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러시아 간 마지막 남은 핵무기 통제 조약인 ‘뉴스타트’(신전략무기감축협정)가 5일(현지 시간) 종료됐다. 전 세계 핵무기의 90%를 보유한 미·러(옛 소련 포함)가 1972년 전략무기제한협정(SALT1) 이후 다양한 이름으로 유지해온 ‘핵 안전판’이 54년 만에 사라진 것이다. 핵무기 보유국 간 군비 경쟁이 가열되고 북한 비핵화도 힘들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美, 中 포함 새 협정 추진
뉴스타트는 2011년 발효된 협정이다. 미국과 러시아가 전략 핵탄두를 각각 1550기, 핵탄두 운반 수단인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전략폭격기 수를 700기 이하로 제한하는 게 핵심이다. 미·러가 핵무기 데이터를 통보하고 현장 검사 등 투명성을 확보하는 조치도 협정에 포함돼 있다.
뉴스타트 종료를 앞두고 러시아는 미국에 협정을 1년 더 연장하자고 제안했지만 도널드 트럼프 정부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세르게이 럅코프 러시아 외무차관은 “상대방(미국)은 이를 검토할 시간이 충분하다”며 “답변이 없다는 것이 답변”이라고 타스통신에 밝혔다.
미국이 원하는 것은 중국이 참여하는 새 협정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뉴욕타임스(NYT) 인터뷰에서 “더 나은 합의를 하겠다”며 “선수 두엇이 더 관여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도 전날 기자회견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을 포함하지 않고는 21세기 진정한 군비 통제를 이루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분명히 밝혔다”고 했다.
스톡홀름국제평화문제연구소에 따르면 중국 핵무기는 현재 최소 600기다. 2011년 240기에서 급증했다. 5459기를 가진 러시아(실전 배치 1718기)와 5177기를 보유한 미국(실전 배치 1670기)보다는 적지만 2023년 이후 매년 약 100기씩 늘어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작년 2월 기자회견에서 “중국이 5~6년 내 핵 능력에서 미국에 근접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미국 전쟁부(국방부)는 중국이 2030년까지 핵탄두 1000기 이상을 보유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위험한 군비 경쟁 우려미·러가 핵무기 통제 협정을 맺은 것은 1972년 SALT1부터다. 이후 중거리핵전력조약, 전략무기감축협정(스타트) 등 다양한 핵무기 통제 조약이 이어졌고 마지막 남은 핵 군축 협정이 뉴스타트였다. 뉴스타트 종료는 미·러 간 핵무기 통제 협력이 끝났다는 뜻이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국제 평화와 안보에 중대한 위기”라며 신속한 후속 협정 체결을 촉구했다.
대릴 킴볼 군비통제협회(ACA) 회장은 AP통신에 “양측은 조약이 만료되면서 각자 핵무기를 늘릴 수 있는 순간에 도달했다”며 “미국·러시아·중국 3국이 위험한 군비 경쟁을 벌일 가능성이 열릴 것”이라고 우려했다. 특히 중국에 대한 핵무기 감시 체계가 작동하지 않고 있는 만큼 미국과 러시아가 중국보다 훨씬 더 큰 규모로 핵무기를 늘릴 가능성도 있다.
러시아 외무부는 전날 뉴스타트 종료를 선언하며 “뉴스타트 당사국들이 더는 어떠한 의무나 대칭적 선언에 구속되지 않으며, 원칙적으로 다음 조치를 (스스로) 선택할 자유가 있다고 가정한다”고 밝혔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전쟁 등의 안보 이익을 위해 “러시아가 모든 수단을 쓸 수 있다”고 위협하며 2024년 핵무기 사용 기준을 낮췄다. 미국과 러시아의 핵무기 통제가 사라지면 한반도에서 북한의 핵 위협이 커지고 북한 비핵화가 더 어려워질 수 있다. ◇북한 핵 위협 커질 수도중국이 참여하는 새 핵무기 협정이 체결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중국을 끌어낼 만한 카드가 마땅치 않다. 유리 우샤코프 러시아 외교정책보좌관은 푸틴 대통령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협정 만료 문제를 논의했다고 전했지만 중국이 참여할 수 있다는 신호는 보내지 않았다.
중국은 미국과 러시아가 알아서 할 일이라며 자신들은 참여할 의지가 없다고 명확하게 선을 그었다. 중국 외교부는 전날 “중국과 미국의 핵 전력은 전혀 동등한 수준이 아니며, 현 단계에서 군축 협상 참여를 요구하는 것은 공정하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다”고 말했다. 미국이 핵 군축 대상을 확대하면 러시아는 영국, 프랑스 등 다른 서방 핵무기 보유국까지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트럼프 정부가 제안한 ‘골든돔’(미사일 방어 체계)과 핵실험 재개 계획, 러시아가 개발하는 핵 추진 순항미사일이나 핵 추진 장거리 어뢰 같은 비전통적 핵무기 등장도 군비 경쟁을 부추기는 요인이다. 단순한 핵탄두 수 제한만으로는 상대방에 대한 충분한 억지력을 갖췄다고 자신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린 러스턴 유럽정책분석센터(CEPA) 연구원은 “사이버 기술과 인공지능(AI) 등 신기술로 핵무기에 관한 오판이나 오작동 위험이 커졌다”며 “우크라이나 사태와 미국 안보 신뢰 약화로 스웨덴 등 기존 비핵무장 국가도 핵무장을 고려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워싱턴=이상은 특파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