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가 되지 못한 리플리…페르소나를 훔치는 살인자 되다

입력 2026-02-15 07:00
수정 2026-02-15 07:09
공허한 얼굴 위로 큐 사인이 떨어진다. 초점 없던 눈빛에 생기가 돈다. 종이 위에 죽어있던 대사와 액션은 그를 위한 비스포크 정장이 된다. 누가 집어 가든 상관없다는 듯 마구잡이로 걸려있던 셔츠와 재킷을 꺼내 입었을 뿐인데 어찌 된 일인지 어깨선부터 소매길이까지 완벽하게 맞는다. 삶은 이 순간에만 흘러간다. 그가 특유의 발화와 몸짓으로 창조한 인물이 뿜어내는 생기는 모든 사람에게 전염된다. 사람들이 그를 향해 외친다.

‘신들렸다!’

수많은 사람 앞에서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이와 비슷한 작업을 고요한 공간에서 해내는 사람들이 있다. 때때로 그들도 ‘신들렸다’라는 찬사를 듣기도 한다. 그들은 작가다. 그들은 다양한 인물을 창조해 낸다. 매력적인 주인공뿐만 아니라 머리를 어지럽히는 협잡꾼부터 비밀을 감춘 적대자까지, 다시 말하면 모든 것을 창조해야 한다. 그중에서도 매력적인 살인자를 창조하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이다.

‘리플리는 분명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아니무스야.’ 매력적인 살인자 리플리가 등장하는 영화를 다시 볼 때마다 마치 비밀을 고백하듯 중얼거리곤 한다. 이 사이코패스가 오랫동안 사랑받는 이유는 하이스미스가 어떤 영혼에 빙의했기 때문이 아니라 난 그녀가 글을 쓰며 자신의 안에 잠재되어 있던 인간의 다양한 면모를 스스로 일깨웠기 때문이라고 본다.

‘나는 누군가를 살해하기 직전까지 몰려 본 적이 없지만, 그래도 그것에 대해 쓸 수 있다.’[1]



프루스트는 ‘우리의 사회적 인격은 타인의 생각이 만들어낸 창조물이다.’[2]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 타인과 사회의 기대라는 빛이 비치는 동그란 경계의 밖, 어두운 그림자 속에 잠들어있는 인격, 이것을 더 이상 그림자 인격이나 억눌린 인격이라 말하는 대신 내 삶의 가능성을 일깨우는 잠재된 가능성이라고 말할 순 없을까? 시대에 뒤떨어진 ‘신들렸다.’라는 표현 대신 그 모든 인물은 그 작가와 배우의 내면에 잠들어있었을 뿐이라고 그 혹은 그녀는 단지 그것을 용감하게 밖으로 꺼내 놓았을 뿐이라고 말이다.

‘넌 네가 원하는 무엇이든 될 수 있어’라는 말의 대상이 자산이나 사회적 지위를 향한다면 이 말은 왕좌의 게임의 조프리 같은 인물을 창조하는 훈육 방식이 되겠지만, 그 대상이 인간적 면모와 삶의 태도를 뜻한다면, 사회가 요구하는 타성에 벗어나 내면에서 솟아나는 영혼이 육체에 깃들도록 하는 큐 사인이 될 수도 있다. 한 인간이 세상 모든 걸 다 가질 수는 없을뿐더러 사회의 어느 분야이든 게임의 룰은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유리하도록 되어있기에 새로운 도전자가 발을 들이긴 쉽지 않다. 하지만 그 어떤 순간에도 우리는 삶에 대한 태도를 결정할 수 있다. 마치 집중하기 어려운 촬영 현장에서 생생한 인물을 창조해 내는 배우의 작업과 같다. 자신이 원하는 인물이 되려면 누가 보고 있든 그렇지 않든 간에 딱 맞은 정장을 입은 듯 대사와 액션을 취해야 한다. 또 작가가 하나의 인물을 창조하기 위해 그 인물의 동기와 깊숙한 곳에 내재한 심리를 읽어내는 것처럼 하나의 페르소나를 창조하기 위해서 이는 그 내면에 대한 이해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렇기에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고자 한다면 타인의 페르소나를 훔치는 이 매력적인 살인자 리플리에게 그 방법을 배워볼 필요가 있다.



리플리는 누구인가?

하이스미스는 ‘작가는 자신이 창조한 인물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알고 있어야 하고 스스로 질문에 답할 수도 있어야 한다’[3]라고 말했다. 작가는 책에는 등장하지 않는 그의 과거뿐만 아니라 그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하는 은밀한 행동까지도 알고 있어야 한다. 리플리라는 인물에 대해 이해하려면 겉으로 드러난 그의 모습이나 행위가 아니라 그 출발점, 즉 그의 내면, 동기부터 이해해야 할 것이다.

1. 리플리의 꿈은 배우였다
그의 꿈은 그가 물려받은 돈을 악의적으로 착취한 이모에 의해 무산되었다. 그로 인해 그는 전화사기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는 언젠가는 배우로 성공하겠다는 내적 동기는 매우 강하다. 하지만 많은 영화에서 이 부분이 생략되어 있다. 존 말코비치가 리플리를 연기한 <리플리스 게임(Ripley's Game)>(2002)에서는 스스로 즉흥 연출의 대가라고 말하는 대사가 등장한다.



2. 그의 배우로서의 재능은 특출하다
이 인물의 핵심은 어떠한 인물이든 복사하는 듯한 연기력이다. 큐 사인도 없고, 리허설도 연습도 없지만 그 단 한 번의 무대에서 그 어떤 배우보다도 뛰어난 연기를 보여준다. 독백을 통해 자신의 범죄행각을 연기라고 말하는 그는 마치 산다는 건 그저 그 배역을 삶이라는 무대 위에 펼치는 것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가 훔치는 것은 타인의 신분이지만 그는 예리한 관찰력으로 다른 인물의 내면을 꿰뚫어 보고 그 인물 그 자체가 된다. 다르게 말하면 그는 페르소나를 훔친다.

3. 그는 부자로 태어난 디키와 프레디가 부럽다
배우가 되지 못한 그는 재능도 노력도 없으면서 화가나 작가라고 말하며 방탕한 삶을 살아가는 디키와 프레디를 보고 질투를 느낀다. 디키에게는 감정도 있지만 그 감정보다 그런 삶에 대한 시기심이 더 강하다.

4. 그는 범죄를 저지르지만 지독한 인간은 아니다
소설을 읽다 보면 리플리는 사이코패스라기보다 자신의 강력한 내적 동기로 살인을 저지르는 인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의 안에서 반복되는 근원적 감정은 불안이다. 물론 살인이 반복되며 점차 전형적인 사이코패스로 변해간다.

그의 악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그가 매력적인 주인공인 것은 이런 열망이 누구에게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 하지만 세상에는 분명 디키와 프레디처럼 사는 사람들이 있다. 아마 누구나 기회가 주어진다면 매일 아침 억지로 일어나 출근하는 대신 디키처럼 그림을 그리거나 프레디처럼 글을 쓸 것이다. 형편없는 재능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두 사람은 톰이 살아 보지 못한 평범한 하루를 완벽히 즐기고 있었다. 디키가 뭐 하러 풀 먹인 셔츠를 입고 전철과 택시에 시달리며 출퇴근하면서 9시부터 5시까지 회사에 매여 살겠는가?”

리플리의 그 동기는 많은 사람들의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다. 다만 그는 내적 열망이 너무나 강해 선을 넘었을 뿐이다. 왜 악인이 주인공인가라는 의문이 든다면 그 인물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동기를 살펴보아야 한다. 영화의 주인공이 악인이라고 해서 그 주인공처럼 범죄를 저지르라는 것은 아니다. 뛰어난 작가는 이렇게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 숨겨진 어두운 측면을 읽어내고, 그것을 이런 복잡한 면모를 지닌 가공의 인물을 통해 사람들에게 드러낸다.



퍼트리샤 하이스미스가 인물을 보여주는 방식

퍼트리샤 하이스미스는 섬세한 심리묘사로 유명한 작가 중 한 명이지만 일일이 읽어주는 타입은 아니다. 그녀는 읽어주기보다는 보여준다. 다음 문장은 리플리가 디키를 찾으러 뉴욕을 떠날 때의 묘사다.

“무대 위에 골판지로 지어진 세트처럼 뉴욕이란 도시 전체가 폭삭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4]

리플리는 배우다. 그러니 리플리가 살아가는 도시도 사실은 세트장이며 특정한 조건만 주어진다면 충분히 주저앉을 것이다. 거짓말과 꾸며낸 모습으로 유럽에 가게 되지만 마음속으로는 그 모든 것이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하이스미스는 뉴욕을 골판지로 지어진 무대에 비유하며 리플리의 심리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디키와 마지의 키스 장면을 본 순간에도 이어진다.

“디키의 책상에 있는 지우개를 몇 개 더 챙기고, 펜촉, 훈연 스틱, 목탄, 파스텔 조각을 주섬주섬 집은 다음, 방구석이나 창밖으로 차례차례 집어 던졌다.”

우리는 배우의 연기를 볼 때 얼굴과 대사에 집중하지만 배우의 연기력을 논하려면 배우의 손과 발을 보아야 한다. 뛰어난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들은 이 손과 발에서 더 큰 차이가 난다.

하이스미스가 인물을 보여주는 것처럼 뛰어난 배우들도 때때로 손과 발로 어깨의 각도와 같은 섬세한 몸 연기로 불안과 같은 심리를 보여준다.



텍스트가 아닌 서브 텍스트를 읽어라

영화에는 서브 텍스트라는 개념이 있다. 즉 배우가 발화하는 대사가 텍스트라면 그 대사를 통해 이뤄지는 액션이 서브 텍스트다. 영상 언어를 제대로 읽어내려면 이런 서브 텍스트를 읽는 법을 배워야 한다. 또 이것은 좋은 영화와 나쁜 영화를 구별해 내는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대체로 나쁜 영화의 대사에는 서브 텍스트가 없다. 말장난이나 방언으로 웃기는 데에 집중하거나 그럴듯하게 있어 보이는 문장으로 힘을 준 공허한 문장이 주를 이룬다.

반면 좋은 영화들은 가장 단순하고 일상적인 대사에 맥락과 연출로 의미를 부여한다. 어떤 영화들은 평범한 대사로도 깊은 울림을 만들어 낸다. 그런 단순한 언어를 강력한 액션으로 탈바꿈하는 것이 바로 서브 텍스트다. 이는 주인공이 독백인 내레이션에도 마찬가지다. 만약 어떤 영화가 ‘지금부터 나한테 일어난 일을 전부 말해주겠어.’라는 식으로 주인공의 내면을 일일이 읽어주고 있다면 나쁜 영화일 가능성이 높다. 좋은 시나리오의 독백에는 그 독백조차 서브 텍스트가 숨어있어 실제 행동과 상반되는 역설적 독백인 경우가 더 많다. 예를 들어 사무엘 베케트의 부조리극 <해피 데이즈>의 주인공 위니가 ‘오늘도 정말 행복한 날이에요.’라고 하루를 시작하지만 그녀의 소지품에 그녀의 어둠과 상실을 드러내는 물건이 숨어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진짜 좋은 이야기는 있는 그대로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 이야기의 끝에 알게 되는 반전이나 숨겨진 진실처럼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아주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다.



언제부턴가 문해력에 대해서 많이 말하지만 그 대상은 한정적이다. 진짜 세상을 읽어내는 이해력은 사물들 속에서도 또 우리의 몸짓에서도 언어를 발견한다. 한국에서 연기는 예쁘고 잘생긴 사람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인지 성장 과정에서 연극과 같이 몸을 움직여 배울 수 있는 영역은 등한시된다. 가공의 인물을 연기하려면 먼저 그 인물의 모든 것을 읽어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육체 위에 다시 그 인물을 써 내려야 한다. 이런 과정에서 단지 텍스트를 읽어서는 배울 수 없는 타인과 사회에 대한 진정한 공감 능력을 배울 수 있다. 내가 원하는 내가 되기 위해서 타인의 신분을 훔칠 필요도, 누군가를 죽일 필요도 없다. 그저 이 리플리처럼 복잡한 인물의 서브 텍스트를 읽어내는 법을 배우면 된다. 그것이 바로 세상이라는 백지 위에 내가 원하는 모습의 나를 써나가는 방법이다.

박정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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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1]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긴장감 넘치는 글쓰기를 위한 아이디어>, 송기철 옮김, 북스피어, 2020
[2]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김희영 옮김, 민음사, 2012
[3]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긴장감 넘치는 글쓰기를 위한 아이디어>, 송기철 옮김, 북스피어, 2020
[4]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재능 있는 리플리씨>, 김미정 옮김, 을유문화사,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