 사람이다. 장현성은 "어쩌다 보니 작품은 처음"이라며 "저는 대본을 보는 눈이 없진 않다. 그동안 장진이 그렇게 잘 만들어왔는데 설마 이번엔 못 만들까 싶기도 했고 무엇보다 신구 선생님이 하신다고 해서 그게 가장 컸다"고 전했다.
또한 "이 극장을 지나서 학전에서 제가 연극을 하며 연기를 시작했는데 오랜만에 대학로에 와서 매일 연습을 하니 너무 좋다"고 설렘을 드러냈다.
'장진의 페르소나'로 불리는 김슬기는 "감독님의 작품이 연극 작품의 70% 정도를 차지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연극 데뷔도 같이 했고 많은 작품을 했지만 그럼에도 특별한 건 감독님의 초연을 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내심 기다리고 있었는데 '불란서 금고'를 만나게 되면서 글자에 처음으로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이 배우로서 경이로웠다"고 말했다.
금새록과 주종혁은 '불란서 금고'를 통해 처음 연극 데뷔를 하게 됐다.
주종혁은 "저에게 연극은 무서운 영역이었고 대본을 본 후에도 내가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제가 좋아하는 많은 선배님과 함께하면서 많이 깨지고 새롭게 채우고 싶다는 생각으로 시작하게 됐다"며 "민폐를 끼치진 않을까 걱정됐는데 하루하루 지나면서 든든한 팀이라는 걸 깨닫게 됐다"고 돈독한 팀워크를 자랑했다.
금새록은 "나만 잘하면 되지 않을까 겁 없이 도전했다가 점점 무서워지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도 "선배님들이 정말 아껴주시고 품어주신다"며 "부족하더라도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는 용기가 생기는 거 같다"고 말하며 고마움을 전했다.
한편 '불란서 금고'는 오는 3월 7일부터 5월 31일까지 대학로 NOL 서경스퀘어 스콘1관에서 상연된다.
김소연 한경닷컴 기자 sue12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