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보다 캔버스 앞이 먼저였다"…장르를 유영하는 백현진의 서울

입력 2026-02-05 17:04
수정 2026-02-05 17:26


하얗게 불태운 열정에는 무기력함이 뒤따른다. 열렬히 집중할수록 번 아웃을 더 잘 겪게 되는 이유다. 모든 에너지를 소진하고 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처럼 느껴지지지만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없는 편이 더 나을 때도 있다. 백현진 작가가 이번에 선보이는 작품도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지금 서울 강남구 PKM갤러리 분관에서 진행 중인 작가의 개인전 ‘Seoul Syntax(서울식)’은 최근 백 작가가 경험한 감정선을 만날 수 있는 자리다. 장지 페인팅과 드로잉, 비디오 근작 30여 점의 작품에 서울토박이 작가의 눈에 비친 서울의 풍경을 담았다.



백현진은 전방위 예술가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작가다. 그는 미술가이자 연기자, 음악가로 활동해 왔다. 지금은 대중에게 배우로 가장 친숙하지만, 스크린보다 캔버스 앞에 더 먼저 섰다. 홍익대학교 조소과에서 공부하던 그는 현재 이날치밴드의 수장인 장영규를 만나 1세대 인디밴드로 활동했다. 길거리에서 버스킹을 하다 영화 감독들의 눈에 띄게 되면서 영화 음악을 담당하게 됐고, 연기도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시작하게 됐다. 장영규과 함께 영화 <복수는 나의 것>, <미쓰 홍당무> 등의 음악 감독으로 참여한 이력도 있다.




이렇게 전시장과 무대, 스크린 등을 종횡무진하며 달려 온 그가 번 아웃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평소와 달리 자신이 가진 에너지의 총량 이상으로 일해 온 작가는 재작년 북유럽을 방문해 마주한 풍경에 이유 모를 우울감을 느꼈다. 이 감정은 작품에 변화를 가져왔다. 캔버스에 밀도감을 두껍게 쌓아 올렸던 그의 기존 작품과 달리 이번 전시에 소개된 작품들에는 여백이 생겼다. 여기에는 이전과는 달리 덜어내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작가의 바람도 담겼다.




대다수의 작업은 한지를 여러 겹 겹쳐 만든 대형 장지 위에 페인팅했다. 작가와 함께 이번 전시를 기획한 장예란 PKM 갤러리 전시팀장은 “작가가 2,3년 전부터 사용해오고 있는 장지는 작가가 자신과 가장 잘 맞는 재료라고 여겨 사용하는 재료”라며 “물감을 흡수하는 형태나 여백을 남김으로써 드러나는 미감 등의 분위기가 작가에게 편안하게 다가왔다는 점이 장지를 사용하는 가장 큰 이유”라고 설명했다.

장지 작업 외에도 일기처럼 연도와 순번을 매겨 기록한 ‘PW’ 드로잉 연작과 영상 작업이 함께 소개된다. 작가가 선보인 음악 ‘빛 23’의 뮤직비디오이기도 한 영상작업은 영화 ‘미나리’ 의 한예리 배우와 영화 ‘기생충’의 홍경표 촬영 감독이 원테이크 기법으로 담았다. 백현진 작가가 작사와 작곡, 보컬, 신디사이저를 맡은 노래를 배경으로, 배우 한예리가 길을 걸으며 인간의 희로애락을 표현했다. 전시는 3월 21일까지.

강은영 기자 qboo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