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 이후 제 얼굴 포스터에 이렇게 크게 나온 게 한 10년 된 것 같아요. '기생충' 부터 많은 영화에선 많은 형, 누나 뒤에 숨을 수 있었는데 이렇게 딱 '제 영화에요'하는 게 오랜만입니다. 원톱에 대한 자부심보다 새롭다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 감독님 손 잡고 세상 밖으로 나오는 느낌이라 부담감도 있습니다."
배우 최우식이 영화 '넘버원'을 통해 다시 한번 깊은 감정 연기를 선보인다. 2019년 '기생충' 이후 장혜진과 두 번째 모자 호흡을 맞춘 작품이다.
3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최우식은 "요즘 나오는 영화들이 스코어가 좋은 편이 아니라 긴장도 되고, 사람들이 즐겨보는 액션, 호러 장르도 아니어서 떨린다"며 "그래도 입소문이 잘 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왕과 사는 남자', '휴민트'와 함께 설 연휴 경쟁을 벌이는 것에 대해 "다 같이 잘 됐으면 좋겠다"며 "다양한 먹을거리들이 있어서 극장에 놀어와 다양한 경험을 해보셨으면 좋겠다"고바람을 드러냈다.
'넘버원'은 우와노 소라 작가의 소설 '어머니의 집밥을 먹을 수 있는 횟수는 328번 남았습니다'를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엄마의 밥을 먹을 때마다 숫자가 하나씩 줄어들고, 그 숫자가 0이 되면 엄마 은실(장혜진)가 세상을 떠난다는 설정 아래, 주인공 하민(최우식)이 겪는 감정의 균열과 모순을 담았다.
이 영화는 김태용 감독과의 두 번째 작업이자, 첫 번째 작품인 '거인' 이후 약 10년 만의 재회다. '거인'에서 큰 주목을 받으며 각종 상을 수상한 최우식은 이번에도 감독과의 신뢰 속에서 새로운 얼굴을 보여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거인' 때는 너무 힘든 감정들이 많았고, 제가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몇 번이나 거절했어요. 이번에도 처음엔 걱정을 많이 했지만, 감독님이 가진 진심과 이 작품이 지닌 따뜻한 메시지가 저를 움직이게 했죠."
김 감독은 스스로 '최우식 전문가'를 자처했다. 최우식은 "도대체 어디서 그런 얘기를 하고 다니는 거냐"며 웃었다. "그런 말씀 좀 안하셨으면 좋겠지만,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맞는 말인 것 같아요. 제가 모니터로 안 가도 다 알고, 언제 가장 불편해 하고 행복해 하는지 잘 아세요. 업계에서 저도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레이어가 쌓여 솔직하지 않을 때도 많은데 껍데기 없는 달걀 같을 때에 처음 만났기 때문에 서로를 잘아는 것 같습니다."
김 감독은 다시 만난 최우식에게 "너 다 컸구나. 배우가 됐구나"하고 감탄했다고. 최우식은 "제가 지금 37살"이라며 "감독이 생각했을 때 제가 더 '쌩'이었던 것 같다. 배우라면 하는 그런 것들을 하면 감독이 조금 놀라더라"고 말했다.
최우식은 극 중 엄마의 죽음을 막기 위해 오히려 그의 음식을 피하게 되는 인물 하민을 연기했다. 그는 "지키기 위해 멀어져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안타까웠다"며 "사랑을 표현하지 못하고 회피하는 하민의 모습이 연기하면서도 참 먹먹했다"고 털어놨다.
그는 연기하면서 자연스럽게 실제 가족을 떠올렸다고 한다. "저는 늦둥이예요. 형과 일곱 살 차이가 나는데, 어린 시절부터 다른 친구들 부모님보다 저희 부모님 연세가 좀 있으세요. 어릴 때부터 막연히 걱정을 많이 했어요. 이 작품을 하면서 예전 기억이 다시 떠오르더라고요. 가족에게도 유통기한이 있다는 걸 처음으로 피부로 느꼈던 것 같아요."
실제 어머니와의 관계를 떠올리는 질문에는 웃으며 "엄마에게 사랑한다고 자주 말하는 편"이라고 답했지만, 감정적으로는 조심스러운 부분이 많았다고 했다.
"기쁜 일은 나누려고 하지만, 스트레스나 걱정 같은 건 부모님께 잘 말하지 않아요. 의지하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스스로 이겨내야 한다는 생각을 해왔어요. 그런 제 모습이 하민과 닮아 있어서 더 몰입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극 중 엄마 은실 역은 '기생충'에서 호흡을 맞춘 배우 장혜진이 맡았다. '넘버원'은 두 배우의 두 번째 모자 연기다. "장혜진 선배님이 '기생충' 때부터 저를 보면 진짜 친아들 같다고 하셨어요. 사진을 봐도 닮았고, 목소리 톤도 제 실제 엄마와 비슷해요. 이번에는 '기생충' 때보다 더 깊게 연기적으로 교감할 수 있었어요."
최우식은 사투리 연기에도 도전했다. 이번 작품에서 그는 경상도 사투리를 사용하는 하민 캐릭터를 위해 대구·부산 지역 말씨의 차이를 배우며 현장에서 디테일을 조정했다. "'기생충'에서는 앙상블 위주 장면이 많아서 감정 교류가 적었다면, 이번엔 정말 많이 주고받았어요.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울었던 촬영이었죠."
작품 속에서 음식은 상징이자 감정의 도구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먹고 싶은 한 끼를 묻자, 평범한 집밥을 이야기했다. "스팸, 계란후라이, 김치찌개요. 저희 어머니가 해주는 밥이니까 특별한 거죠. 어디서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이지만, 엄마가 해줬을 때만 느낄 수 있는 맛이 있어요."
이번 영화에서는 실제로도 푸드팀이 현장에 상주해 매번 따뜻한 음식을 제공했다. 그는 "먹는 연기를 할 때 감정적으로도 도움이 많이 됐다"며 "그 덕분에 촬영 중에도 밥을 잘 챙겨 먹었고 체중도 유지됐다"고 웃었다.
최우식은 영화가 전개되면서 한층 수척해진 모습으로 등장한다. 실제로 살을 뺀 것이냐는 질문에 그는 "촬영하면 살이 쭉쭉 빠지는 스타일"이라며 웃었다.
"이번에도 체중이 조금 줄었는데, 영화에서 분장으로 잘 다듬어 주셔서 더 그렇게 보였던 것 같아요. 영화를 보는데 제가 너무 아프고 더러워 보일 때도 있더라고요. 다행히 그런 장면들이 감정적으로 슬픈 장면 뒤에 붙어 있어서, 오히려 피식 웃을 수 있는 게 아닐까 자기최면 하고 있습니다."
최우식은 이번 영화가 아마 마지막 교복 촬영이 될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아직은 입을 수 있으면 계속 입고 싶은데, 이번이 마지막일 것 같다"며 "비슷한 나이의 배우들과 함께 찍으니까 덜 튀긴 했는데, 현장에서 진짜 고등학생 옆에 세워두니 정말 웃기더라"고 귀띔했다.
이어 "감정선이나 연기 톤도 고등학생일 때와 성인일 때는 확실히 다르다. 예전엔 딱 보면 ‘고등학생이면 이럴 거야’라는 게 감으로 왔는데, 지금은 세상에 찌들다 보니 그 순수함을 잃은 것 같다"고 털어놨다.
'넘버원'이 관객에게 어떤 영화로 남았으면 좋겠느냐는 질문에는, 그는 깊은 여운이 담긴 바람을 전했다.
"시나리오를 읽고 나서 '우리에게 시간이 많지 않다'는 메시지를 되새기게 되더라고요. 속으로라도 한 번 그런 생각을 해보는 것 자체가 저는 성장이라고 생각해요. 10년, 20년이 지나도 여전히 같은 메시지를 줄 수 있는 영화, 나이든 사람도, 어린 친구도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영화로 남았으면 좋겠어요."
최근 몇 년간 감정적으로 힘든 작품을 꺼렸던 이유에 대해서도 진솔하게 털어놨다.
"연기를 하면서 마음이 무거워질까봐 그런 작품을 피했던 것 같아요. 사실 힘들어서라기보다 '넘버원' 같은 작품을 못 만났기 때문이죠. 이번엔 말도 잘 통하고, 마음 맞는 감독님과 배우들을 만나서 정말 즐겁게 촬영했어요. 어떤 작품이든 사람만 잘 맞으면 행복하게 찍을 수 있겠다는 걸 느꼈죠."
그는 연기를 대하는 태도에 있어, 작품보다 '사람'이 먼저라고 강조했다. "항상 어떤 장르나 캐릭터를 하고 싶냐고 물으면 전 늘 좋은 사람들이랑 일하고 싶다고 답했어요. 좋은 현장에서 좋은 사람들과 연기하는 게 제 목표예요. 감정적으로 슬픈 이야기라도, 좋은 사람들과 함께라면 괜찮더라고요. 앞으로는 장르나 이야기보다 누구와 함께하느냐가 더 중요해질 것 같아요. 답은 하나예요. 좋은 사람들이랑 하는 게 최고죠."
영화 '넘버원'은 오는 11일 개봉한다.
김예랑 한경닷컴 기자 yesr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