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목시계용 유리 제조사 동일정공의 박기선 대표는 해마다 2월 10일이 되면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2016년 아무런 손도 쓰지 못하고 북한 개성공단에서 쫓겨 나온 악몽이 떠올라서다. 전 재산이나 마찬가지인 공장 설비를 잃은 그는 결국 2018년 폐업 신고를 했다. 그 대신 정부가 개성공단 입주 피해 기업에 대출해준 3억원으로 경기 안산의 제일C&C라는 조그만 세탁 공장을 인수했다. 매일 오전 1시30분 출근해 모텔 수건과 침구류를 세탁하는 일을 한다.
박 대표는 “수건 한 장 세탁하는 데 150원을 받고 휴일 없이 일해야 하기 때문에 한국 직원은 뽑을 수도 없다”며 “중국 직원에게 300만원씩 월급을 주고 나면 사장인 내가 가져가는 건 70만원뿐”이라고 푸념했다. ◇ 경영난으로 휴·폐업 이어져
8일 개성공단기업협회에 따르면 개성공단에 입주했던 기업 상당수가 경영난에 처한 것으로 나타났다. 입주 기업 124곳 중 40곳이 휴·폐업에 들어갔고 수십 곳은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박병귀 개성공단기업협회 전문위원은 “공식적으로 휴·폐업한 업체만 40개 정도인데 나머지 기업 중에서도 설비를 가동하지 않고 사실상 휴업한 곳이 수십 개에 달한다”고 말했다.
이 기업들이 경쟁력을 잃은 건 개성공단에서 ‘빈손’으로 철수한 영향이 크다. 국내로 돌아와 재기를 노렸지만 피해액 일부만 보전해준 정부 지원금으로는 경쟁력을 갖출 수 없었다. 2013년 첫 번째로 개성공단 가동을 중단한 뒤 이듬해 1호 입주 기업 아라모드가 문을 닫았다. 이어 2016년 개성공단 입주 기업 30여 곳의 완제품을 판매하던 협동조합 ‘개성공단상회’가 폐업했고 제씨콤, SNG 등이 각각 개성에서 하던 인공치아 제조업과 의류업에서 손을 뗐다.
휴업 중인 기업도 수두룩하다. 기념시계 전문 업체 현진정밀공업은 개성공단에 놓고 온 금형만 20억원어치가 넘는다. 원부자재를 일일이 세관에 신고하지 못해 정부 지원액에서 빠진 피해액만 10억원 이상이다. 개성공단 폐쇄 후 국내에서 사업을 재개하려 했지만 기계 구입비가 열 배 이상 비싸져 엄두도 못 냈다. 정지태 현진정밀공업 대표는 “정밀 가공업인 시계 제조는 설비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개성공단 재가동 여부가 어떻게 될지 몰라 일단 휴업 중”이라고 했다. ◇ “정부 지원액은 턱없이 부족”살아남은 기업도 정부 지원 부족으로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스포츠 의류용 소재를 제조하는 금담은 2013년 1차 공단 가동 중단 후 국내외에서 대체 생산을 하느라 7억원을 손해 봤다. 2016년 2차 가동 중단 후에는 유동자산 피해액만 18억원이 넘었지만 이 중 정부가 인정한 금액은 절반도 안 되는 8억5000만원이었다. 권주욱 금담 대표는 “거래처 납품 약속은 지켜야 하니 여기저기서 대체 생산을 했는데 이 손해액은 정부가 인정하지 않고 있다”며 “대체 생산으로 인한 피해액까지 정부가 지원해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의류 제조 업체 만선도 휘청거리고 있다. 이 회사는 개성공단에서 여성복과 학생복을 연간 450만 벌씩 생산했다. 성현상 만선 회장은 “2016년까지 개성공단에 135억원을 투자했는데 감가상각을 이유로 정부는 91억원만 인정해줬다”고 토로했다.
개성공단기업협회는 정부가 기업 손실액을 폭넓게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빚이라도 덜어줘야 해당 기업인들이 연명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인공지능(AI) 시대를 맞아 개성공단 형태의 노동집약적 산업이 경쟁력을 갖추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개성공단 재개 전제조건인 남북 관계 개선과 대북 제재 완화가 쉽지 않고 재가동하더라도 설비는 대부분 녹슬어 쓸 수 없게 됐다. 노민선 중소벤처기업연구원 중소기업정책실장은 “노동집약적 산업은 개성공단에서 인건비를 절감할 수 있겠지만 AI 시대엔 차별화된 접근 전략이 필요하다”며 “북한이라는 특수 상황을 고려하되 최대한 실익을 낼 수 있는 재가동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안산·인천=민지혜 기자 spo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