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에너지도 ‘Made in KOREA’”…코스피 5000 시대를 연 K제조업의 힘

입력 2026-02-09 07:08
수정 2026-02-09 07:09
[커버스토리]




코스피 5000 시대는 한국 경제가 추격자에서 선도자로 체질을 바꾼 결과물이다. 지정학적 불확실성이 상수가 된 세계에서 한국은 민주주의 진영이 신뢰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제조 기지다.

반도체 이후 조선·방산·우주·원전·배터리 5대 핵심 산업은 단순 수출품을 넘어 글로벌 경제의 전략적 솔루션으로 진화했다. 수만 개 부품을 통제하는 조선·방산 기술, 민간 주도 우주산업, 전기차·ESS·로봇용 배터리 다변화, 디지털트윈과 로봇 자동화로 무장한 첨단 제조와 원전 기술이 그 예다.

한국의 5대 산업은 단기 실적을 넘어 전략적 가치와 기술 축적, 시장 선점을 동시에 이루며 경제의 ‘딥 사이클’을 견인하고 있다.

① 방산
역공학에서 독자 설계까지, K방산 50년의 도약

K방산의 출발점은 1970년대 ‘선택지가 없던 시대’였다. 당시 우리 군의 주력 소총 M16을 국산화하기 위해 미국 콜트사로 파견된 27명의 이른바 ‘도미(渡美) 기사’들이 그 시작이다.

6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선발된 이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영어와 정밀 기계 기술을 익혔다. 설계도조차 제대로 없는 상황에서 완제품을 분해해 치수를 재고 다시 도면을 그리는 역엔지니어링(Reverse Engineering)이 유일한 해법이었다.

노트를 손으로 적어가며 체득한 이 기술은 부산 조병창을 거쳐 소총 국산화로 이어졌다. 이들의 성과는 단순한 무기 복제를 넘어 정밀 기계공업의 기초를 쌓았다는 데 의미가 있다. ‘뜯고, 재고, 다시 만드는’ 반복의 축적은 훗날 K2 전차와 K9 자주포라는 세계적 무기체계를 탄생시킨 토양이 됐다.









현재 K방산은 역엔지니어링 단계를 넘어 지형과 작전 환경에 최적화된 독자 설계 능력을 확보했다. 나아가 비인가자의 분석을 차단하는 ‘안티-탬퍼링(Anti-tampering)’ 기술까지 적용하며 기술 보호 단계로 진입했다.

2025년은 K방산이 양적 성장에서 질적 완성으로 넘어선 분기점이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 현대로템, LIG넥스원, 한국항공우주산업(KAI) 등 방산 ‘빅4’의 합산 매출은 사상 처음으로 40조원을 돌파했다. 매출 약 40조9000억원, 영업이익은 5조2000억원대 초중반으로 시장 컨센서스를 웃돌며 ‘영업이익 5조 시대’를 열었다.

김홍유 경희대 경영대학원 교수(한국방위산업협회 정책위원)는 “방산은 정부가 키운다고 크는 산업이 아니다. 지금의 성과는 한화의 레드백 장갑차 사례처럼 민간 기업이 목숨 걸고 선제 투자해 만든 결과물”이라고 평가했다.

수출 확대는 수익성 개선으로 직결됐다. 방산 빅4의 합산 수주잔고는 100조원에 육박한다. 향후 4~5년 치 일감을 이미 확보한 셈으로 단기 호황이 아닌 구조적 성장 국면에 진입했음을 보여준다.





업계에서는 이러한 흐름이 2026년까지 이어지며 영업이익이 6조원대 중후반으로 확대될 가능성도 거론한다. 방산 수출은 2023~2024년의 조정 국면을 지나 2025년 뚜렷한 반등에 성공했다. 수출액은 정부 목표치인 200억 달러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글로벌 무기 수출 점유율은 과거 2.2%에서 6.5%로 뛰어오르며 ‘주요 공급국’ 반열에 올랐다.

K방산의 활동 무대는 빠르게 확장되고 있다. 유럽에서는 폴란드에 이어 루마니아가 K9 자주포와 K10 탄약운반차를 도입하며 핵심 시장으로 부상했다. 중동에서는 사우디아라비아와 UAE를 중심으로 ‘천궁-II’ 등 고부가가치 유도무기와 MRO(운영·유지·보수) 시장이 형성되고 있다.

중남미에서는 페루와 체결한 함정·장갑차 계약이 한국 방산 역사상 최대 규모로 새로운 교두보를 마련했다. 특히 최근 노르웨이의 천무 수출은 단발성 성과를 넘어선다.

김 교수는 “유럽이 한국을 신뢰하기 시작했다는 증거”라며 “미국과 유럽 등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동맹국 사이의 안보 균열 틈새에서 한국이 ‘공백을 메울 수 있는 유일한 전략적 파트너’라는 인식을 심어준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다음 무대로 캐나다를 지목했다. 60조원 규모로 거론되는 캐나다 잠수함 사업은 K방산이 해군 무기 체계 시장 전반으로 확장할 수 있을지를 가늠할 시험대다.

김 교수는 “캐나다는 단순 성능이 아니라 전략적 균형을 본다”며 “미국이 그린란드 문제를 거론하는 등 인접국을 압박하는 상황에서 캐나다가 전략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대안이 한국”이라고 설명했다.

투자 시장의 시선도 달라졌다. 방산주는 더 이상 단기 테마가 아니다. 주요 4사의 수주잔고는 2020년 21조6000억원에서 2025년 100조원 규모로 급증했다. ‘TIGER 방산’ 등 관련 ETF 수익률도 이를 반영하고 있다. 방산은 이제 확정된 수주잔고라는 실적을 기반으로 코스피 5000 시대를 견인하는 주도 업종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② 조선
기후 위기와 기술 격차가 만든 반등…암흑기 견딘 K조선의 반전

한국 조선업은 장기 침체의 터널을 지나 다시 초호황 국면에 진입했다. 거제·울산 조선소 도크는 향후 4년 치 수주 물량으로 풀가동 상태다.

2010년대 중반 대규모 적자와 수주 절벽으로 구조조정의 상징이 됐던 조선업이 재도약 국면에 들어섰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번 반등은 단기 호황이라기보다 수요 구조 변화와 기술 포지셔닝이 맞물린 결과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조선업을 둘러싼 글로벌 환경이 친환경 규제 강화, 지정학적 리스크 확대, 기술 경쟁 심화로 재편되면서 한국 조선업이 상대적 우위를 확보했다는 것이다.

부활의 1차 동력은 친환경 선박이다. 국제해사기구(IMO)의 탄소 규제 강화로 노후 선박 교체 수요가 빠르게 늘면서 액화천연가스(LNG)·암모니아 추진선 등 고부가가치 선종이 시장의 중심으로 이동했다. 이 분야에서 한국 조선사는 기술 난도가 높은 선종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국가로 꼽힌다.

양종서 한국수출입은행 수석연구위원(서울대 조선해양공학과 객원교수)은 “이번 조선 호황은 슈퍼사이클이라기보다, 기후·지정학이 만든 복합적 파동”이라며 “기후변화 대응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친환경 선박 수요가 지속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는 단순 물량 경쟁이 아닌 기술 기반 수주 구조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이러한 기술 중심 전략은 조선소 현장의 변화로 이어지고 있다. 숙련 인력 부족이 구조적 문제로 자리 잡은 가운데 주요 조선사는 자동화·디지털전환에 속도를 내고 있다. 로봇 용접, AI 기반 공정 관리, 크레인 동선 최적화 등 ‘스마트 야드’ 구축이 대표적이다.

HD현대 계열사 아비커스 사례에서 보듯 조선업은 단순 제조를 넘어 해상 모빌리티와 소프트웨어를 결합한 산업으로 확장되고 있다.

또 하나의 배경은 한·중·일 조선업 경쟁 구도의 변화다. 1980~90년대 세계 1위를 지켰던 일본 조선업은 고비용 구조와 기술 투자 정체로 경쟁력을 잃었고 중국은 대규모 물량을 앞세워 벌크선·탱커 등 저부가 시장을 장악했지만 고난도 선종에서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1970년대 ‘무에서 유를 창조’하며 조선업을 일군 한국은 이 틈새에서 친환경·방산·디지털 기술을 결합한 고부가 전략으로 주도권을 확보했고 미·중 갈등과 동맹 재편이라는 지정학적 변화는 이를 구조적 기회로 바꾸고 있다는 평가다.

하지만 이 같은 상선 중심 구조는 사이클 산업이라는 한계가 분명하다. 이를 보완하는 축으로 해양 방산이 부상하고 있다.

함정·잠수함 등 군수 분야는 상선과 달리 경기 변동성이 낮고 계약 기간이 길어 수익 안정성이 높다. 방산 물량이 일정 수준 유지될 경우 불황기에도 무리한 저가 수주를 피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안전판’ 역할을 한다고 분석한다.

권효재 COR에너지인사이트 대표는 “조선소 매출의 70~80%를 차지하는 상선은 10년을 보면 3년 호황, 7년 불황인 산업”이라며 방산 확대가 변동성을 완화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16년간 조선 현장을 직접 경험한 군함 엔지니어이자 전략가로 최근 ‘K-조선 대전환 조선업의 태동부터 마스가 프로젝트까지’를 출간했다.

그는 “방산은 사이클이 거의 없고 한 번 계약하면 보통 10년 이상 이어진다”며 “불황기에도 수익성과 체질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캐나다 잠수함 프로젝트(CPSP)와 한·미 조선업 협력(MASGA·마스가)은 한국 조선업의 해양 방산 역량과 북미 시장 진입 가능성을 가늠할 분수령으로 꼽힌다. 다만 실제 성과는 미국·캐나다의 제도와 조달 구조 변화 등 외부 변수에 좌우될 전망이다.

전문가들은 이번 호황이 전환점인 것은 분명하지만 장기적 지속 가능성에 대해서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LNG선 등 고부가 선종은 수익성이 높지만 시장 비중은 제한적이고 벌크선·탱커 등 대형 물량 시장에서는 중국의 우위가 여전하다.

양 위원은 “고부가 선종만으로 산업 전체 규모를 유지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미·중 갈등에 따른 반사이익과 미국과의 조선 협력 역시 구조적 경쟁력으로 안착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권 대표는 “미국에서 배를 제대로 만들려면 법과 규제, 조달 시스템이 바뀌어야 한다”며 “조선업 이해도가 높은 민간 전문가 중심의 전담 독립기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변화는 시작됐지만 성과의 지속성은 정책과 전략에 달려 있다는 평가다.




③ 원전
‘고사 위기’ 딛고 일어선 K원전…AI 시대 국가 인프라의 중심으로

체코 신규 원전 수주로 세계 최고 수준의 시공 능력을 다시 한번 입증한 K원전이 국내 에너지 정책의 중심으로 복귀하고 있다. 해외에서 쌓은 실전 경험과 기술력이 이제 내수 시장으로 돌아오며 ‘제2의 원전 사이클’을 예고하는 모습이다.

탈원전 기조 아래 수년간 위축됐던 원전 산업 생태계는 11차 전력수급기본계획(전기본)을 기점으로 다시 정책의 공식 궤도에 올랐다. 폭증하는 인공지능(AI) 전력 수요와 탄소중립이라는 이중 과제 앞에서 원전은 다시 한번 선택지가 아니라 필수 인프라로 재정의되고 있다.

한국 원전 기술의 출발점은 1978년 고리 1호기였다. 당시 한국은 원전 운영과 설계, 시공 전반에서 해외 기술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미국 웨스팅하우스(WEC)로부터 기술을 이전받아 기초를 다졌고 1980년대 후반에는 컴버스천엔지니어링(CE)으로부터 가압경수로(PWR) 기술을 도입하며 한국형 원자로 개발에 속도를 냈다. 이후 수십 년에 걸친 연구개발 끝에 독자 모델인 APR1400을 완성하며 기술 자립의 문턱에 섰다.

그러나 기술 자립의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기술을 이전했던 CE사가 웨스팅하우스에 인수되면서 원천 기술의 지식재산권(IP)이 다시 웨스팅하우스로 귀속되는 구조적 한계가 드러났다. 이 문제는 2024년 체코 원전 수주 과정에서 현실이 됐다.

웨스팅하우스가 지재권 침해를 이유로 소송을 제기하며 제동을 걸었고, 결국 한국수력원자력은 수출을 지속하기 위해 로열티 지급과 핵심 부품 독점 공급권을 인정하는 전략적 합의에 나섰다.






일각에서는 원전 수출 주권이 장기간 제약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그런데도 K원전의 현장 경쟁력 자체에 대한 평가는 확고하다. 공기 준수 능력, 품질 관리, 비용 통제 측면에서 한국은 이미 ‘검증된 플레이어’로 자리 잡았다.

정책 환경 역시 변하고 있다. 최근 확정된 11차 전기본은 대형 원전과 소형모듈원자로(SMR) 도입을 명시하며 원전을 다시 정부 에너지 정책의 중심축으로 복귀시켰다.

정범진 경희대 원자력공학과 교수(전 원자력학회장)는 “정부가 2024년 2월 확정된 11차 전기본을 그대로 준수하기로 한 것은 원전이 포함된 기존 계획이 유효하다는 점을 확인한 결정”이라고 평가했다. 원전 정책이 방향성을 되찾았다는 점 자체가 시장에는 중요한 신호로 읽힌다는 설명이다.

여론 역시 정책 변화에 힘을 싣고 있다. 정부가 실시한 조사에서 신규 원전 건설에 대해 60% 이상이 찬성 의사를 밝혔다. 정 교수는 “이 같은 여론은 향후 12차 전기본에서 원자력 비중을 보다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신규 원전 추가를 논의할 수 있는 정책적 여지를 넓혀주는 지표”라고 해석했다.

원전이 다시 주목받는 배경에는 AI 산업이 있다. 대규모 데이터센터가 요구하는 전력은 연중무휴, 무탄소, 안정적 공급이라는 조건을 동시에 충족해야 한다. 현재로서는 원전 외에 뚜렷한 대안이 없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이 흐름 속에서 한국 기업들은 대형 원전을 넘어 SMR 분야에서도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두산에너빌리티는 핵심 기기 제작 역량을 앞세워 글로벌 공급망의 중심에 서 있고, SK그룹은 테라파워와 협력하며 차세대 원전 사업에 발을 넓히고 있다.

다만 과제도 분명하다. AI 전력 수요 증가 속도를 감안하면 신규 원전 건설만으로는 대응에 한계가 있다. 현실적인 대안으로는 기존 원전의 가동률 제고가 꼽힌다. 현재 한국 원전 가동률은 80% 초반 수준으로 미국(90% 이상)에 비해 낮다. 미국은 경제성 때문에 멈췄던 원전을 수조 원을 들여 보수해 다시 돌리고 있다. 그만큼 전력 문제 해결이 시급하다는 뜻이다.

정 교수는 “미국이 과거 사고 이력이 있는 스리마일(TMI) 원전 인근 설비까지 재가동하는 상황을 감안하면 우리 역시 월성 1호기 등 기존 설비의 활용 가능성을 보다 냉정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행정 절차 역시 숙제다. 원전 건설 자체는 6~7년이면 가능하지만 인허가와 주민 수용성 문제로 전체 기간이 15년 가까이 늘어지는 구조는 개선이 불가피하다.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처리장 부지 선정과 관련 특별법 제정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로 꼽힌다.

전력망 확충을 둘러싼 지역 갈등 역시 AI 산업 육성과 맞물려 풀어야 할 정책 과제다. K원전은 이제 수출 산업을 넘어 국가 경쟁력을 떠받치는 에너지 인프라의 문제로 돌아왔다. 기술, 여론, 산업 수요라는 세 축이 다시 맞물린 지금이 원전 산업의 향방을 가를 분기점이라는 데 이견은 많지 않다.




④ 배터리
‘캐즘’ 건너온 K배터리, 로봇·ESS 투트랙으로 질주

한국 배터리 산업은 1990년대 후반 일본 파나소닉과 소니가 기술 이전을 거부하며 한국 시장을 견제하던 불모지에서 시작됐다. 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SK온은 수십 년간 적자를 감수하며 독자 노선을 택했고 선제 투자는 오늘날 하이니켈 NCM과 전고체 배터리 기술 경쟁력으로 연결됐다.

그러나 최근 글로벌 전기차 시장 부진과 중국 기업의 저가 공세가 겹치면서 배터리 3사의 실적은 악화했다. 2025년 기준 삼성SDI는 1조7224억원, SK온은 9319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LG에너지솔루션은 연간 1조3461억원 흑자를 냈지만 4분기 기준 1220억원 적자로 1년 만에 분기 적자전환했다.

글로벌 전기차 판매 감소와 중국의 저가 경쟁, 미국 정부의 보조금 중단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SNE리서치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전기차·플러그인하이브리드차·하이브리드차 배터리 사용량은 약 1187GWh로 전년 대비 31.7% 증가했지만 한국 3사의 글로벌 점유율 합계는 15.4%로 3.3%포인트 하락했다.

LG에너지솔루션은 108.8GWh(9.2%)로 3위, SK온 44.5GWh(3.7%)로 6위였다. 9위 삼성SDI는 28.9GWh로 상위 10개사 중 유일하게 사용량이 감소했다. 반면 CATL과 BYD 등 중국 기업들은 각각 464.7GWh, 194.8GWh로 점유율 39.2%, 16.4%를 기록하며 시장을 장악했다.







로봇은 전고체 배터리 상용화의 테스트베드로 의미가 크다. CES 2026에서 공개된 현대차 ‘아틀라스’와 테슬라 ‘옵티머스’는 로봇 배터리 경쟁의 서막을 알렸다. 좁은 공간에 고출력을 요구하는 로봇 특성상 무거운 중국산 LFP 대신 한국산 ‘울트라 하이니켈 NCM’ 배터리가 필수적이다.

삼성SDI는 현대차·기아와 로봇 전용 배터리 개발 MOU를 체결, 2027년 상용화를 목표로 한다. 로봇은 가격 민감도가 낮아 고가 전고체 배터리를 흡수할 수 있어 배터리 기업에 150조원 규모의 ‘고마진 신시장’으로 평가된다.

K배터리 경쟁력은 과거 40년간 선제 투자가 만든 결실이다. SK온은 1982년 유공 시절 배터리 사업 비전을 설정하며 하이니켈 NCM 기술 기반을 다졌고, LG에너지솔루션은 1992년 영국 원자력연구소에서 2차전지를 접한 고 구본무 회장이 미래 성장동력으로 점찍고 럭키금속에 배터리 개발을 지시한 게 시작이었다.

삼성SDI는 고 이건희 회장 시절부터 “불나지 않는 배터리” 개발을 강조하며 기술 경쟁력을 키웠다. 이러한 기반 위에 전고체와 하이니켈 기술이 집중되며 로봇·ESS 시장 확장에 대응하고 있다.





ESS는 전기차 이후 새로운 캐시카우로 부상하고 있다. AI 데이터센터와 재생에너지 전력망 안정화 수요가 맞물리며 LG·SK·삼성 3사의 ESS 매출 비중은 30% 수준에 도달했다. LG에너지솔루션은 북미 ESS 생산 라인을 본격 가동하며 2026년 글로벌 생산 역량을 60GWh까지 확대할 계획이다.

리사이클링과 소재 확보도 필수 전략이다. 포스코퓨처엠은 양극재 공급망을 강화하고 국내외 소재 기업은 폐배터리 회수·재활용과 AI 기반 배터리관리시스템(BMS)을 통해 산업 생태계를 완성하고 있다.

최근 관세청 통계에 따르면 2025년 삼원계 양극재 수출액은 약 50억 달러로 전년 대비 18.6% 감소했지만 산업 구조 전환과 시장 다변화 속 단기 조정으로 볼 수 있다.

이안나 유안타증권 애널리스트는 “2026년은 차세대 배터리가 주목받는 해가 될 것”이라며 “중국의 나트륨·전고체 배터리 양산, 미국의 탈중국 규제 강화, 자원 무기화 움직임까지 맞물리며 리튬이온보다는 다양한 배터리 기술에 시장 관심이 집중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⑤ 우주
‘뉴스페이스’ 조연에서 주역으로…K우주 밸류체인 진입

대한민국 우주 산업의 출발점은 화려함과 거리가 멀었다. 1992년 ‘우리별 1호’를 쏘아 올렸지만 발사체는 외국의 것이었다. 위성은 만들 수 있었지만 우주로 올려보낼 ‘발’이 없다는 사실은 곧 우주 주권의 한계를 의미했다.

2000년대 나로호 프로젝트 역시 러시아와의 협력이라는 이름 아래 기술 접근이 제한되며 여러 차례 발사 지연을 겪었다. 국내 연구진에게 남은 것은 실패의 기록이 아니라 불완전한 협력 속에서도 축적한 엔진 설계 데이터와 궤도 계산 노하우였다.

이 인고의 시간은 누리호 성공으로 결실을 보았다. 한국은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중대형 액체 로켓 엔진 기술을 확보한 국가가 됐고 ‘우리 위성을 우리 발로 쏘아 올리는’ 단계에 도달했다. 발사체 자립은 단순한 기술 성취를 넘어 우주 산업 전반의 출발선을 국내로 끌어당겼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축적된 기술력은 글로벌 무대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2월 발사 예정인 NASA의 아르테미스 2호 로켓에는 한국천문연구원과 우주항공청(KASA)이 개발한 큐브위성 ‘K-라드큐브(K-RadCube)’가 탑재된다.

인류의 달 귀환 프로젝트에 한국의 시스템이 함께 오른다는 것은 NASA의 엄격한 유인 비행 안전 기준을 통과했다는 의미다.





특히 이번 임무에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메모리 반도체가 우주 방사선 환경 테스트를 위해 실린다. 반도체 강국 한국이 ‘우주 환경 표준’ 선점에 나섰다는 신호다. 앞서 삼성물산은 우주 발사장 건설 등 ‘스페이스 플랜트’ 진출을 가시화하며 그룹 차원의 우주 밸류체인 확대 가능성을 제시했다.

현재 우주·방산 반도체는 전체 반도체 시장의 1%에 불과하지만 얼라이드마켓리서치에 따르면 관련 시장은 2031년까지 연평균 7.6% 성장할 전망이다.

다만 기술 성과와 사업 성과 사이의 간극은 숙제다.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은 글로벌 우주 경제가 2040년대 1조 달러를 넘길 것으로 전망하면서도 한국의 우주 산업 수출은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진단했다.

강성은 무협 수석연구원은 “기술 개발 중심의 정책에서 벗어나 시장 형성 중심으로 전환해야 한다”며 “초기 수요 창출과 해외 진출 지원이 병행되지 않으면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자본시장의 기대는 정책 변화에서 나온다. 이상헌 iM증권 애널리스트는 “유인 달 탐사 재개 등 우주 대항해 시대가 본격화될 것”이라며 “정부가 구매자가 되고 민간이 개발하는 뉴스페이스 방식이 정착되면서 우주가 본격적인 비즈니스 영역으로 진입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미국은 달 탐사 재개를 명확히 하며 민간 주도 모델을 강화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주도권은 민간으로 이동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누리호 기술을 이전받아 발사체 제작·운용·사업권을 통합했고 한화시스템은 원웹 투자를 통해 저궤도 위성 통신망 구축에 나섰다. LK삼양, 루미르, 나라스페이스 등 강소기업들도 별추적기 렌즈와 초소형 위성 기술로 생태계를 키우고 있다.

스페이스X IPO 기대감까지 더해지며 관련 ETF와 소부장 기업들이 재평가받는 흐름이다. 전문가들은 선택과 집중을 주문한다.

미국의 우주 예산은 한국의 수십 배에 달한다. 전력반도체·배터리 등 강점 산업을 우주 밸류체인에 결합하고, 민간이 만든 서비스를 정부가 구매하는 초기 시장을 조성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최설화 메리츠증권 애널리스트는 “단기 변동성은 경계해야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소부장(소재·부품·장비) 기업 등을 분할 매수하는 등 밸류체인 전반에서 투자 기회를 살펴보는 것이 유리하다”고 말했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