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몰라서 유명해"…30만원짜리 니치 향수의 배신 [김태형의 향수 B-side]

입력 2026-02-23 11:10
수정 2026-02-23 14:22


"어? 너도 이 향수 써?"

소개팅 자리에서, 혹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이런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나만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싶어 큰맘 먹고 지른 30만 원짜리 '니치 향수'인데, 막상 뿌리고 나가니 옆자리 김 대리도, 지하철 앞자리 대학생에게서도 똑같은 향이 난다. 순간 묘한 배신감이 든다. '남들과 다른 소수의 취향'이라며? 비싼 돈 주고 샀는데 왜 국민 향수가 되어버린 걸까.

지금 대한민국은 '니치 향수 전성시대'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백화점 1층 가장 비싼 자리를 차지하고 포털 사이트 메인 배너에 걸리며, 누구나 이름을 아는 브랜드가 여전히 '니치'라는 간판을 달고 있다. 이건 마치 "나는 아무도 몰라서 유명해"라고 말하는 아이러니와 같다. 도대체 니치 향수가 뭐길래 우리는 이토록 열광하고, 또 배신당하는 걸까. 그 화려한 바틀 속에 숨겨진 자본과 욕망의 냄새를 맡아볼 시간이다.
상업과 예술의 갈림길에서시계를 잠시 18세기 이전으로 돌려보자. 당시 향수는 지금처럼 아무나 백화점에서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의 전속 조향사였던 장 루이 파르종(Jean-Louis Fargeon)처럼, 왕족이나 귀족의 후원을 받는 소수만이 향유할 수 있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터지고 부르주아 계급이 등장하면서 예술계에는 "예술을 위한 예술을 하자"는 낭만적인 바람이 불었다. 하지만 조향사들은 그 바람을 탈 수 없었다. 물감 값에 허덕이는 화가들과 달리, 조향사들은 차원이 다른 비용 문제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꽃 수천 송이에서 겨우 한 방울을 얻는 추출 과정은 거대한 공장과 자본 없이는 불가능했다. 그래서 향수는 태생적으로 순수 예술이 아닌 상업 예술의 길을 걸었다. 겔랑(Guerlain), 루방(Lubin) 같은 전설적인 '조향사 브랜드'들은 그렇게 탄생했다. 자본을 가진 조향사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부티크를 여는 것. 이때까지만 해도 향수의 주인은 조향사였다.

이 견고한 귀족들의 성벽에 틈을 낸 건, 현대 조향계의 아버지라 불리는 프랑수아 코티(Francois Coty)였다. 그는 20세기 초, 비싼 천연 향료 대신 막 개발되기 시작한 합성 향료를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사람들은 합성이라고 하면 "싸구려 아니냐"고 묻겠지만, 천만의 말씀. 이것은 향의 혁명이자 민주화였다.

코티는 가격을 낮춰 향수의 문턱을 없앴고, 백화점이라는 새로운 무대에 발을 들였다. 전설적인 일화가 있다. 백화점 측에 입점을 거절당하자 코티는 매장 한가운데서 보란 듯이 향수병을 바닥에 내던져 깨뜨렸다. 피어오르는 황홀한 향기에 매료된 손님들이 지갑을 열기 시작했고, 매니저는 그를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향수가 특권층의 전유물에서 대중의 기호품으로 내려온 순간이었다.



하지만 코티가 뚫어놓은 그 틈새로 진짜 포식자들이 들어왔다. 바로 샤넬, 디올 같은 오뜨 꾸뛰르 (Haute Couture)들이다. 그들은 옷을 만들던 감각, 그 강력한 무기를 앞세워 향수 시장을 접수했다. 가브리엘 샤넬은 "여자는 꽃 냄새가 아니라 여자의 냄새가 나야 한다"며 성별을 뚜렷하게 갈라놓았고, 마릴린 먼로 같은 당대 최고의 뮤즈에 힘입어 환상을 팔았다. 이때부터 향수는 ‘향기’ 그 자체가 아니라 ‘이미지’가 되었다. 욕망을 파는 '매스 퍼퓨머리'의 시대1970년대부터는 샤넬과 디올 같은 패션 하우스들의 성공 신화를 유심히 지켜본 거대자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디자이너에게 이름만 빌려오고 생산은 글로벌 향료회사와 화장품 대기업에 맡기는 구조의 라이선스 브랜드(License Brand) 시장을 구축하기에 이른다. 바야흐로 '매스 퍼퓨머리(Mass Perfumery)'의 시대가 펼쳐진 것이다.

거대 자본은 향수에 '성공, 권력, 섹시함, 돈'이라는 라벨을 붙여 팔았다. TV 광고 속 모델처럼 되고 싶다면 이 향수를 뿌리라는 식이었다. 자본이 주인이 되고, 조향사는 뒤로 물러났다. 사실 우리가 아는 유명 향수의 대부분은 이렇게 '자본과 욕망'으로 빚어진 기획 상품인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세상이 온통 비슷비슷한 유행 향수로 뒤덮이자, 이에 반기를 든 괴짜들이 나타났다. "나는 마케팅 따위 안 해. 내 주관대로, 내 영감이 시키는 대로 만들 거야."

이들은 대기업처럼 멋진 바틀을 만들 돈이 없어서 투박하고 똑같은 병에 향수를 담았다. 광고할 돈도 없어서 아는 사람들만 아는 골목길에 부티크를 열었다. 대신 그 비용을 온전히 '주관'에 쏟아부었다.

이것이 바로 니치(Niche)의 시작이다. '니치'는 본래 건축 용어로 '장식품을 놓기 위해 벽을 파놓은 틈새'를 뜻하는 니치아(Nicchia)에서 유래했다. 즉, 니치 향수는 럭셔리해서 비싼 향수가 아니라, 거대한 주류 시장의 벽 틈새에 숨어 있는 '작가주의 향수'를 뜻하는 말이었다. 사실 니치 향수는 이 무대에 혜성처럼 나타난 신성이 아닌 19세기 조향사 브랜드 정신으로의 회귀이자, 잊혀졌던 오래된 미래에 가깝다.
니치 향수의 선구자들그 시작을 알린 선구자들을 살펴보자. 1976년 설립된 '라르티잔 파르퓌머(L'Artisan Parfumeur)'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시도를 감행했다. 천연향료로 추출이 불가능했던 블랙베리의 향기를 합성 머스크인 갈락솔라이드(Galaxolide)를 중심으로 구현해낸 '뮈르 에 뮈스크(Mure et Musc)'를 선보인 것이다. 유행을 따르는 대신, 조향사의 상상력으로 자연을 재해석한 이 향수는 니치 향수의 교과서가 되었다.

'딥티크(Diptyque)'는 또 어떠한가. 무대 디자이너, 실내 건축가, 화가였던 세 명의 예술가 친구들은 상업적인 성공보다는 자신들의 추억과 여행의 기억을 향으로 기록하는 데 집중했다. 그들은 마케팅 전문가가 아닌 예술가였기에, 향수병에 담긴 것은 '상품'이 아닌 '이야기'였다.


특히 ‘니콜라이(Parfums de Nicolai)’의 탄생은 상징적이다. 설립자 파트리시아 드 니콜라이는 겔랑 가문의 피를 이어받았지만, 거대 기업의 유리천장을 거부하고 독립했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건 부티크에서 직접 조향한 향수를 팔았다. 조향사가 주인이 되는 가게, 100년 전 겔랑이 했던 방식을 그대로 되살린 것이다.
아닉 구딸이 제주도 향수를 만든 슬픈 사연그런데 2026년 현재, 백화점에서 만나는 니치 향수들은 과연 그 '저항 정신'을 가지고 있을까? 유감스럽게도 대답은 "글쎄"다. 초기 니치 브랜드들이 인기를 끌자, 냄새를 맡은 거대 자본들이 다시 움직였다. 에스티로더, 로레알 같은 공룡 기업들이 야금야금 니치 브랜드들을 인수하기 시작했다. 독립적이었던 브랜드들이 하나둘씩 대기업의 포트폴리오 속으로 사라졌다.

필자에게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프랑스 니치 향수 '아닉 구딸'의 행보다. 프랑스 정통의 향기를 고수하던 이 브랜드는 한국 기업 아모레퍼시픽에 인수된 후, 뜬금없이 제주도를 테마로 한 향수 '릴 오 떼(L'Ile au The)'를 내놓았다. 한국 시장을 겨냥한 현지화 전략이라고? 조향사의 시선에선 '브랜드 세계관의 붕괴'로 보였다. 자본이 주인이 되는 순간, 조향사의 주관은 사라지고 매출을 위한 기획만이 남는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니치 향수의 역설이다. '대중적인 니치'라는 말은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처럼 성립될 수 없는 모순이다. 백화점 1층 명당에 위치해 있고 포털 사이트 배너에 걸려 있다면, 그것은 이미 '틈새'가 아니다.

물론 거대 자본 덕분에 우리는 지구 반대편의 향수를 손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다. 품질 관리도 더 엄격해졌다. 하지만 그 대가로 우리는 '다름'을 잃어가고 있다. 남들과 다르기 위해 선택한 향수가 결국은 거대 자본이 기획한 또 하나의 유행 상품이라니, 씁쓸하지 않은가.

이제 우리에겐 '향 주권'이 필요하다. 유명 연예인이 쓴다고 해서, 가격표가 비싸다고 해서 맹목적으로 지갑을 여는 건 '향기 탐닉'이 아니라 '허영의 소비'다. 진짜 니치는 가격표에 있지 않다. 마케팅이라는 화장을 지우고, 내 코로 직접 맡았을 때 비로소 가슴을 울리는 향. 남들이 뭐라든 내 취향과 서사가 담긴 향. 그 틈새를 찾아내는 것이야말로 진짜 '니치'를 즐기는 방법이다. 당신이 지금 뿌린 그 향수, 정말 당신의 이야기(B-Side)를 담고 있는가?

김태형 조향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