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일부 글로벌 시장이 이른바 ‘이중 가격 경제’로 재편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지정학적 상황과 관련 제재 준수 여부 등에 따라 이분화된 글로벌 경제 규모가 커지면서다. 예를 들어 미국과 유럽연합(EU) 등이 주도하는 '화이트 마켓'에서는 엄격한 탄소 규제와 공급망 실사 의무가 부과로 '비싼 가격'이 통용된다. 반면 서방의 제재 감시망을 벗어난 '그레이마켓'에서는 제재 리스크를 감수한 대가로 큰 폭의 할인이 적용된 자원들이 유통된다. 중국의 글로벌 결제망 부상9일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애틀랜틱 카운슬의 분석 자료를 인용해 중국이 주도한 CBDC(중앙은행 디지털화폐) 기반 국경 간 결제 플랫폼인 ‘mBridge(엠브리지)’ 프로젝트 통한 누적 결제액은 555억 달러(약 77조 원)를 넘어섰다. 엠브리지는 기존 글로벌 금융망인 SWIFT(국제은행간통신협회) 방식 등을 배제하고 무력화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중 가격 경제’의 확산의 요인 중 하나로 꼽힌다.
엠브리지는 프로젝트 초기였던 2022년보다 2500배 거래량이 급증했다. 국제결제은행(BIS)이 2024년 정치적 중립성 훼손 우려를 이유로 해당 프로젝트에서 철수했지만 중국 인민은행과 UAE, 태국, 사우디아라비아 등 참여국들이 독자적으로 엠브리지 시스템을 완성했다.
엠브리지 시스템에서 전체 거래의 약 95%가 디지털 위안화(e-CNY)로 이루어진다. 달러 없는 무역 결제가 기술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했다는 분석이다. 이는 '그레이마켓'의 자금줄이 서방의 감시망 밖에서 안전하게 흐를 수 있는 '금융 고속도로'가 뚫렸다는 해석도 있다.
서방 제재의 가장 강력한 무기였던 '달러 결제망 차단'은 역설적으로 대안 결제망의 고도화로 이어졌다. 그 중심에 중국 주도의 엠브리지와 CIPS가 있다. 엠브리지는 석유와 가스 등 대규모 원자재 대금 결제의 핵심 우회로로 자리 잡았다. UAE가 2024년 디지털 디르함으로 첫 국경 간 송금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중동의 오일머니가 SWIFT 망을 거치지 않고 아시아로 직행하는 길이 열렸다는 평가다.
사우디아라비아 역시 이 프로젝트에 깊숙이 관여하며 '페트로 달러' 체제에 균열을 냈다. 이 망을 통하면 거래 수수료가 기존 SWIFT보다 크게 감소한다. 거래 내역은 미국 재무부의 감시망에 포착되지 않는다.
중국의 독자 결제망인 CIPS(국경간 위안화 지급시스템)는 2024년 연간 처리액 175조 위안으로 추정된다. 전 세계 180개국 금융기관과 연결된 이 망을 통해 러시아와 중국 간 무역 결제의 95% 이상이 루블화와 위안화로 처리되고 있다. 러시아 기업들은 달러 계좌가 동결될 위험 없이 중국산 공작기계와 반도체를 수입하고, 중국은 러시아산 에너지를 위안화로 결제한다. '유령 선단' 증가각종 에너지 관련 원자재를 실어 나르는 물류망도 '백색 해운'과 '흑색 해운'으로 갈라졌다. 서방의 해운 제재와 가격상한제를 피하기 위해 국적을 세탁하고 위치 신호를 끄고 달리는 '유령 선단'이 늘었다. S&P 글로벌과 글로벌 에너지 원자재 분석업체 케이플러 등에 따르면 올해 초 기준 제재 대상 원유와 가스를 운송하는 '유령 선단'은 3313척 이상으로 집계됐다.
이는 전 세계 유조선 선복량의 약 18.5%를 차지하는 규모다. 2022년 100척 수준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4년 만에 30배 이상 급증한 것이다. 전 세계 바다를 떠다니는 유조선 5척 중 1척은 위치 신호를 끄고 유령처럼 움직이는 배인 셈이다.
이들 선박은 '무보험'으로 다니지도 않는다. 러시아와 중국, 인도의 국영 보험사가 제공하는 대체 보험에 가입하고, 자체적인 선급 인증까지 받는다. 공해상에서 배를 맞대고 화물을 옮겨 싣는 'Ship-to-Ship(STS)' 환적 기술은 고도화된 매뉴얼에 따라 이루어진다. 위성 감시를 피하기 위해 위치 정보를 조작하는 '스푸핑' 기술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이에 따라 가장 큰 가격 격차가 벌어진 곳은 에너지 관련 원자재 시장이다. 서방의 제재로 유럽과 미국 판로가 막힌 러시아, 이란, 베네수엘라산 자원은 중국과 인도 등으로 헐값에 흘러 들어가고 있다. 작년 하반기부터 러시아 노바텍의 '아틱 LNG 2' 프로젝트는 미국의 강력한 제재 대상이다. 하지만 최근 이곳에서 생산된 LNG 물량은 아시아 현물 벤치마크 가격 대비 30~40% 할인된 가격에 중국 바이어들에게 공급되고 있다.
올 1월 기준, 아시아 LNG 벤치마크 가격이 MMBtu당 11달러 선일 때, 제재 대상인 러시아산 LNG는 7~8달러에 거래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에너지 다소비 업종인 중국의 석유화학 및 철강 기업들에게 원가 절감 효과를 제공한다.
러시아산 대표 유종인 우랄유와 국제 유가 기준인 브렌트유 간의 가격 차이는 최근 배럴당 10~15달러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중국과 인도의 정유사들은 이 값싼 원유를 대량으로 사들여 정제한 뒤, 디젤과 휘발유로 가공해 내수 시장에 공급하거나 원산지를 세탁해 글로벌 시장에 재수출하며 정제 마진을 얻고 있다.
금속 시장에서는 구리 가격 차이가 벌어지고 있다. 런던금속거래소(LME)에 등록되지 않은 콩고(DRC)산 비등록 구리는 성분상으로는 LME 등록 제품(순도 99.99%)과 거의 차이가 없다. 하지만 ESG 인증이나 거래소 등록비용이 빠져 가격이 더 싸다. 중국의 정제 구리 수입 중 'EQ(고급) 구리' 물량 비중은 67.54%에 달했다. EQ 구리는 LME 등록 구리보다 톤당 50~80달러 저렴하게 거래된다. 탈미국의 한계'유령 선단'의 악영향은 적지 않다는 분석이다. '유령 선단'은 대부분 선령 20년 이상의 폐선 직전 노후 유조선이다. 정비 상태가 대부분 불량하다. 사고가 발생할 경우 보험 처리가 어렵고 사고 해역의 연안국이나 수입국이 수조 원에 달하는 환경 정화 비용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한다. 매튜 라이트 케이플러 수석 분석가는 "'유령 선단'은 규제의 사각지대에서 운항하는 '좀비 선단'"이라며 "낮은 운송비는 안전을 담보로 한 위험한 도박이며, 사고 시 그 비용은 전 세계가 치르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엠프리지와 CIPS도 한계가 명확하다. 여전히 달러 기반의 SWIFT 시스템의 처리량에 비하면 작다. 위안화나 루블화 결제는 태환성 제한과 환율 변동성 리스크도 크다. 거래 당사자들에게 또 다른 금융 비용을 발생시킨다. 또한 정치적 상황에 따라 자금이 동결되거나 시스템 오류로 결제가 실패할 위험도 있다. '싸게 샀지만, 돈을 보내는 데 드는 숨겨진 비용과 환차손을 고려하면 실제 할인 폭은 줄어든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레이마켓 자원을 사용한 제품은 서방 시장 수출이 원천 봉쇄될 위험도 있다. 미국과 EU는 제재 우회 거래에 관여한 제3국 기업에 대해서도 '세컨더리 보이콧(2차 제재)'을 가할 수 있다. 지난달 미 재무부가 제재 대상 선박 9척을 추가 지정하자, 해당 선박에 실려 있던 화물의 소유권 분쟁이 발생하며 화주들이 막대한 금전적 손해를 입기도 했다. 싼 원료를 쓰려다 주력 시장인 미국과 유럽에서 영구 퇴출당할 수 있다는 우려도 여전하다.
거시경제적 관점에서 이중 가격 경제의 고착화는 '글로벌 인플레이션의 파편화'로 이어질 수 있다. 시장이 쪼개지면서 물가 압력도 국가별, 블록별로 다르게 작용한다. 미국, 유럽, 한국 등은 '그린플레이션'과 '제재 인플레이션'이 겹치며 구조적인 고물가 압력에 시달릴 수 있다. 친환경 에너지 전환 비용에 더해, 깨끗하고 투명한 공급망을 유지하기 위한 '안보 프리미엄'이 물가에 반영된다. 중앙은행의 금리 인하 여력을 제한하고, 기업의 투자를 위축시키는 요인이다.
반면 그레이마켓의 중국 등은 저가 에너지와 원자재를 흡수하며 생산 비용을 낮추는 '그레이 디플레이션' 효과를 누린다. 단기적으로 이들 국가의 제조업 수출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글로벌 공급망의 파편화를 가속해 전 세계적인 자원 배분의 비효율을 초래한다.
국제통화기금(IMF)의 피에르 올리비에 구린샤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지경학적 파편화는 이제 이론적 경고가 아닌 현실의 데이터"라며 "원자재 무역의 블록화는 글로벌 인플레이션의 변동성을 키우는 상수가 됐다"고 평가했다. IMF는 이런 분절화가 지속될 경우 장기적으로 전 세계 GDP의 최대 7%가 감소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런 글로벌 지형 변화는 수출 주도형 국가인 한국 경제에 큰 위협이다. 한국은 미국과 EU가 주도하는 '준수 권역'의 모범적인 국가 중 하나다. 하지만 그 대가로 한국 제조업은 '구조적 고비용 함수'라는 덫에 갇혔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의 주력 산업인 반도체, 배터리, 석유화학, 철강, 조선은 모두 에너지를 많이 쓰고 원자재 의존도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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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완 기자 kjw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