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소득 기준에 가려진 청년의 삶

입력 2026-02-09 18:21
수정 2026-02-10 00:06
‘소득 요건 초과’

청년을 위한 주거 지원이나 금융 상품을 신청해 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마주쳤을 탈락 사유다. 열심히 일해서 연봉을 조금 높였을 뿐인데 정부는 그 노력을 ‘지원 불필요’라는 판정으로 되돌려준다. 성실하게 일해 소득을 높인 청년은 그렇게 정책의 사각지대로 내몰린다.

반대의 경우도 흔하다. 뚜렷한 직업은 없지만, 부모의 도움으로 번듯한 아파트에 살며 여유롭게 생활하는 친구는 ‘저소득층’으로 분류된다. 근로소득이 낮다는 이유로 각종 청년 수당과 지원금의 우선순위가 매겨진다. 땀 흘려 일하는 청년은 배제되고, 일할 필요가 없는 청년이 혜택을 보는 이 기묘한 역설. 이것이 지금 우리 청년 정책의 현주소다.

토마 피케티는 돈이 돈을 버는 속도가 노동이 돈을 버는 속도를 앞지른다고 했다. 한국 사회에서 이는 학술적 이론이 아니라 피부로 느끼는 현실이다. 아무리 연봉을 높여도 치솟은 집값과 자산 인플레이션을 따라잡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도 정책은 여전히 ‘전년도 소득’이라는 낡은 잣대만 들이댄다.

행정은 이해하기 어려운 실제 삶보다 계산하기 쉬운 숫자를 선호한다. 건강보험료 납부액과 세전 소득은 파악하기 쉽고 줄 세우기 편하다. 하지만 이 숫자는 청년의 진짜 주머니 사정을 말해주지 않는다. 고소득 무자산 청년에게 높은 연봉은 자산 증식의 종잣돈이 아니라, 매달 빠져나가는 월세와 학자금 대출을 메우기 위한 생존 비용에 불과하다. 행정기관의 잣대로 고소득자라는 꼬리표를 붙이지만, 현실은 남는 게 없는 ‘가난한 부자’인 셈이다.

문제는 이런 기준이 청년에게 잘못된 신호를 준다는 데 있다. 소득이 기준선을 1원이라도 넘는 순간 수백만원의 혜택이 사라진다. 이른바 ‘복지 절벽’이다. 청년들 사이에서 “더 벌면 손해”라는 자조 섞인 말이 나오는 이유다. 국가가 나의 성취를 응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징벌하고 있다는 박탈감은 노동의 가치마저 흔들리게 한다.

정책이 청년을 마주할 때 나와야 하는 질문은 ‘얼마를 버느냐’의 일차원적인 수준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왔고 살고 있느냐’여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단기적 소득이 아니다. 개인이 처한 출발선과 자산 형성의 가능성을 입체적으로 보는 시각이다. ‘완성된 청년’만을 전제하는 정책은 이제 막 출발선에 선 대다수 청년을 놓치게 한다. 부모의 자산 배경과 개개인의 노력을 고려하지 않은 채 근로소득만으로 지원 여부를 가르는 건 기울어진 운동장을 외면하고 달리는 속도만 재는 꼴이다.

정책의 목표가 단순한 빈곤 구제가 아니라 청년의 자립과 미래 준비라면 기준부터 달라져야 한다. 생애 주기적 관점에서 누가 진짜 도움이 필요한지를 가려내야 한다. 열심히 일하는 것이 손해가 되지 않는 사회, 배경이 아니라 노력이 정당하게 평가받는 사회. 이것이 청년이 정치에 요구하는 최소한의 공정이다. 그 기준을 결정하는 책임은 결국 정치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