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일·풍력·반도체까지 흔든다…'10달러 베어링'의 글로벌 파워 [글로벌 머니 X파일]

입력 2026-02-10 07:00
수정 2026-02-10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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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작은 금속 부품인 베어링의 전략 자산의 가치가 커지고 있다. 국가 안보 관련 기기의 핵심 부품이기 때문이다. 베어링이 첨단 반도체만큼 글로벌 경제의 공급망을 흔들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미국과 캐나다, 베어링 규제 강화10일 업계에 따르면 미국 상무부 산업안전국(BIS)은 2024년 '공통 높운 우선순위 품목 리스트(CHPL)'에서 베어링을 'Tier 3.B(러시아 무기체계에 활용되는 기계/기타 부품)'로 명시했다. 베어링을 세탁기나 자동차에 쓰는 민간 부품이 아니라 미사일 유도장치와 전차 구동축을 움직이는 핵심 전략물자로 규정한 것이다. 10달러짜리 특수 베어링 하나 없어 1000억 원짜리 반도체 장비도 만들지 못한다.

BIS는 구체적으로 '8482.10(볼 베어링)', '8482.20(테이퍼 롤러 베어링)', '8482.30(스페리컬 롤러 베어링)', '8482.50(기타 원통 롤러 베어링)' 등 4개 HS 코드를 리스트에 올려 통제 수위를 높였다. BIS는 "이들 품목은 상용품일지라도 상무통제목록 상의 민감 품목과 연계돼 통제된다"고 설명했다.

캐나다 정부의 조치는 더욱 정교하다. 캐나다 외교부는 지난해 '제한된 물품 및 기술 목록'에 '2A991(베어링 및 베어링 시스템)'을 포함하며 제재의 고삐를 죄었다. 캐나다의 통제 기준이 구체적이다. 우선 정밀도. 캐나다 규정은 "ABEC 7/7P/7T 또는 ISO Standard Class 4 이상"의 고정밀 등급을 구체적으로 명시했다. 항공우주나 정밀 공작기계에 쓰이는 최고급을 정조준한 것이다.

다음은 온도와 속도다. '섭씨 300도를 초과하는 작동 온도'와 '230만 DN(보어 직경×회전속도)을 초과하는 회전 속도'가 기준이다. 이는 고속으로 회전하며 극한의 열을 견뎌야 하는 제트 엔진, 가스 터빈, 미사일 추진체에 쓰이는 베어링을 차단하겠다는 의도다. '섭씨 288도 이상에서 작동하는 가스 윤활 포일 베어링'과 '능동 자기 베어링 시스템'까지 통제 목록에 올랐다.



이런 촘촘한 규제는 베어링이 시장 논리로만 움직이지 않느냐는 뜻이다. 유럽 안보 싱크탱크 OSW에 따르면, 2021년 이후 EU의 '이중 용도(민간과 군사용 모두 쓸 수 있는)' 품목 수출은 가치 기준으로 23% 증가했다. 하지만 물량은 오히려 7% 감소했다. 러시아는 2023년 기준 테이퍼 롤러 베어링 수요의 약 80%를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베어링 확보는 전쟁 수행 능력과 직결된다.풍력 산업의 필수 부품풍력 발전 산업도 '베어링 병목'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 터빈이 거대해질수록 베어링에 요구되는 내구성과 정밀도는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진다. 이를 감당할 공급망은 극도로 제한적이다. 로이터통신이 인용한 세계풍력에너지위원회(GWEC) 데이터에 따르면, 2024년 전 세계 신규 풍력 설치 용량은 117GW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이는 2023년의 116.6GW를 소폭 상회하는 수치다. 육상 풍력이 109GW, 해상 풍력이 8GW를 차지하며 성장세를 이어갔다. 2024년 말 기준 전 세계 누적 풍력 설비는 1136GW에 달했다. GWEC는 UN의 기후 목표 달성을 위해 2030년까지 풍력 설비가 연평균 8.8% 성장해 981GW가 추가될 전망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관련 업체 간 경쟁이 오히려 발목을 잡고 있다는 분석이다. 영국 옥스퍼드 에너지연구소(OIES) 보고서를 통해 유럽 풍력 터빈에 들어가는 '정밀 베어링'이 독일, 스웨덴, 일본, 미국 등 소수 국가의 제조사에 의해 과점 돼 있다고 지적했다. 해상풍력용 대구경 베어링은 전 세계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업체가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제한적이다.

OIES는 유럽 고정식 해상풍력의 자본비용을 kW당 약 2000유로로 추산했다. 이 중 터빈이 차지하는 비중이 33%에 달한다고 분석했다. 하부구조 비용만 kW당 400~500유로인 상황에서 핵심 부품인 메인 베어링의 부족은 전체 프로젝트의 수익성을 위협하는 뇌관이 될 수 있다.



인도도 자국 산업 보호를 명분으로 베어링 공급망을 봉쇄했다. 인도 신재생에너지부(MNRE)는 풍력 터빈 제조 시 블레이드, 기어박스와 함께 '특수 베어링(메인, 피치, 요 베어링)'을 '승인 리스트'에 등재된 업체로부터만 조달하도록 의무화했다.

인도 정부 자료에 따르면, 인도의 풍력 제조 능력은 연간 20GW를 돌파했다. 하지만 핵심 부품의 국산화를 강제하며 글로벌 터빈 제조사들을 압박하고 있다. 인도 규정은 신규 모델에 대해 총 800MW 한도 내에서 2년간만 면제를 허용하거나 이미 입찰 된 프로젝트 중 18개월 내 준공분은 제외하는 등 예외 규정조차 깐깐하게 설정했다. 또한 R&D 센터와 데이터 센터의 인도 내 위치를 의무화하며 베어링이 생성하는 데이터 주권까지 요구하고 나섰다.전기차와 반도체에도 필수전기차 제조에서도 베어링은 필수다. 내연기관차보다 부품 수는 줄었지만, 모터의 고속 회전을 견딜 수 있는 '고성능 베어링' 수요는 오히려 급증했다. 시장조사기관 BMI의 데이터에 따르면, 지난해 글로벌 전기차 등록 대수는 2070만 대에 달했다. 중국은 작년에 1290만 대를 판매하며 전 세계 전기차 생산의 71%를 차지했다.

전기차 모터는 내연기관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회전한다. 고열과 마찰, 전식을 견디는 특수 세라믹 베어링이나 절연 베어링이 필수적이다. 캐나다 정부가 '230만 DN 이상의 고속 베어링'을 통제 리스트에 올린 것도 이런 민군 겸용 고성능 기술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다.

반도체 장비 시장 역시 '초정밀 베어링'이 필수다.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SEMI)는 지난해 글로벌 반도체 장비 매출이 1255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정했다. 정밀 모션 제어가 필수적인 조립·패키징 장비 매출은 지난해 54억 달러를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나노미터 단위의 공정을 수행하는 노광 장비나 식각 장비에는 극한의 정밀도를 가진 베어링이 들어간다. 이 시장은 일본과 유럽의 소수 기업이 독점하고 있다.



베어링의 '구조적 결핍'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예를 들어 미국의 베어링 기업 팀켄의 '엔지니어드 베어링' 부문은 작년 3분기에 매출 7억 6580만 달러로 전년 대비 3.4% 증가했다. 회사 측은 "재생에너지 수요 증가와 가격 인상 덕분"이라고 설명했다. 매출은 늘었지만 물량 증가는 제한적인 '가격 주도형 성장'은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베어링 공급난은 거시경제 지표인 물가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린플레이션'의 가속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핵심 부품인 베어링 가격 상승과 납기 지연은 풍력 발전 단가를 밀어 올리고, 이는 결국 전기요금 인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2024년 전 세계 풍력 발전량 증가율이 7%에 그친다. 2015~2024년 연평균 증가율(14%)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진 것도 부품 공급망 병목과 무관하지 않다는 해석이 나온다. 중국의 풍력 부품 수출이 지난해 40억 달러를 돌파하며 글로벌 시장 지배력을 높였다.

베어링 공급망 위기는 제조업 강국인 한국에게 영향을 미친다. 한국은 반도체, 자동차, 조선 등 베어링을 대량으로 소비하는 산업 포트폴리오를 갖고 있다. 하지만 고정밀·특수 베어링의 상당 부분을 일본과 독일, 스웨덴 등 해외에 의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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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완 기자 kjw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