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팔리는 배우보다 귀한 배우가 된 심은경

입력 2026-02-03 16:01
수정 2026-02-03 16:02
영화 <여행과 나날>이 지난 해인 2025년 말 제99회 키네마 준보 선정 일본 영화 ‘베스트 10’ 1위에 올랐다. 솔직히 심은경 때문은 아니다. 감독 미야케 쇼 영향이 컸다. 쇼는 일본 영화계의, 이미 떠오른 별이다. 그의 전작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새벽의 모든> 역시 각각 2022년과 2024년에 1위였다. 키네마 준보는 일본판 카이에 뒤 시네마이다. 키네마 준보는 1919년에 창간됐다. 100년이 넘은 영화 비평지이다. 준보는 순보(旬報)이다. 열흘 순 자이다. 키네마 준보는 최초엔 열흘에 한 번, 한 달에 세 번 발행됐었다. 지금은 월간이다. 줄여서 ‘키네준’이라고들 한다. 여기서 세 번이나 1위를 한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이 여배우 열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렇게 키네마 준보에서 세 번이나 1위를 한 감독이 왜 한국 여배우인 심은경을 ‘픽’했는가이다. 그 점이 매우 중요하다.



미야케 쇼와 심은경의 만남은, 말도 안 되는 얘기라 할 수 있지만, 약간은 일본불교적인 측면이 있다. 일본은 일본이다. 세계 어떤 나라와도 다른 특질과 ‘유니크’함을 지닌다. 일본불교는 불교도 아니고 불교도 아닌 게 아닌, 아주 다른 종교이다. 대승적이지 않고 소승적이다. 전체주의의 역사로 인해 보수주의가 고착화한 일본 사회에 미야케 쇼는 지친 듯이 보인다. 그는 작품 내내 자기 수행적이면서 정서적으로는 관조적 태도를 지향한다. 심은경 역시 한국의 격렬한 사회 변화의 담론에 지쳤을 것이다. 특히 모든 것을 흥행과 경쟁의 수치로 치환시키는 한국 영화계의 풍토에 넌더리가 났을 것이다. 둘은 고독한 개인의 연대를 꿈꾼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둘은 처음의 만남부터 불꽃 튀는 내면의 공감을 이루어 냈을 것이다.

둘의 나이가 젊은 것도 저러한 인생관을 구현하고 감행하는 용기를 만들게 했을 것이다. 미야케 쇼는 41세이고 심은경은 31세이다. 특히 여전히 어린 심은경은 새로운 것,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 완전히 외딴곳에서 홀로 버티며 견디는 것을 충분히 할 수 있는 때라고 자신을 닦아 세웠을 것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기존의 자기를 버리고 새로운 자아를 만들어 나가는 것은 40 중반 이후에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2, 30대에는 비록 저런 실험이 실패한다 해도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는 때이다. 그러니 심은경의 ‘일본 실험’은 ‘충분히’ 젊기에 이루어진 일이다. 게다가 성공까지 했으니 더더욱 좋은 일이다. 물론 심은경은 여전히 모자라고 ‘배고파’할 것이다.



솔직히 심은경이 2020년 일본 아카데미에서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탄 영화 <신문기자>는 서사가 그다지 순탄한 작품이 아니다. 실제 사건을 한국식으로 ‘확 까발리지’ 않고 에둘러 가는 일본식 표현 방식이 속 시원하지 못했던 영화였다. <신문기자>는 암살당한 아베 전 총리에게 그가 죽기 전까지 따라붙었던 학원(학교) 스캔들 두 개를 합한 내용이다. 하나는 모리모토 학원 스캔들이고 하나는 가케 학원 스캔들이다. 사학재단 모리모토 스캔들에는 아베의 부인인 아키에 여사가 관여돼 있다. 그녀는 학교가 국유지를 감정가의 14% 수준이라는 헐값으로 매입하게 하는 데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가케 학원은 수의학부 신설 인가과정을 아베 내각이 지원하고 해당 행정 부서인 내무부(행안부)에서 압력을 가했다는 내용의 의혹이다.

영화 <신문기자>는 주인공인 토우토 신문의 사회부 기자 요시오카(심은경)가 제보를 통해 이 비리의 실체에 접근해 나간다는 이야기이다. 한국식으로 얘기하면 서스펜스 제로, 뭔 얘기가 뭔 얘긴지 오리무중의 끝판왕이었지만 역시 일본은 일본만의 무엇이 있어서인지 자국 내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일본 영화는 한국 영화처럼(예컨대 <서울의 봄>처럼) 실명을 연상케 하는 이름을 쓰거나 실제 인물을 생각나게 하는 캐릭터라이징을 하지 않는다. 일본은 영화나 심지어 개그에서조차 정치 풍자를 직접적으로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영화 <신문기자>가 일본에서 태풍을 일으켰지만, 한국 극장가에서는 미풍에 그친 이유다.




<신문기자>의 흥행따위는 차치하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심은경이 단박에 일본 영화계의 핵심으로 떠올랐다는 것이다. 네이티브에 가까운 완벽한 일본어 구사, 외모를 앞세우지 않는 차분한 내면 연기 등이 일본인들에게 더 ‘일본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심은경은 <신문기자> 이후 약 6년간 엄청나게 바쁜 스케줄을 소화했다. <블루 아워>, <가공OL일기>, <7인의 비서> (극장판), <동백정원> 등의 영화와 <7인의 비서>, <아노니머스~경시청 “손가락 살인” 대책실~>, <군청영역>, <백만 번 말할 걸 그랬어> 등의 드라마를 찍었다. 그러다 이번 영화 <여행과 나날>에서 정점에 올라섰다. 심은경은 명실공히 일본 배우이자 한국 배우가 됐다. 이른바 ‘패러렐 커리어(Parallel Career)’이다. 한국 배우로서 주연급 패러렐이 된 인물은 심은경밖에 없다.

심은경이 한국에서 박제화돼 수시로 나오는 영화 캐릭터가 <광해, 왕이 된 남자>이다. 임금 앞에서 독이 든 음식을 자진해서 먹고 피를 토하며 죽는 궁녀 사월이 역이었다. 그 장면은 이 영화의 시그니처이다. <수상한 그녀>에서는 할머니와 몸이 바뀐 손녀딸 역할을 했고 이 해괴한 코미디는 2014년 관객을 9백만 가까이 모은 대히트를 기록했다. 한국 영화에서 심은경의 정점은 그런 대목들이었다. 구김살 없는 이미지, 정직하고 순수한 느낌, 젊고 발랄한 성격이야말로 심은경을 규정하는 단어들이다. 그녀의 미모는 빼어난 것까지는 아니다. 빼어난 미모로 고친 얼굴도 아니다. 성형 얼굴이 아니라는 점은 심은경에게 더욱 강점으로 작용한다. 서구형의 미모라면 인기가 다른 방향으로 갔을 것이다. 다소 각이 있다고 해도 깨끗한 얼굴이면 된다. 삶의 주변에서 어마어마한 미인은 별나라에 사는 외계인일 뿐이다. 심은경의 인기가 주는 특징은 일상성이다. ‘나 같은 사람들’하고도 같이 살아가거나 같이 살 수 있는 여자라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이런 여배우는 오래 간다. 인생은 강해서 오래가는 것이 아니라, 오래가서 강해지는 것이다. 심은경은 강한 여배우이다.



온갖 사람들에게 이유 없이 뭇매를 맞았지만, 연상호의 <염력>(2018)은 좋은 영화였다. 무엇보다 연상호답지 않게 정치적인 영화였다. 게다가 정치적 올바름이 가득한 영화였다. 그런데 바로 그 점이 젊은 층 관객들에게 이 영화가 외면당한 주요 이유였던 것처럼 보인다. 2, 30대는 ‘정치적 올바름’이란 표현을 달갑지 않아 하는 것으로 영화 제작자들 사이에서는 알려져 있다. <염력>에는 염력을 이용해서라도 용산 (재개발) 사태 때 추락한 세입자, 투입됐다가 떨어져 죽은 전경(들)을 다시 하늘 위로 부상(浮上)시키고 싶어 하는 열망이 담겨 있다. 여기에서 심은경은 염력을 쓰는 아버지(류승룡)와 부녀 관계를 회복하는 딸 미루로 나온다. 미루 역시 세입자이고 재개발 사업으로 용역 깡패에 시달리지만, 이들과 늘 당차게 맞서는 젊은 여성이다. 당차고 당당한 여자. 심은경이 잘하는 역할이다. 그녀에게 딱 맞는 캐릭터이다.



<염력>은 좋은 영화였지만 흥행에서는 실패했다. 심은경이 한국 영화계의 지나친 성적 우월주의에 환멸을 느낀 것은 아마 이때부터였던 듯싶다. 생각해 보면 심은경의 필모그래피에 <불신지옥> <퀴즈왕> 같은 개성 있는 작품이 있음에도 늘 <써니>가 우선 거론되는 것도 다소 불만의 요소였을 것이다.

냉정하게 얘기해서 심은경이 어마어마한 톱스타는 아니다. 본인도 그걸 원하지 않을 것이다. 심은경은 늘 자신의 영혼을 위해 조용한 도피처를 찾는 스타일일 것이다. 적당히 유명해져서 좋은 작품을 많이 하고 조용히 살아가는 것, 유난을 떨지 않되 열심히 살아가는 삶을 원할 것이다. 이번 <여행과 나날>의 한국 프로모션에서 심은경을 지켜보면 이 친구는 정말 열심히 하는 친구군, 하는 생각을 절로 하게 된다.



좋은 배우이다. 그러나 좋은 배우보다는 잘 팔리는 배우를 원하는 세상이다. 그래서 심은경은 보기 드문 배우이며 그렇기에 더욱 귀중한 배우이다. 아직 한참 젊다. 30년은 더 활발하게 활동할 것이다. 언젠가는 일본조차 벗어나서 유럽으로 나아갈 것이다. 그럴 재능이 충분해 보인다. 심은경의 향후 행보를 차분히 지켜보게 되는 이유이다. 3월부터 국내 드라마 <대한민국에서 건물주 되는 법>에 출연한다. 근데 제목이 너무 한국적이지 않아?

오동진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