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부자는 명함 대신 침묵으로 말한다…유럽 '소셜클럽'의 법칙 [홍승표의 유러피안 아비투스]

입력 2026-02-26 10:41
수정 2026-02-26 17:25

진정한 권력은 소음을 싫어한다. 그 소음이란 단지 음량이 아니라 ‘증명하려는 의지’에서 나는 소리다. 파리, 런던, 룩셈부르크 등 유럽의 오래된 소셜클럽에는 간판도, 홍보도, 친절한 초대장도 없다. 유행하는 레스토랑처럼 인스타그램에 걸릴 장면을 제공하지도 않는다. 대신 이곳에는 절묘한 공통점이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말하지 않고도, 서로가 누구인지 대강 알아본다.

한국에서 ‘네트워킹’은 대체로 정보를 교환하는 행위로 이해된다. 직함을 교환하고, 관심사를 확인하고, 다음 약속을 잡는 방식이다. 그런데 유럽의 소셜클럽은 그와 반대로 움직인다. 이곳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한다”가 아니라 “어떤 사람으로 존재하는가”다. 대화의 리듬, 침묵을 견디는 태도, 상대의 시간을 존중하는 방식. 그 모든 것이 ‘명함보다 정확한 정보’로 작동한다.


이 칼럼은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말한 ‘아비투스(habitus)’를 렌즈로 삼아, 유럽의 생활양식과 권력의 미학을 읽어보려는 시도다. 아비투스란 단순한 취향이 아니다. 그것은 몸에 밴 태도, 말투, 거리감, 취향의 기준, 어떤 상황에서 한 발 물러설 줄 아는 능력 같은 것들이다. 누군가가 열심히 연출하지 않아도 드러나는, 삶이 축적한 결과다. 그리고 유럽의 소셜클럽은, 이 아비투스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곳 중 하나다. 모임이 아닌 제도가 된 소셜클럽유럽의 소셜클럽은 겉으로 보면 멋진 건물을 소유한 사교 모임이다. 하지만 실상은 사회가 작동하는 제도(Institution)에 가깝다. 이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외교관, 로펌 파트너, 패밀리오피스 관계자, 정치권 인사, 기업 오너와 그 주변의 실무자들이다. 때로는 예술재단을 운영하는 이나 학교 이사회에 앉아 있는 인물도 섞인다.

이들이 호텔 로비나 공개 레스토랑이 아니라, 이 밀폐된 공간을 선택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공식 석상에서는 꺼낼 수 없는 이야기들이 이곳에서는 굳이 힘을 주지 않아도 오가기 때문이다. 공개된 자리에서는 누구나 역할을 수행한다. “국가를 대표하는 사람”, “회사를 대표하는 사람”, “소속을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말해야 한다. 그러나 클럽에서는 역할이 희미해지고, 대신 ‘사람’의 잔향이 남는다. 그 사람의 판단이 형성되는 방식, 결정을 취하는 기준, 신뢰를 다루는 습관이 드러난다.


여기서 권력은 명함을 통해 주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말을 하지 않는’ 방식을 통해 재확인되고, 존재로서 재확인된다. 일례로, 필자가 초대를 받은 런던의 '리폼 클럽'(Reform Club)에선 서로가 가볍게 목례를 하는 방식으로 서로의 존재를 확인했다. 다만 대화가 진행될 때 어떤 주제에서 멈추는지, 어떤 주제에서 한 문장을 더 덧붙이는지, 질문을 어떻게 하는지, 상대의 말을 끊지 않는지, 이런 아주 작은 동작들이 ‘동일한 세계에 속해 있는가’를 판별하는 도구가 됐다.멤버십은 혈통 아닌 축적된 태도이 클럽들의 기원은 귀족 사회에 닿아 있다. 런던의 소셜클럽 중에서 진보적인 성향을 띄고 있는 리폼클럽은 회원 2인의 추천이 있어야 후보자가 운영위원회에 회부되고, 운영위원회에서 신규 회원 유입에 대한 의사결정을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멤버십은 혈통이 아니라, ‘축적된 태도’, 혹은 ‘사회문화적 자본’을 기준으로 한다. 물론 경제적 자본이 기본 조건이 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돈만으로 통과할 수 없는 지점이 있다. 돈은 문을 열어주지만, 방 안에 오래 남게 해주지는 못한다.

그 지점에서 등장하는 것이 문화자본이다. 부르디외는 자본을 물질적·경제적 자본만으로 보지 않았다. 사람을 움직이는 세계에는 문화자본(교육, 언어, 예술 감식안, 취향의 코드)과 사회자본(관계망, 신뢰, 평판)이 있고, 이 둘은 경제자본과 결합해 계급을 재생산한다고 봤다.

유럽의 소셜클럽에서는 이 문화자본이 노골적으로 전시되기보다, 아주 은근하게 작동한다. 특정 화가의 이름을 꺼내는 방식, 영국 및 프랑스 내 대학의 서열을 말하지 않고도 암시하는 말투, 어떤 정책 이슈를 ‘문제’로 보는지, 그 문제를 다루는 ‘톤’이 무엇인지. 이런 요소들이 자연스럽게 대화 속에서 드러난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은 ‘똑똑해 보이는 사람이 이기는 장소’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을 증명하려는 사람’이 불편해지는 장소다. 진짜 게임은 지식의 양이 아니라 지식을 다루는 태도에서 벌어진다. 침묵이 언어가 되는 순간한국에서는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말을 한다. 그러나 유럽의 오래된 사교 공간에서는 침묵이 어색함이 아니라 완성된 상태로 받아들여지는 때가 많다. 침묵은 공백이 아니라,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시간이다. 누가 침묵을 불편해하는지, 누가 침묵 속에서도 여유를 유지하는지가 곧 신호가 된다. 말의 밀도가 높다.

이런 감각은 단지 문화 차이가 아니라 아비투스의 차이다. 침묵을 견디는 능력은, 혹은 멈출 수 있고 비생산적인 게으름을 피울 수 있는 능력은 사회적 위치가 안정적일 때 더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반대로 끊임없이 말해야 하는 사람은 대체로 자신의 위치가 흔들리고 있다는 신호일 때가 많다. 말은 종종 “나는 여기에 있을 자격이 있다”는 불안을 덮는 장치가 되기 때문이다. 유럽의 소셜클럽은 그 불안을 드러내는 기계처럼 작동한다. 큰소리를 내지 않는데도, 누가 불안한지 드러난다.


유럽의 소셜클럽이 흥미로운 이유는, 그것이 단지 유럽의 문화가 아니라 ‘유럽식 글로벌리즘’ 이 작동하는 방식을 압축해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세계는 관계를 만들기 위해 서두르지 않는다. 오히려 서두르는 순간 관계는 얕아진다. 대신 오래 지속될 수 있는 신뢰를 전제로 움직인다. 근래에 회자되는 올드머니의 라이프스타일이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다음에 뭐 하자”는 말이 먼저 나오지 않는다. 먼저 확인하는 것은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다. 그 질문은 직접 묻지 않는다. 대화의 결, 침묵의 타이밍, 예측 가능한 예의, 과도하지 않은 친절. 그런 안정된 태도에서 답을 읽어낸다.

이런 방식은 느리다. 하지만 한 번 만들어진 신뢰는 오래 간다. 계약서보다 먼저 작동하는 것은 개인의 성향과 평판이다. 그리고 평판은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아비투스는 즉흥적으로 연출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쌓여 몸에 남는 것이니까.

물론 이런 방식이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관계 자체보다 성과와 산출물이 앞서는 분위기에서는 특히 그렇다. 하지만 지금처럼 세계 정세가 급변하고 지정학적 이해관계가 시시각각 재편되는 시대에는, 빠른 결론만으로 오래 갈 관계를 담보하기 어렵다.

유럽은 여전히 속도보다 절차와 절제, 반복과 축적으로 세계를 다루려 한다. 법치주의와 헌법주의, 평화주의와 주권평등 같은 국제사회의 ‘규범’은 때로 느리고 답답해 보이지만,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오히려 강한 안전장치가 되기도 한다.

당신이 유럽을 ‘어려운 문화’로만 멀리하기보다, 유럽의 시선으로 세계를 읽는 하나의 프리즘-이를테면 유러피안 아비투스-를 이해하게 되기를 바란다. 불확실성이 표준이 된 시대, 유럽이 조용히 보여주는 교훈은 단순하다. 가장 멀리 가는 힘은 대개, 가장 조용한 태도에서 시작된다는 것.

글·사진=홍승표 에스뻬랑세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