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으로부터 수임료를 수천만원씩 받고 일하고 있는데, 재판에 필요한 기밀 정보가 쌓여 있는 로펌 사무실을 털어가면 변호사는 뭐가 됩니까?”
변호사-의뢰인 비밀유지권(ACP) 도입을 골자로 한 변호사법 개정안이 지난달 29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자 대한변호사협회를 비롯한 변호사 단체들은 축제 분위기였다. 변호사 업계의 숙원이던 ACP가 국내 최초로 법제화된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김기원 서울지방변호사회 수석부회장은 “변호사가 검찰 등 수사기관과 대등한 운동장 위에서 맞설 수 있도록 하는 최소한의 룰이 이제서야 보장된 셈”이라고 말했다.
◇10년간 이어진 ‘로펌 압수수색’ACP는 변호사의 비밀 유지 ‘의무’ 등을 규정하는 변호사법 26조에 비밀 유지 ‘권한’을 보장하는 26조의2를 신설하는 방식으로 명문화됐다. 변호사가 의뢰인과 공범 관계에 있거나 위법 행위에 관여한 경우 등을 제외하면 사건 대응 과정에서 의뢰인과 주고받은 대화 내용을 공개하지 않을 권리를 보장한다. 미국 등 영미법계 국가에서 통용되던 개념이라 대륙법계인 국내에선 생소한 개념이었다. 변호사 단체가 ACP 도입 필요성을 본격적으로 제기한 건 10년 전부터다.
2016년 8월 서울중앙지방검찰청 특수4부는 롯데그룹 창업주인 고(故) 신격호 명예회장의 6000억원대 조세 포탈 혐의 사건을 수사하며 롯데그룹 자문 로펌인 율촌 사무실을 압수수색했다. 검찰이 로펌에 의뢰인 관련 자료를 강제로 제출받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세종을 제외한 5대 로펌 모두가 압수수색 대상이 됐다. 2018년 서울중앙지검 사법농단수사팀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강제징용 재판 개입 의혹과 관련해 김앤장법률사무소 소속 변호사 2명의 사무실을 압수수색했다. 국내 최대 로펌인 김앤장이 압수수색을 받은 건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김앤장은 2019년에도 가습기 살균제 사건 재수사 과정에서 서울중앙지검의 강제 수사 대상에 올랐다. 2022년에는 대장동 개발 비리 사건 주범 김만배씨를 변호한 태평양 소속 변호사가 검찰에 휴대전화를 압수당하고 참고인으로 소환됐다. 2023년 8월에는 금융감독원 자본시장특별사법경찰(특사경)이 카카오의 SM엔터테인먼트 시세조종 혐의 관련 자문을 제공한 율촌 사무실을 급습해 카카오 측과 주고받은 이메일, 의견서 등을 확보했다. ◇변호사 권한 개선…기업 대응력 강화ACP 도입으로 선진국 대비 낮았던 변호사의 권한과 영향력이 개선될 것으로 기대된다. 미국에선 변호사의 공식 명칭이 ‘officer of the court’로 사실상 법관과 같이 인식된다. 변호사에게는 일부 판사의 허락을 전제로 상대방에 대한 직접 수사권, 증인 소환장 발부권, 증거 제출 요구권 등이 보장된다. 이에 불응하면 법정모독죄로 처벌받을 수 있다.
반면 대륙법계인 한국에선 소송 과정에서 변호사의 역할이 제한적이다. 특히 형사재판에선 검찰의 수사 내용 위주로 재판이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보안이 생명인 로펌에 대한 압수수색이 빈번했다는 건 수사권에 비해 방어권 보장 수준이 현저히 낮았음을 보여준다.
국제 분쟁이 늘어나는 가운데 ACP 도입은 기업의 대응력을 높이는 데도 기여할 전망이다. 과거 삼성·애플 간 특허 분쟁 소송에서 삼성전자는 미국 법원에 “내부 시스템상 일주일마다 이메일이 정기 삭제된다”고 변론했다가 고의 삭제(증거 보존 실패)로 간주돼 불리해진 바 있다. 미국뿐 아니라 대륙법계인 독일·프랑스 등 유럽 일부 국가에서도 ACP는 명문화돼 있다.
법원 영장을 전제한 압수수색과 달리 행정조사를 목적으로 기업에 대한 광범위한 자료 수집을 벌여온 공정거래위원회, 국세청, 금융감독원 등 행정청에 대한 방어권도 확보됐다는 평가다. 한 변호사는 “공정위의 조사불응시 경제제재 등에 대응할 수 있는 수단이 생긴 셈”이라고 말했다. 위법 행위의 고의성을 입증할 증거로 사용될 것을 우려해 컴플라이언스를 소극적으로 수행해온 기업들의 내부통제 수준을 끌어올릴 유인으로도 작용할 전망이다.
장서우 기자 suw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