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 DNA' 제지社 "종이 없으면 반도체·드론도 없다"

입력 2026-02-04 16:39
수정 2026-02-04 16:40
잘 변하지 않던 국내 제지업계가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 생산 혁명을 통해 원가를 확 낮추는가 하면 신제품으로 플라스틱과 스티로폼에 빼앗긴 실지를 회복하고 있다. ‘탈(脫) 플라스틱’이라는 세계적 추세에 맞춰 종이의 반격이 시작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 방수·보온 기능 보강한 종이제지업계는 종이 강도를 높이면서 무게는 줄이는 데 주력해왔다. 이를 통해 종이가 넘보지 못하던 가구와 반도체, 드론 소재로 반경을 넓히고 있다. 택배업 발달로 주력 제품이 된 골판지 분야에서도 고강도 경량화 소재를 통해 물류효율을 50% 이상 끌어올리고 있다.

태림포장의 ‘고강도 경량 골판지 상자’가 대표적이다. 2024년 국내 최초로 개발한 이 상자는 박스 표면을 두르는 골판지 원지 2장에 골심지(원지와 원지 사이에 들어간 물결 모양의 종이) 한 장을 넣어 붙인 원단(싱글 월) 제품이다. 원지 3장 사이에 2장의 골심지를 붙인 기존의 이중 원단(더블 월) 상자보다 종이 사용량을 20% 줄일 수 있다. 종이가 덜 들어가 생산 비용도 10% 가량 덜 든다.

그러면서 강도는 더 세졌다. 태림포장에 따르면 싱글월의 압축 강도는 더블 월 상자보다 8㎏의 하중을 더 견딜 정도로 강했다. 골판지 강도를 20% 가량 더 높이는 특수 강화 원지를 쓴 덕분이다. 장정원 태림포장 기술연구소 팀장은 “이 제품 덕에 ‘경량 상자는 약하다’는 인식이 크게 바뀌고 있다”며 “앞으로 물류 효율성을 높이고 종이 사용량을 낮춰 골판지 포장재의 새 방향을 제시하는 데 주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회사는 플라스틱·스티로폼을 대체하는 신소재를 개발했다. 원지 내부로 물이 스며들지 않게 하고 내부 온도를 유지해주는 특수 소재로 코팅한 ‘테코박스’라는 소재다. 이 박스의 보냉 시간은 스티로폼 상자의 98% 수준이다.

아시아제지도 고강도 골판지 포장재 ‘하니콤’을 선보였다. 육각형 벌집 모양의 구조재로 포장재를 만들어 자동차가 올라가도 끄떡없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강도가 좋아 가전제품과 에너지저장장치(ESS), 배터리 등 무거운 내용물 간 충격을 흡수하는 완충재로 사용된다.

회사 관계자는 “강도가 강해지고 무게는 줄어들어 이 소재를 활용하면 시설 설치와 해체가 쉬워진다”며 “포장재 뿐 아니라 전시회 홍보관이나 항공 운송용 받침대(팔레트)로도 쓸 수 있다”고 설명했다. ◇ “종이 재활용률 높은 한국이 유리”생활제지기업 깨끗한나라는 지난해 무기화학물 업체인 태경산업과 함께 ‘하이브리드 미네랄 무기물’을 개발했다. 화장지 원료 일부를 대체할 수 있는 복합 미네랄 섬유다. 공기 중 이산화탄소를 모은 뒤 미세 섬유화 셀룰로오스를 합성해 만든다. 인쇄용지나 판지처럼 두꺼운 용지에 제한적으로 적용했던 기술을 화장지 등에 적용할 수 있는 유연한 섬유 형태로 구현한 것이다.

깨끗한나라 관계자는 “이 기술을 상용화하면 월간 펄프 사용량을 150t 줄이고 연간 온실가스 배출량은 2900t 이상 감축할 수 있다”며 “올해부터 두루마리 화장지와 미용티슈 등에 본격 적용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한국제지가 2021년 출시한 친환경 포장재 ‘그린 실드’는 식품업계의 베스트셀러가 됐다. 매립하면 6주 후 생분해되고 플라스틱 코팅이 없어 종이 원료로 재활용할 수 있는 장점 덕분이다. 플라스틱보다 잘 분해되면서 물과 기름이 스며들지 않아 치킨 및 라면용 트레이로 쓰이고 있다.

제지업계 관계자는 “세계적으로 플라스틱과 스티로폼 사용량을 줄이고 있어 종이가 조금씩 각광받고 있다”며 “특히 한국은 종이 재활용률이 높고 기술력이 뛰어나 다른 나라보다 빠르게 종이 활용 범위가 넓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은정진 기자 silv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