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출 효자’ 넘어 ‘글로벌 빅파마’로…30년 만에 물 만난 K-바이오[K-빅사이클]

입력 2026-02-19 13:45
수정 2026-02-19 13:46


일라이릴리, 아스트라제네카, 로슈, 사노피. 국내 소비자에게도 익숙해진 유명 제약사 이름이지만 이들 회사가 어느 국적인지 본사가 어느 나라에 있는지 제대로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세계 수십~수백 개국에 생산 및 연구시설, 수만 명 임직원을 거느린 일명 ‘글로벌 빅파마’이기 때문이다.

삼성 이건희 회장이 1995년 “생산으로 돈을 버는 것은 반도체가 마지막일 것. 특히 길게 보고 준비해야 할 건 제약 산업”이라며 그룹의 미래 사업으로 제약·바이오를 낙점했을 때만 해도 ‘빅파마’는 먼 나라 이야기만 같았다.

그러나 IMF 외환위기가 발생한 1997년 한미약품은 독자 개발한 마이크로에멀전 기술을 노바티스에 7300만 달러 규모로 수출하며 국내 제약·바이오 기술의 싹을 보여줬다. 대우그룹 해체와 함께 직장을 잃은 ‘대우맨’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은 동료들과 함께 사업 구상을 시작했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 코로나19 팬데믹까지 거치며 어느새 ‘수출 효자’로 성장한 국내 바이오업계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고 있다. 세계 시장에 진출하는 유망 기업들이 늘고 있으며 바이오 대기업들은 그동안 쌓아온 노하우와 자본을 발판 삼아 미국 진출에 나섰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사이 축적된 정보와 인재들이 그 중심에 있다.

마침 트럼프2기 행정부의 보호무역주의, 시장을 휩쓸던 블록버스터 의약품의 특허 만료 시기가 겹치며 국내 제약·바이오 기업들의 성장에 긍정적인 작용을 하고 있다. 당장은 악재인 듯한 미국발 관세라는 변수는 다가올 변화를 앞당긴 것에 불과하다는 분석이다. 최근 바이오 기업들의 미국 진출에는 세계적인 기업으로 거듭나겠다는 포부가 담겨 있다. 엔데믹에도 ‘리바운드’한 수출
산업통상부가 발표한 ‘2025년 연간 및 12월 수출입 동향’에 따르면 지난해 1년간(1월 1일~12월 25일) 바이오헬스 수출액은 162억6800만달러로 전년 대비 7.9% 증가했다. 업황 사이클을 탄 반도체(22.2%)와 선박(24.9%)을 제외하면 이처럼 높은 수출 증가세를 기록한 산업은 없다.

바이오헬스 수출액은 역대 3번째로 높은 수준이었다. 2021년 162억8000만 달러, 2022년 162억9000만 달러로 역대 수출액 기록을 깬 뒤 엔데믹 이후 주춤하다가 다시 팬데믹 당시 수준을 회복했다. 바이오가 ‘반짝 호황’을 지나 대세를 타게 된 것이다. 산업통상부는 이에 대해 “바이오시밀러(바이오 복제약) 및 위탁생산(CMO) 의약품 수출을 중심으로 전년 대비 수출이 증가, 역대 3위 실적을 달성했다”고 설명했다.

관련 기업들의 실적도 좋았다. 국내 최대 CDMO(바이오의약품 위탁개발생산) 기업인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지난해 매출과 영업이익이 각각 4조5570억원, 2조692억원으로 나타났다. 영업이익 2조원 돌파는 역대 국내 제약·바이오 기업 중 최초로 달성한 기록이다.

바이오시밀러 회사인 셀트리온은 매출 4조1163억원, 영업이익 1조1655억원을 기록했다. 바이오는 기술력을 인정 받는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높은 영업이익률을 보이는 것이 특징인데 급등한 환율 여파까지 작용해 더 많은 수익을 기록했다.현지생산·신약개발 투트랙으로 변신
이 같은 실적은 삼성바이오로직스와 셀트리온이 각자의 분야에서 ‘글로벌 선두 플레이어’로 자리 잡은 결과이다. 마침 항체의약품 등 바이오의약품 수요가 증가하면서 탁월한 제조 역량을 바탕으로 한 ‘패스트 팔로어’ 전략이 통한 것이다.

2011년 4월 설립된 삼성바이오로직스는 공격적인 시설 투자와 일감 수주를 통해 2022년 ‘생산능력 세계 1위’를 달성했다. 미국의 견제로 중국의 우시바이오로직스가 주춤하는 사이 삼성바이오로직스의 지난해 연간 수주액은 6조원에 달했다.

2002년 창립된 셀트리온은 자가면역질환 치료제 램시마(성분명 인플리시맙)와 유방암 치료제 허쥬마(성분명 트라스투주맙) 등을 바탕으로 급성장했다. 특히 셀트리온은 램시마가 2015년 유럽에 처음 출시되면서 날개를 달게 됐다. 램시마는 오리지널인 존슨앤드존슨(J&J)의 레미케이드의 매출을 추월했다.

지난해 각각 창사 14년, 23년을 맞은 삼성바이오로직스와 셀트리온은 드디어 미국 생산시설 인수를 결정하며 현지에 거점을 확보하게 됐다. 트럼프2기 행정부 출범으로 관세 압력이 본격화했기 때문이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지난해 말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이 보유하던 미국 메릴랜드주 록빌 소재 원료의약품(DS) 공장 인수를 마쳤다. 셀트리온도 지난해 일라이릴리로부터 뉴저지주 브렌치버그 생산시설을 인수해 올해 1월 5일(현지 시간) 개소식을 열었다.

그러나 상호관세 압력이 본격화하기 전부터 미국 현지에 생산시설을 인수하는 흐름은 존재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보호무역주의가 어제오늘 일이 아닌 데다 시장 지배력 및 수주 경쟁력 확보 차원에서 현지 투자 필요성은 지속적으로 제기됐기 때문이다.

롯데바이오로직스는 2022년 미국 시러큐스 소재 바이오의약품 생산시설 인수 계약을 체결한 뒤 ADC(항체약물접합체) 생산라인 증설까지 완료한 상태이다. 바이오 후발주자인 롯데는 국내 1공장의 준공 및 상업생산을 기다리면서 각국 GMP(우수의약품 제조 및 품질관리기준) 승인 경험이 풍부한 해당 시설에서 쌓은 트랙 레코드를 바탕으로 수주를 확대할 계획이다.

SK바이오사이언스도 2024년 IDT 바이오로지카 지분을 인수했다. IDT 바이오로지카는 미국과 독일에 생산시설과 고객사를 갖춘 백신 CMO 기업이다. SK바이오사이언스는 해당 기업 인수를 통해 미국, 유럽 등 선진국 시장의 포트폴리오를 확장하고 항암 바이러스와 세포유전자치료제(CGT) 등 신규 바이오 영역으로 진출하려는 전략을 밝혔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새로운 현지 생산거점 구축을 통해 고객사에 안정적인 생산옵션을 제공하고자 한다. 지난해 인적분할을 통해 바이오시밀러 자회사인 삼성바이오에피스와 이해충돌 문제를 해소한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이번 록빌 공장 인수로 총 84만5000L의 압도적인 생산 역량을 갖춤으로써 글로벌 1위 CDMO로서 입지를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동시에 분할법인인 삼성바이오에피스는 바이오시밀러 사업에서 확보한 재원을 바탕으로 신약 등의 연구개발(R&D)에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지난해 4분기 R&D 비용은 1542억원으로 매년 1종 이상의 신약 후보물질을 임상 단계로 올리는 등 2030년까지 총 20종 이상의 제품 포트폴리오를 구축할 계획이다.

셀트리온은 지난해 일라이릴리로부터 인수작업을 마무리한 브렌치버그 공장을 신사업인 CDMO의 거점이자 연구 거점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셀트리온은 이곳에서 우선 릴리와 자사 물량을 생산하고 연구센터도 건립할 예정이다.

셀트리온은 이를 통해 관세 이슈에 대응하는 동시에 ‘글로벌 빅파마’로 도약하는 데 박차를 가하겠다고 밝혔다. 그간 바이오시밀러 사업을 통해 축적한 바이오의약품 연구 및 생산 역량을 CDMO 사업과 신약개발로 확장한다. 신약 파이프라인은 총 16개로 항체약물접합체(ADC) 항암제 CT-P70과 CT-P71, 비만치료제 CT-G32도 여기 속한다. R&D 결실 ‘피하주사·비만약’
제형 변화 수요도 국내 바이오 기업에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셀트리온의 야심작 짐펜트라(램시마SC의 미국 제품명) 매출 성장세도 올해부터 본격화될 전망이다. 레미케이드(성분명 인플릭시맙) 바이오시밀러인 짐펜트라(램시마SC)는 염증성 장질환 환자에게 주로 처방되는 바이오의약품이다. 기존 정맥주사제를 피하주사제(SC) 형으로 개발한 부분을 인정받아 지만 미국에서 오리지널로 출시된 고(高)마진 제품이기도 하다. 셀트리온은 자체 SC 제형 기술을 바탕으로 허쥬마SC를 개발해 임상을 마쳤으며 출시 허가를 준비 중이다.

전통 제약사 1위인 유한양행은 2024년 최초로 존슨앤드존슨 자회사 얀센에 기술수출한 비소세포폐암 치료제 렉라자(성분명 레이저티닙)가 미국 식품의약국(FDA)에 리브리반트(성분명 아미반타맙)와 병용요법으로 허가를 받으면서 총 1400억원 상당의 마일스톤(단계별 기술료)을 수령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 인해 업계에선 지난해 유한양행 영업이익이 1000억원을 넘긴 것으로 보고 있다. 리브리반트는 지난해 12월 SC제형인 ‘리브리반트 파스프로’의 FDA 승인으로 올해부터 판매량이 급증할 전망이다. 병용요법으로 사용되는 렉라자의 판매 수혜도 예상되는 부분이다.

알테오젠은 아예 SC 플랫폼 기술로 ‘대박’을 쳤다. 대기업인 셀트리온이 SC 기술을 자사 제품에 적용한다면 바이오텍인 알테오젠은 제품 개발과 함께 플랫폼 기술 수출을 병행해 수익 확보에 나선다는 전략이다. 이 같은 전략 수립에는 LG화학 출신의 ‘국내 바이오 1세대’이자 성장호르몬 치료제 ‘유트로핀’ 탄생의 핵심 인물로 알려진 창업주 박순재 전 대표가 해외 시장에서 제형의 중요성을 인지한 것이 ‘SC 플랫폼 수출 전략’의 시작점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 머크(MSD)는 알테오젠의 피하주사제형 플랫폼 ‘ALT-B4’를 도입해 매년 40억 달러 매출을 내는 블록버스터 키트루다에 적용해 FDA로부터 SC 제품(키트루다 큐렉스) 출시 승인을 받았다. 알테오젠은 지난해 매출 2021억원, 영업이익 1148억원을 달성했다. 영업이익률이 57%에 달한다. MSD는 2028년 키트루다 특허 만료를 앞두고 SC 제품을 판매해 경쟁 제품의 시장 진입을 방어한다는 전략이다.

2025년부터 2030년까지 특허만료를 앞둔 의약품은 약 200개에 달한다. 알테오젠이 아스트라제네카, 다이이치산쿄, 최근에는 글락소스미스클라인 자회사와 수천억원에서 많게는 1조원 이상 규모의 기술이전 계약을 맺을 수 있었던 이유이다. 최근 MSD와 계약한 판매 로열티 수준이 시장 기대(5%)를 하회하는 2%에 불과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주가는 급락했지만 알테오젠의 기술력 자체가 보유한 펀더멘털은 그대로라는 평이다.

권해순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알테오젠 로열티 이슈에 대해 “중장기적으로 한국 제약·바이오 섹터의 구조적 성장 논리를 훼손하는 성격은 제한적이라고 판단한다”면서도 “보수적 투자 심리가 극대화되면서 성장 속도에 대한 기대감 반영 속도 조절 등은 당분간 지속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비만과 대사질환 분야에선 오랜 기술력을 가진 전통 제약사들의 활약이 돋보인다. 국내 R&D 원조 격인 한미약품은 ‘렉라자 쾌거’를 달성한 유한양행에 다소 가려졌지만 ‘비만약 수혜주’로 부상하면서 주목받고 있다. 올해 하반기 국내 출시를 앞두고 있던 비만약 에페글레나타이드가 멕시코에 수출 계약을 맺은데 이어 3중 작용 비만치료제 HM15275도 순조롭게 임상 2상에 진입했다.

HM15275는 한미약품이 혈당 조절 호르몬인 인크레틴 연구 노하우를 바탕으로 글루카곤 유사 펩타이드(GLP-1)와 위 억제 펩타이드(GIP), 글루카곤(GCG) 각각의 수용체 작용을 최적화해 25% 이상 체중감량이 가능하도록 설계한 물질이다. 위 절제 등 수술 치료의 체중감량 효과가 25~30% 수준이다.

중견사 중 R&D 투자 규모가 큰 편인 일동제약은 경구용 비만약 후보물질이 임상 1상에서 유의미한 결과를 내면서 임상 2상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삼천당제약은 올해 특허만료가 시작되는 비만약 세마글루타이드(제품명 위고비)의 경구용 복제약에 대해 다이이치산쿄와 공동 개발 및 일본 판매 파트너십 계약을 체결했다. 간암 신약 리보세라닙의 FDA 허가에 도전하는 HBL은 장기지속형 주사제 플랫폼을 바탕으로 비만, 당뇨약 개발을 진행 중이다. 장기지속형 주사 플랫폼은 현재 1주 간격으로 맞는 비만치료제를 한 달 이상 간격으로 맞을 수 있도록 해 편의성을 높이는 기술이다.

수천억원 비용이 투입되는 글로벌 임상 3상 특성상 전통제약사나 바이오텍이 직접 임상 3상을 거쳐 제품을 출시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신약 후보물질이 임상 1~2상 단계에서 우수한 효능과 시장성을 증명한다면 기술수출 될 가능성이 크다.

최인영 한미약품 R&D센터장은 “3중 작용제인 HM15275는 전임상 단계에서부터 높은 체중감량 효과와 당뇨, 심혈관계 질환까지 적응증 확대 가능성을 보인 물질”이라며 “자체적인 글로벌 임상 3상은 어려우므로 전단계에서 기술수출 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민보름 기자 br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