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민트'란 첩보 액션이 박정민이란 '멜로킹'을 만들 때 [김예랑의 씬터뷰]

입력 2026-02-09 17:30
수정 2026-02-09 17:47
"제가 멜로 장르에 알레르기가 있는 게 아니라 내가 하는 멜로를 보는 사람들이 알레르기 느낄까 봐 알레르기가 생긴 거라고 설명할 수 있어요. '멜로가 너~무 싫어' 이건 아니고요, 도전해 보고 싶고 좋은 영화 만들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죠. 박정민의 멜로를 사람들이 궁금해할까?란 생각을 했어요. '휴민트'를 통해 멜로 비슷한 것이 나왔고, 사람들의 평가를 보고, '좋은데?' 하며 가까이 갈 수 있는 용기가 생긴 것 같습니다."

장르물에서 단단한 얼굴을 쌓아온 배우 박정민이 류승완 감독이 연출한 첩보 액션 영화 '휴민트'를 통해 처음으로 멜로의 문턱을 조심스럽게 넘었다.

'휴민트'는 비밀과 진실이 얼어붙은 블라디보스토크를 배경으로, 국정원 요원 조 과장(조인성)과 북한 국가보위성 조장 박건(박정민), 북한 식당 종업원 채선화(신세경), 북한 총영사 황치성(박해준) 등 서로 다른 목적을 지닌 인물들이 맞물리며 전개되는 첩보 액션 영화다. 연출은 류승완. 실제 정보원 중심의 첩보전 개념인 '휴민트(HUMINT)'에서 모티프를 얻어 구원과 희생이라는 테마를 밀도 있게 풀어낸다.

박정민은 '휴민트'에 끌린 이유에 대해 '직진성'이라고 꼽았다. "이야기 자체가 흘러가는 방식이 직진이죠. 그 직진성을 류승완 감독이 어떻게 만들지 궁금했어요. 그냥 만드실 분이 아니라는 걸 느꼈고요. 사실 좀 놀랐어요. 왜 나한테 이렇게나 좋은 역할을? 뭘 보고 주셨지! 하고요. 박건의 감정 상태에 따라 이야기가 전복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왜? 라는 의문과 함께 감사한 마음뿐이었습니다."

박정민이 연기한 박건은 냉정한 판단력과 날 선 움직임으로 임무를 수행해 온 북한 국가보위성 조장이다. 감정과 거리를 두며 살아왔지만, 채선화를 마주하는 순간부터 균열이 생긴다. 그는 "처음엔 이 작품을 멜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했다. "누군가를 구출하는 이야기라고만 여겼다. 이렇게까지 깊게 표현될 줄은 몰랐다"고도 덧붙였다. 촬영을 거듭하며 그는 이 감정이 멜로일 수도 있겠다는 걸 중간쯤에서야 알아차렸다고 했다.


박정민은 배우가 연기를 할 때 자기 안에 없는 것이 튀어나온다고 믿지 않는다. 그는 "차분히 뒤져보고 발견해내는 싸움"이라고 표현했다. 촬영이 쌓일수록 인물은 몸에 붙었다. 그는 "10회차 정도 되면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나오는 걸 발견한다. 그 이후부터는 쭉 간다"고 했다.

"박건이란 인물이 가진 순애보적인 것을 제 안에서 찾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습니다. 제 안에 기억된 무엇이 발현된 거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 모든 표현을 거칠게 할 수밖에 없었죠. 감독이 박건이란 인물이 멋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셨는데 그런 인물로 만들려고 노력했고, 촬영이 시작되면 자아도취 하기 시작해요. 내가 그 인물로 가까워지고 있다는 거죠."

그는 영화를 본 후 안도했다고 했다. "잘 생겼다, 못생겼다 이런 걸 떠나, 스스로 이 인물과 붙여놓기 마련인데 영화를 보기 전엔 무서웠어요. 촬영 후 1년이 지난 후 박정민과 박건은 동떨어진 사람인데 내 눈에 오그라들지 않을까 싶어서요. 다행히 영화를 보니 어색하지 않아 감사했습니다."

특히 침묵으로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 장면들이 그를 가장 괴롭혔다. 그는 "저는 대사에게 기대는 배우다. 말없이 바라보는 게 너무 어렵다. 모니터를 보면 내가 생각한 것보다 형편없을 때가 많았다"고 털어놨다. 그는 결국 표정을 설계하는 방식으로 접근했다. 감정을 덜어내고, 인물에게 필요 없는 것을 비워내는 선택이었다.

'휴민트'에서 박건과 채선화 사이에는 거의 스킨십이 없다. 박정민은 이 역시 의도적인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명분 없는 스킨십은 박건답지 않다고 느꼈어요. 손을 잡으면 애절해 보일까 해서 잡는 것과 인물의 목적에 따른 행동은 전혀 다르거든요." 리허설에서 시도해봤지만 어색함이 먼저 와서 멈췄다고 했다.

"사실 손이라도 잡아야 하느냐는 고민도 했어요. 하지만 배우가 연기를 하다 목적이 없는 행동을 하면 되게 어색해요. 무드가 완전히 달라지죠. 박건은 그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이어야 박건스럽겠구나 생각했죠."

채선화를 연기한 신세경에 대해서는 신뢰를 숨기지 않았다. 그는 "카메라가 돌지 않아도 분위기로 사람을 압도하는 힘이 있다"고 했다. "굉장히 아름다운데 강단 있어 보이는 두 이미지가 동시에 있다. 함께 나오는 장면에서는 많이 기댔다"고 덧붙였다.

박정민은 가수 화사의 '굿 굿바이' 뮤직비디오에 출연했고, 그 인연으로 한 영화상 무대에도 함께 올라 지난해 온라인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화사의 강렬한 에너지와 박정민의 절제된 움직임이 대비를 이루며 로맨틱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는 "화사의 노래는 너무 좋다. 다만 너무 많이 들어서 이제는 일부러 듣지 않는다"고 웃었다. "저한테도 감사한 노래고, 화사에게도 복덩이 같은 음악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휴민트'에서 신세경은 패티김의 '이별'을 부른다. 이에 대해 박정민은 촬영 당시 자주 흥얼거렸다고 했다. "신세경의 '이별'을 처음 들었을 때 노래 왜 이렇게 잘하지? 사투리로 노래하는 게 신기했어요. 촬영할 때 이 노래의 진가를 알았으면 더 애절한 연기가 나왔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촬영 중 무너졌던 순간도 있었다. 그는 이유 없이 멘탈이 나갔던 날을 떠올리며 "그게 저한테 가장 실망스러웠던 순간"이라고 했다. 너무 창피해서 인사도 하지 않고 숙소로 돌아갔다고 했다.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건 감독의 인지였다. "무너졌다는 걸 누군가 알아주면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혼자가 아닌 현장이었기에 가능했던 회복이었다.


박정민은 자신과 박건을 분명히 구분했다. "박건이라면 목숨까지 던질 수 있겠지만, 저는 못 한다"고 했다. 그 간극이 연기의 출발점이었다. 그는 액션 역시 감정의 표현이라고 믿는다. "총을 쏘면서도 누구를 보호하려는지 계속 생각했다. 결국 두 장르를 합쳐 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 영화를 하면서 액션도 감정의 표현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때리고 피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데 박건이란 인물엔 감정을 실어줘야 하거든요. '휴민트'는 류승완 감독의 기존 영화보다 더 클래식한 첩보 영화라고 생각이 들어요. 다들 모니터하며 류 감독의 영화 중에 못 본 영화 같다고 입을 모아 이야기했습니다."

박정민은 자신의 전작들과 차별점에 대해 "처음으로 사랑하는 이성을 목표로 하는 인물을 연기해 봤다"고 설명했다. "만족까진 모르겠고, 관객들이 예쁘게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봤을 때도 엄청 이상해 보이지 않아서 '그럼 됐다' 정도로 위로하고 있습니다."

'휴민트'는 오는 11일 개봉한다.


김예랑 한경닷컴 기자 yesr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