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새누리당(현 국민의힘) 후보, 문재인 민주통합당(현 더불어민주당) 후보, 안철수 무소속 후보가 맞붙은 2012년 18대 대통령 선거. 대선 과정에서 각양각색의 공약을 쏟아내던 세 후보가 정치 쇄신 분야에선 동일한 공약 하나를 내놨다. 기초단체장(1995년 도입)과 기초의원(2006년 도입)에 대한 정당공천제를 폐지해 지방자치를 정상화하겠다는 약속이었다.
함량 미달 후보를 걸러내고 정당 책임 정치를 구현하겠다는 도입 취지와 달리 정당공천제가 오히려 지방정치 부패의 진원지가 됐다는 비판이 광범위하게 퍼진 결과였다. ‘공천이 곧 당선’이라는 인식이 확산하면서 기초단체장과 기초의원이 돈을 주고 공천을 사는 매관매직이 빈발했고, 이는 다시 지방행정 부패를 고착화하는 구조로 이어진다는 비판이 많았다. 민선 4기(2006~2010년) 기초단체장 230명 중 절반가량인 110명이 비리와 위법 혐의로 기소돼 약 20%인 45명이 유죄판결을 받은 통계가 있을 정도였다. 공천에 목을 매다 보니 기초단체장과 의원들은 지역주민보다 당협위원장, 국회의원 눈치를 살피게 됐고 생활 밀착 행정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하지만 정당공천제 폐지 공약은 곧 공약(空約)이 됐다. 여당이 된 새누리당이 2014년 6·4 지방선거를 앞두고 사실상 공약을 파기했다. 민주통합당도 당원투표를 거쳐 폐지를 당론으로 정했다. 2017년 대선에서 이를 다시 공약하며 집권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위헌 가능성, 여야 합의 불발 등이 표면적 이유로 제시됐지만 거대 정당 국회의원들이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내려놓기 싫었던 것이 핵심이라는 점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물론 정당공천제가 폐지됐다고 지방자치의 모든 문제가 단번에 해소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거대 정당들은 이후에도 부패를 낳는 구조를 방치했다. 그사이 국회의원이 지방의원을 수족처럼 부리며 공천헌금과 고액 후원금 등을 받는 관행은 더 굳어져 갔다.
작년 말부터 불거진 민주당 공천헌금 의혹은 이 구조적 병폐를 다시 한번 드러냈다. 2022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당시 민주당 서울 강서갑 지역위원장이던 강선우 의원에게 1억원의 공천헌금을 줬다는 의혹에서 시작된 김경 전 서울시 의원의 금품 로비 의혹이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다. 시의회 상임위를 옮길 때마다 가족 회사가 산하기관 사업을 따냈다는 의혹, 2023년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당시 민주당 의원들을 상대로 한 금품 로비 정황까지 추가로 드러났다. 경찰이 확보한 관련 녹음 파일만 120개에 달한다고 하니 파장의 끝을 가늠하기 어렵다. 김병기 전 민주당 원내대표 역시 2020년 총선을 앞두고 기초의원들로부터 3000만원을 받았다가 돌려줬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민주당은 이번 사태를 일부 개인의 일탈로 치부하려는 모습이다. 정청래 대표는 ‘시스템 에러가 아니라 휴먼 에러’라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이는 자정 능력을 상실한 정치권의 고질적 병폐가 수면 위로 드러난 사건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홍준표 전 대구시장이 얼마 전 페이스북에 “지방선거 때 공천 장사를 해서 자기 정치 비용과 총선 비용을 마련하는 국회의원들이 여야에 부지기수로 있다. 그게 어찌 지금 수사당하는 김병기, 강선우만의 일이겠냐”고 쓴 데서 보듯 특정 정당의 문제로 치부하기도 어렵다. 김 전 시의원이 경찰 조사에서 “나만 그런 게 아닌데 억울하다”고 진술했다는 대목은 상징적이다.
6월 지방선거가 넉 달 앞으로 다가왔다. 공천 비리가 드러난 이상 이번 선거도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치를 수는 없다. 그러나 민주당과 국민의힘 모두 지방선거제 개혁에 미온적이다. 공천 비리 사태 이후 내놓은 대책도 클린선거 암행어사단, 공천비리 신고센터 운영 같은 미봉책에 머물렀다.
지방자치 부패를 근본적으로 줄이기 위한 공천 개혁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지방 소멸 대응 차원에서 추진되는 광역지자체 통합의 성공을 위해서도 마찬가지다. 정당공천제 폐지라는 극약 처방이 아니더라도 기초의회 중대선거구제 확대,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 공천 비리 처벌 강화 등 대안은 이미 충분히 제시돼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결단이다. 기득권을 쥔 두 거대 정당이 책임 있게 나설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