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 빅사이클 올라탄 한국의 주력 산업]
‘코스피 5000’을 만든 저력에 국내 굴지의 대기업이 있다면 향후 ‘코스닥 3000’ 또는 ‘코스피 10000’ 시대를 열어갈 주역에는 국내 강소기업들이 포진해 있다. 글로벌 빅테크가 찾는 ‘슈퍼을(乙)’ 리노공업부터 최근 CES에서 스타덤에 오른 딥엑스까지. 기술과 혁신으로 무장한 준비된 K-강소기업을 찾았다. 리노공업,
독자 기술 구축한 K-소부장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없어도 괜찮은 곳이에요. 오히려 그들이 아쉬워할 정도죠.” 반도체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업계 관계자의 이 한마디는 리노공업의 위상을 보여준다. 보통의 한국 소부장 기업들이 국내 대기업의 투자 계획에 명줄이 걸린 ‘천수답 경영’의 상징이었다면 리노공업은 그 종속의 굴레를 끊어낸 독보적인 존재로 꼽힌다. 엔비디아, 브로드컴,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전 세계 1000여 개의 고객사를 상대로 호령하며 글로벌 빅테크들이 신제품을 설계할 때 가장 먼저 줄을 서는 ‘슈퍼을’이다.
1978년 부산의 한 작은 공장에서 시작된 리노공업의 역사는 곧 ‘기술 독립’의 연대기다. 리노공업의 이채윤 대표는 공고 졸업 후 1969년 금성사(현 LG) 부산공장에 입사했다. 2년 뒤 그는 과감히 사표를 던졌고 자본금 단 30만원으로 비닐봉지 제작 회사를 차리며 홀로서기에 나섰다. 이후 헤드폰 부품, 카메라 케이스 등 다양한 업종을 거치며 현장에서 기술을 몸소 익혔다.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지역사회에서 소통하며 반도체 분야의 잠재력을 포착한 그는 일본에서 버려지는 중고 기계들을 저렴하게 사들여 반도체 부품 정밀 가공 산업에 뛰어들었다. 대기업에서 배운 시스템의 원형과 현장에서 구른 집념이 결합한 순간이었다.
당시 선진국들이 독점하며 부르는 게 값이었던 반도체 검사용 핀과 소켓. 리노공업은 “남들이 하지 않는 것, 수입에만 의존하는 제품을 우리가 직접 만든다”는 무모해 보이는 경영철학으로 출사표를 던졌다. 리노공업은 외국산에 100% 의존했던 테스트 핀과 소켓을 국산화하는 데 성공했다. 테스트 핀은 반도체 검사 장비가 다양한 반도체 칩과 호환되도록 어댑터 역할을 하는 소모성 부품이다.
그렇게 45년. 한 우물만 파온 고집은 머리카락(약 0.1mm)보다 가는 0.075mm 크기의 테스트 핀을 뽑아내는 초정밀 기술로 승화됐다. 반도체가 작아지고 고도화될수록 이 미세한 핀의 가치는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이제 ‘리노핀(LEENO PIN)’은 글로벌 시장에서 대체 불가능한 브랜드가 되었고 리노공업은 품질과 납기 모든 측면에서 세계 1위의 지위를 확보했다.
리노공업의 공장에는 외주가 없다. 설계부터 가공, 도금, 조립, 심지어 부품 생산을 위한 치공구 제작까지 100% 인하우스 공정으로 완결된다. 이 능력은 정시에 납품하고 시장에서 가장 빠른 납기를 보장한다. 글로벌 빅테크들이 리노공업을 파트너로 점찍은 결정적 이유다.
2001년 코스닥 시장에 상장한 리노공업은 10여 년 전만 해도 코스닥시장 시가총액 100위권 밖에 있었다. 2019년 11월부터 본격적인 랠리를 시작해 2021년엔 시총 13위까지, 2026년 현재 시총 8위다.
이는 실적의 힘이다. 영업이익률은 45%를 훌쩍 넘는다. 국내 제조업 평균 영업이익률이 한 자릿수에 머무는 것과 비교하면 경이로운 수치다. 이러한 수익성은 독보적인 기술력이 확보한 ‘수출의 힘’에서 나온다. 대기업의 낙수효과에만 기대던 구조에서 완전히 탈피했다. 2024년 전체 매출 2782억원 중 무려 77%인 2147억원이 해외 수출에서 발생했다. 2025년 3분기까지의 누적 수출액은 2330억원에 달한다. 이는 2024년 1년 동안 벌어들인 수출액을 불과 9개월 만에 갈아치운 수치다. 이수스페셜티케미컬,
‘꿈의 배터리’ 시대 앞당기는 연금술
이수스페셜티케미컬은 한국 화학 산업의 정교한 제조 능력이 어떻게 미래 에너지 산업의 핵심으로 전이되는지를 보여준다.
시작은 모회사인 이수화학에서 특수케미컬 사업부문이 인적분할된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그 기술의 뿌리는 수십 년간 축적된 황화수소(H2S) 핸들링 기술에 있다. 황화수소는 달걀 썩는 냄새가 나는 독성 가스로 화학 업계에서도 다루기 가장 까다롭고 위험한 물질로 꼽힌다. 하지만 이수는 1970년대부터 합성세제 원료 등을 만드는 과정에서 이 가스를 안전하게 통제하고 정제하는 노하우를 키워왔다. 남들이 위험을 피해 도망갈 때 현장에서 묵묵히 쌓아온 이 숙련도 자체가 거대한 진입장벽이 된 셈이다.
전 세계가 화재 위험이 없는 ‘꿈의 배터리(전고체 배터리)’ 개발에 사활을 걸면서 반전이 일어났다. 배터리의 안정성을 책임질 황화물계 고체전해질을 만들려면 역설적으로 그 위험한 황화수소를 완벽히 다뤄야 하기 때문이다.
전고체 배터리 시장은 아직 기술적 과제가 산적한 개발 초기 단계다. 업계는 공정이 용이한 산화물계가 먼저 대중화될 것이라 예상했으나 최근 양산 지연 등으로 인해 오히려 성능이 우수한 황화물계에 대한 기대감이 쏠리고 있다. 이수스페셜티케미컬은 제품 생산 시 부산물로 생성되는 황화수소를 활용해 핵심 원료인 황화리튬(Li₂S)의 저가화·대량생산 기술을 확보하며 이 흐름의 중심에 섰다. 2021년 연산 20톤 규모의 데모 설비를 준공한데 이어 2024년 5월에는 미국 엔지니어링사 KBR과 공동 개발한 최적화 공법을 적용해 증설까지 완료했다. 2025년 8월 이들은 황화리튬 사업의 본격적인 상업화를 위해 마더 플랜트(Mother Plant) 구축 투자를 확정했다. 연산 500톤 규모의 기반 설비와 초기 150톤 규모의 생산 설비를 갖춘 이 플랜트는 2027년 상업 가동이라는 목표를 향한 핵심 병기다.
이러한 공격적인 투자가 가능한 이유는 단순히 미래 가치에만 기대지 않는 탄탄한 기초 체력 덕분이다. 2025년 3분기 누적 매출 실적을 보면 TDM, IPA 등 기존 주력 제품군에서 이미 연간 1200억원 이상의 탄탄한 수출을 기록하며 기초 체력을 입증하고 있다. 탄탄한 주력 사업이 벌어다 주는 수익(Cash-cow)은 아직 열리지 않은 전고체 시장을 향한 공격적인 투자의 밑거름이 될 전망이다. 전진건설로봇,
독일의 품질과 중국의 가격을 압도하다.
거친 먼지와 굉음이 가득한 건설 현장에서도 국산화를 향해 무모한 도전에 나선 이들이 있다. 건축의 핵심 소재인 콘크리트를 적재적소에 운반하는 건설 현장의 필수 장비인 콘크리트 펌프카를 만드는 전진건설로봇이다.
전진건설로봇의 역사는 1991년 모태 기업인 전진산업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외산 장비가 장악하고 있던 건설 현장에서 콘크리트 펌프카(CPC)의 국산화라는 무모한 도전에 뛰어든 것이 그 시작이다. 1999년 전진중공업 설립을 거쳐 2021년 지금의 사명으로 변경하기까지 수십 년간 축적된 유압 제어 기술과 굴절 붐 설계 노하우는 이들을 글로벌 과점 시장의 주역으로 키워냈다.
전진건설로봇의 제품은 품질과 가격 경쟁력 면에서 독일 선도업체보다 5~10% 합리적이면서도 중국 저가 업체보다는 사고에 대한 법률적 위험 관리와 품질 신뢰도가 월등히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러한 ‘골든 크로스’의 위치가 글로벌 시장에서 강력한 시장 지배력을 확보한 원동력이다.
이들의 무대는 이미 한국을 넘어섰다. 북미, 유럽, 중동을 아우르는 글로벌 네트워크를 구축하며 해외 수출 비중을 74.1%까지 끌어올렸다. 콘크리트 펌프카는 인프라 투자 및 재건 사업이 진행될 경우 수요가 증가한다. 특히 최근 우크라이나 종전 논의와 맞물려 전국적인 재건 사업에 대응하기 위해 폴란드 공장 설립을 검토하는 등 거대 시장을 향한 선제적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우크라이나 재건에 드는 비용은 약 4863억 달러(702조713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슈퍼센트
1분의 재미로 13억 명 홀린 ‘K-게임’
슈퍼센트는 한국의 콘텐츠 산업이 거대 자본의 물량 공세 없이도 어떻게 세계 시장을 평정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들은 수천억원의 제작비가 투입된 대작 RPG들이 점령한 게임 시장에서 ‘가장 가벼운 재미’라는 역발상으로 승부수를 던져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다.
슈퍼센트의 시작은 모바일 광고 시장의 생태계와 사용자 행동 데이터를 깊이 있게 연구하는 데서 출발했다. 1분 내외의 짧은 시간에 사용자를 몰입시키는 ‘하이퍼 캐주얼’ 게임의 본질을 직관적인 디자인과 치밀한 데이터 분석의 조화에서 찾아낸 결과다.
이 회사를 이끄는 공준식 대표는 한국 모바일 게임의 전성기를 이끈 선데이토즈(현 위메이드플레이) 출신이다. ‘애니팡’의 프로덕트 매니저(PM)를 시작으로 비즈니스 개발을 거치며 그는 수천만 명의 사용자 행동 데이터를 분석하고 이를 수익 구조로 연결하는 시스템을 몸소 구축해 왔다. 설립 4년 만에 글로벌 누적 다운로드 13억 건을 돌파하며 전 세계인의 스마트폰을 점령한 저력 역시 이러한 데이터의 축적에서 나왔다.
대표 타이틀인 ‘피자 레디(Pizza Ready)’는 누적 다운로드 4억 건을 돌파하며 2023년 이후 출시된 전 세계 게임 중 다운로드 1위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스네이크 클래시’ 또한 1억8000만 다운로드를 넘어서며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 슈퍼센트는 매출 1717억원을 기록하며 ‘벤처천억기업’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전체 매출의 97%를 해외에서 벌어들이는 진정한 수출 강자다. 2022년 300만 달러로 시작한 수출액은 2023년 700만 달러, 2024년 7000만 달러를 거쳐 2025년 ‘제62회 무역의 날’에서 1억 불 수출의 탑을 거머쥐는 쾌거를 이뤘다.
연평균 250% 이상의 성장률을 기록하며 14분기 연속 매출 상승이라는 ‘퀀텀 점프’를 실현하고 있다. 한국 게임사 최초로 글로벌 퍼블리셔 다운로드 순위 7위에 오른 슈퍼센트의 행보는 아이디어와 데이터 기술만 있다면 K-소프트웨어가 전 세계 시장의 ‘포식자’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딥엑스
2026 CES 화제의 기업
최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2026 CES’에서 현대차만큼이나 화제를 모은 기업이 있다. 국내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국내 대표 AI 반도체 팹리스 업체로 불리는 딥엑스(DEEPX)다.
회사를 이끄는 김녹원 대표는 애플 본사에서 아이폰용 시스템온칩(SoC)을 설계했던 핵심 인력이다. 그는 거대언어모델(LLM)이 거대한 데이터센터의 벽을 넘어 우리 주변의 모든 기기에서 직접 구동되어야 한다는 ‘온디바이스 AI’의 시대가 올 것임을 예견했다. 이러한 통찰을 바탕으로 전력 소모는 획기적으로 낮추면서도 연산 성능은 극대화한 신경망처리장치(NPU) 원천 기술을 꾸준히 축적해왔다.
딥엑스는 이번 CES에서 초저전력 기반의 LLM 추론 로드맵을 공개하며 기술적 실체를 증명했다. 이들이 발표한 2세대 AI 칩 ‘DX-M2’는 5W(와트) 미만의 극소 전력만으로도 최대 1000억 파라미터 규모의 LLM을 구동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파라미터 숫자가 클수록 AI가 더 정교한 추론을 해낸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는 거대 데이터센터의 전유물이었던 생성형 AI를 실생활의 기기 안으로 끌어들인 혁신적인 성과다. DX-M2의 상용화는 전력 과소비와 인프라 병목 현상을 해결할 열쇠가 될 전망이다. 추론 작업을 수십 억 대의 디바이스로 분산함으로써 데이터센터 트래픽을 80% 이상 절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엔비디아 GPU의 약점인 고비용·고전력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한 딥엑스의 칩은 로봇, 자율주행차, 스마트 가전 등 AI가 필요한 모든 물리적 인프라에 즉시 탑재될 수 있는 범용성을 갖췄다.
그동안 한국 반도체가 ‘만드는 기술’에 집중해 왔다면 딥엑스는 ‘그리는 기술’인 설계 분야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산업적 의미가 크다. 이미 글로벌 완성차 업체 및 스마트 팩토리 솔루션 기업들과 협력하며 대량 양산의 문턱을 넘어서고 있는 이들의 행보는 고무적이다.
정채희 기자 poof3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