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정부의 모태펀드 자금으로 조성된 벤처펀드가 해외 소재 기업에 투자한 비중이다. 글로벌 시장을 겨냥해 해외로 본사를 옮기는 한국 스타트업이 빠르게 늘고 있지만, 정책자금의 흐름은 여전히 국내에 머물러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해 정부가 국외창업기업에 대한 투자 허용으로 제도를 일부 손질했음에도 현장에서는 요건이 지나치게 까다로워 실질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하소연이 끊이지 않는다. 벤처투자의 ‘속지주의’가 고착될 경우 글로벌로 성장하는 한인 스타트업을 뒷받침하기 어렵고, 유망 기업에 대한 투자 기회마저 놓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미국 듀크대 전기컴퓨터공학과·물리학과의 이정상 교수가 창업한 양자컴퓨팅 스타트업 아이온큐에 한국 벤처자본이 투입될 가능성은 앞으로도 크지 않을 것이라는 회의적인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국외기업 투자 4%에도 못 미쳐3일 한국벤처투자에 따르면 지난해 상반기 모태펀드 출자 펀드의 총 투자 금액은 1조2638억원으로 집계됐다. 이 가운데 해외 소재 기업에 대한 투자는 480억원으로 전체의 3.8%에 불과했다. 투자 기업 수 기준으로도 해외 스타트업은 26곳에 그쳐 전체의 4.4%에 머물렀다. 이 통계에는 순수 해외 기업과 다국적 기업의 해외 법인 투자도 포함돼 있어, 한인 창업자가 설립한 ‘국외창업기업’만 따로 보면 실제 투자 비중은 이보다 더 낮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정부 역시 이러한 문제의식을 인식하고 있다. 이에 따라 지난해 5월 모태펀드 운용 방향을 일부 조정했다. 그동안 모태펀드 출자 펀드는 주목적 투자 대상을 국내 벤처기업으로 한정해 왔고, 해외 본사를 둔 기업은 사실상 부목적 투자로 분류됐다. 법적으로 국외창업기업 투자가 금지된 것은 아니었지만, 주목적 투자 비율을 우선 충족해야 하는 구조 탓에 실제 투자 유인은 크지 않았다는 게 업계의 설명이다.
이에 정부는 해외에 본사를 둔 기업이라 하더라도 한국인 지분이 30% 이상이고, 글로벌 진출 전략과 기술 경쟁력, 실질적인 매출 성장 등이 확인되면 ‘주목적 투자’로 인정하도록 기준을 완화했다. 해외로 나간 한국 창업자의 글로벌 성장을 제도권 자금으로 뒷받침하겠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제도 변화가 실제 투자 확대로 이어지지는 않고 있다는 것이 업계의 공통된 시각이다. 모태펀드 출자를 받아 결성된 벤처펀드는 결성 단계부터 투자 대상과 전략, 정책 목적을 명확히 정한 약정(LPA)을 체결한다. 이 과정에서 상당수 펀드는 국내 기업 투자를 중심으로 설계돼 있으며, 투자 비중과 대상 역시 계약으로 엄격히 묶여 있다. 정부 지침이 바뀌었다고 해도 이미 결성된 펀드의 투자 전략과 약정 구조가 자동으로 수정되는 것은 아니어서, 운용사 입장에서는 국외창업기업 투자를 주목적 투자로 적극 확대하는 데 현실적인 제약이 따른다는 설명이다.◆사후 책임 등 ‘보이지 않는 벽’사후 관리와 평가 구조 역시 운용사들의 판단을 보수적으로 만드는 요인으로 꼽힌다. 모태펀드 자금이 포함된 펀드는 투자 이후에도 집행의 적정성과 정책 목적 부합 여부, 관리 책임 등을 지속적으로 점검받는다. 국내 기업의 경우 경영 참여나 사업 방향 조율을 통해 일정 수준의 관리가 가능하지만, 해외 기업은 물리적 거리와 법·제도 차이로 인해 동일한 방식의 관리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투자 성과와 관리 책임은 같은 기준으로 평가받아야 하는 만큼, 운용사들이 제도 변화만으로 해외 투자에 선뜻 나서기 어렵다는 것이다.
실무적인 장벽도 여전하다. 영문 계약서 검토, 현지 법률·세무 리스크, 투자 이후 관리 비용 부담 등이 대표적이다. 한 국내 VC 임원은 “해외 스타트업 투자는 정보 비대칭이 크고 관리 난도가 높은데, 성과가 나지 않을 경우 정책자금 운용사로서 감내해야 할 부담은 훨씬 크다”며 “굳이 리스크를 먼저 떠안을 유인이 크지 않다”고 말했다.◆해외 창업 증가세와 대조적이 같은 수치는 해외 진출 스타트업 증가세와 뚜렷한 대비를 이룬다. 벤처투자 분석 플랫폼 더브이씨에 따르면 해외에 본사를 둔 한국 스타트업은 2024년 말 186개에서 2025년 말 215개로 1년 새 13% 이상 늘었다. 글로벌 시장을 무대로 한 창업은 빠르게 증가하고 있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국내 정책자금의 흐름은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다.
이러한 구조는 스타트업의 선택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글로벌 시장을 목표로 하는 창업자들 사이에서는 정책자금이 포함된 국내 투자를 오히려 부담으로 인식하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미국에 진출한 한인 스타트업 대표는 “국내 투자자는 투자 논의 초기부터 규정과 사후 관리부터 언급한다”며 “추가 투자 유치나 본사 이전 같은 중요한 결정을 할 때마다 다시 설명하고 동의를 구해야 해 속도가 떨어진다”고 말했다. 그는 “글로벌 시장에서는 속도가 경쟁력인데, 이런 구조라면 차라리 미국 VC 자금만으로 가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는 창업자가 늘고 있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미국 진출 스타트업 대표는 “해외 고객과 투자자를 상대하려면 법인 구조상 국외 기업 형태가 훨씬 유리한 경우가 많다”며 “국외창업기업의 중요성은 커지고 있는데, 제도는 여전히 국내 기업을 전제로 설계돼 지원의 사각지대가 발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해외 진출을 선택할수록 국내 정책자금과의 접점은 줄어들고, 국내 자금을 선택할수록 글로벌 확장은 제약받는 구조가 고착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국내 VC들이 글로벌 투자 라운드에 구조적으로 끼기 어려운 현실도 이중 부담으로 작용한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글로벌 스타트업 투자 시장에서는 단일 라운드에서 수백억~수천억원의 자금이 한 번에 집행되는 사례가 적지 않지만, 국내 VC들의 평균 투자 티켓 사이즈는 이에 크게 못 미친다. 투자 계약 문화 역시 차이가 크다. 한 VC 관계자는 “미국은 표준화된 계약과 빠른 의사결정이 전제되지만, 국내 VC는 계약 구조와 리스크 검토에 훨씬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며 “이런 차이 때문에 해외 투자 자체의 진입 장벽이 높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정책자금이 포함된 펀드일수록 이러한 부담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안정훈 기자 ajh6321@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