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6일 노사정 태스크포스는 퇴직연금 의무화 도입에 합의했다. 동시에 확정기여형(DC) 제도를 운영 중인 사업장을 중심으로 근로자가 DC 자산을 직접 운용하거나 민간 금융회사가 설립한 기금을 선택해 운용하도록 하는 안 역시 합의됐다.
여기서 말하는 ‘기금’은 은행, 증권, 보험 등 민간 금융회사가 별도의 수탁 법인을 설립해 운용하는 구조다. 그동안 논란이 많았던 국민연금의 퇴직연금 참여는 중소기업(300인 이하) 대상의 기금 운용으로 한정하기로 정리됐다.
기금형 제도가 주목받는 이유는 명확하다. 첫째, DC형에 가입한 근로자들이 지금처럼 원리금보장형에 머무르지 않고 기금을 선택하게 되면 보다 높은 수익률을 기대할 수 있다. 둘째, 연금 자산의 성격상 자산배분 전략을 기본으로 하게 되는데 기금에 자산이 일정 수준 이상 쌓이게 되면 운용 효율성, 수수료 협상력 등 규모의 경제 효과가 가능해진다. 이는 고스란히 퇴직연금가입자에게 혜택으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장점은 모두 ‘기금 선택’이 실제로 일어날 때에만 가능한 이야기다. 아직까지 퇴직연금 가입자가 어떤 방식으로 기금을 선택하게 될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은 제시돼 있지 않다. 지금까지 알려진 기본 구조는 가입자가 자신의 DC를 직접 운용하거나 기금에 가입할지를 ‘선택’하게 된다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2022년 7월부터 시행된 디폴트옵션 제도(사전지정운용제도)의 경험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디폴트옵션은 DC·개인형퇴직연금(IRP)형의 수익률을 높이기 위한 정책이었다. 그러나 시행 3년 반이 지난 지금 실제로 디폴트옵션을 통해 운용되는 비율은 20% 미만이며 그중 대부분은 원리금 보장형을 담고 있는 초저위험 옵션을 선택했다. 이제 겨우 시행 3년 반이라 결론을 내리는 것은 적정하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지난 3년의 경험에서 배운 것을 바탕으로 더 나은 제도를 실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디폴트옵션에 초저위험을 넣은 것이 잘못이라는 비판이 있다. 하지만 이 비판은 잠시 옆으로 빼놓도록 하자. 이 결과는 보다 근본적으로는 퇴직연금 가입자들의 금융 이해도와 펀드 운용에 대한 신뢰 부족의 결과라 생각한다. 이 두 가지가 있었다면 초저위험이 디폴트옵션 안에 있더라도 퇴직연금가입자들은 이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디폴트옵션 디자인에 대한 비판도 일리는 있다. 같은 논리로 기금형을 하더라도 선택을 많이 주는 것보다는 좋은 하나 잘 디자인된 펀드를 하나 주는 것이 좋다. 그런데 잘 디자인된 펀드를 하나 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 있는가에 대한 생각을 해봐야 한다.
디폴트옵션으로 한 예를 들어보자. 현재 디폴트옵션 상품들은 금융사별로 ‘포트폴리오 옵션’이라는 이름으로 복잡한 구성을 갖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는 타깃데이트펀드(TDF)를 2~3개 섞어 구성하는 방식인데 서로 철학과 운용방식이 다른 TDF들이 한 포트폴리오 안에 혼합된다. ETF 기반, 액티브 또는 패시브 전략, 기본 투자 철학까지 제각각인 상품들이 하나의 ‘디폴트옵션 상품’ 안에 혼재돼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복잡한 구조가 만들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양한 명분이 있겠지만 아마도 그중 하나는 ‘하나를 고르지 않기 위한 전략’일 것이다. 특정 상품을 선택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구조다.
이제 이 문제를 기금형 퇴직연금으로 옮겨 생각해 보자. 먼저 기금형이 도입되더라도 기금을 신뢰하지 않는 가입자는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럴 경우 앞서 언급한 기금형의 기대효과(수익률 제고와 규모의 경제)는 실현되지 않는다. 따라서 기금을 신뢰하고 선택할 수 있도록 만드는 구조적 설계와 환경 조성이 전제돼야 한다.
이를 위해 다음의 두 가지가 반드시 선행돼야 한다. 첫째, 금융교육을 통해 가입자들이 투자는 본질적으로 등락을 포함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기적으로는 회복 가능한 구조의 펀드 설계가 필요하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현재 한국은 세계적으로 드물게 퇴직연금교육을 법정의무교육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이메일 자료 배포 수준에서도 이 의무를 다할 수 있다. 법정의무교육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교육 방식의 전면적인 개선이 필요하다. 최소한의 이해와 행동 유도를 위한 실시간 학습, 대화형 교육 도구, 온라인 학습 플랫폼 등이 도입돼야 한다.
둘째, 기금이 설계되고 운용되는 모든 과정은 투명하게 공개돼야 한다. 가입자들이 기금을 신뢰하려면 기금의 투자전략, 수수료 구조, 과거 성과, 리스크 관리 전략, 성과 부진 시의 대응 프로세스 등이 모두 명확하게 드러나야 한다. 이 정보들이 충분히 공유돼야만 퇴직연금 가입자는 기금을 신뢰하고 선택할 수 있다.
한국퇴직연금데이터를 운영하며 기업의 퇴직연금 담당자들과 지속적으로 대화해 왔다. 이 과정에서 한 가지 일관되게 반복되는 반응이 있었다.
“퇴직연금 운용, 이제는 정말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필요합니다.” 이처럼 문제의식과 동의는 100%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은 다르다. “그런데요, 만약 제가 교육을 했는데 직원이 그걸 따라 했다가 손실이 나면 저한테 책임지라고 할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솔직히 좀 꺼려집니다.”
이 대답은 기금형 제도에서도 반복될 수 있다. 퇴직연금 담당자나 사용자가 아무리 잘 설계된 프로세스를 따랐더라도 나중에 손실이 발생하면 법적 혹은 조직 내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는 한 기금 선택이나 운용에 대한 결정은 회피될 가능성이 높다. 무서워서 퇴직연금교육도 할 수가 없는데 기금 선택을 어떻게 할 것인가.
실제로 미국에서는 최근 몇 건의 퇴직연금 관련 집단소송이 진행 중이다. 미국은 책임에 대한 법적 장치가 굉장히 잘돼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하지만 특정 기업의 DC형 연금제도에서 담당자가 당시 가장 낮은 수수료를 가진 TDF 상품을 선택해 10년 이상 운용했지만 다른 TDF에 비해 성과가 낮아졌고, 결과적으로 해당 기업 직원들의 퇴직자산은 시장 평균보다 크게 부족해졌다. 이에 따라 퇴직자들이 회사를 상대로 법적 책임을 묻는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정확하게 정의된 프로세스를 따른 의사결정은 조직 안에서, 그리고 법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확보되지 않으면 기금을 선택하고 운영하는 구조 자체가 작동하지 않게 된다.
“퇴직연금 운용의 독립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옳다. 하지만 독립성 확보를 위한 정확한 프로세스 설계와 법적 책임 면책 장치가 함께 마련되지 않으면 기금형 퇴직연금이 도입되더라도 실질적인 변화는 어려울 것이다.
영주 닐슨 한국퇴직연금데이터 대표 겸 성균관대 SKK GSB 교수
<hr style="display:block !important; border:1px solid #c3c3c3" />이 칼럼은 한국퇴직연금데이터의 ‘기금형 퇴직연금 심층 리포트’를 바탕으로 작성됐다.<hr style="display:block !important; border:1px solid #c3c3c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