쉴 새 없이 내달리던 국내 증시가 ‘워시 쇼크’에 ‘검은 월요일’을 맞았다. 미국 중앙은행(Fed) 차기 의장으로 지명된 케빈 워시 전 Fed 이사의 매파(통화 긴축 선호) 성향이 부각되자 외국인과 기관투자가가 앞다퉈 ‘패닉 셀’에 나섰다. 다만 인준 과정에서 불확실성이 제거되고 자산 가격이 반등할 것이라는 전망도 적지 않게 나온다.
2일 코스피지수는 5.26% 급락한 4949.67에 거래를 마쳤다. 지난달 26일 종가 기준 5000을 돌파한 뒤 4거래일 만에 ‘오천피’ 아래로 내려왔다. 코스피지수가 하루에 5% 이상 밀린 것은 지난해 4월 이후 처음이다. 한국거래소는 이날 낮 12시30분께 ‘매도 사이드카’(코스피200 선물의 5% 이상 변동)를 발동했다. 사이드카 발동은 지난해 11월 5일 이후 약 3개월 만이다.
외국인(-2조5168억원)과 기관(-2조2126억원)이 총 4조7294억원어치 물량을 내던지며 급락세를 주도했다. 개인이 4조5874억원어치 순매수로 매물을 받아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날 개인 순매수액은 2021년 1월 11일(4조4921억원)의 종전 기록을 뛰어넘은 역대 최대 규모다. 코스닥지수도 4.44% 밀린 1098.36에 마감해 1100을 밑돌았다.
워시 의장 후보의 매파 성향이 부각된 점과 은(銀)을 중심으로 한 원자재 가격 발작이 증시에 충격을 준 가장 큰 요인으로 꼽힌다. 워시가 2006~2011년 Fed 이사로 재직할 당시 양적완화(QE)를 비판하며 사임했을 정도로 유동성 공급에 부정적인 인물이라는 사실이 부각됐다. 원자재 가격 쇼크가 발생하자 은 등을 담보로 투자해온 펀드의 담보 가치가 하락하며 대규모 매도 물량이 나온 것으로 분석된다.
다른 아시아 증시도 일제히 약세를 나타냈다. 일본 닛케이225지수는 1.25%, 중국 상하이종합지수는 2.48% 하락했다.
다만 이날 증시 하락폭이 과도하다는 의견이 많다. 자산 가격이 크게 오른 만큼 불확실성이 단기 하락의 빌미가 됐을 뿐이라는 얘기다. 강대권 라이프자산운용 대표는 “연초부터 급등해 2월은 어차피 쉬어갈 가능성이 높은 시기였다”며 “3월 이후 실적주를 중심으로 반등해 강세장을 이어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날 서울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오후 3시30분 기준)은 24원80전 오른 1464원30전으로 주간 거래를 마쳤다. 지난달 23일(1465원80전) 후 가장 높은 수치다.
코스피 매도 사이드카…4거래일 만에 5000 붕괴
외국인·기관 5조 '패닉셀'…불확실성 빌미로 매물 쏟아내
“(케빈 워시는) 차기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 후보였던 나머지 세 명에 비해 덜 비둘기파(통화완화 선호)적인 인물이다. 대차대조표 축소와 관련해 뚜렷한 입장 변화가 없다면 양적긴축(QT)을 재개할 수 있을 것이다.”
차기 Fed 의장으로 지명된 워시 전 이사에 대한 모건스탠리 평가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금리를 낮출 인사를 지명할 것이란 예상과 달리 과거 매파적 성향을 보인 워시를 낙점하자 글로벌 금융시장이 불확실성에 휩싸였다. 원자재 가격 급락에 이어 2월 첫 거래일인 2일 아시아 증시가 큰 폭 하락세를 보이면서 향후 국내 증시에도 경고등이 켜졌다는 분석이 나온다.◇외국인·기관, 반도체 투톱 투매
이날 유가증권시장에선 투자 주체별로 좀처럼 보기 힘든 순매수·순매도 규모가 찍혔다. 개인은 4조5874억원어치 순매수한 반면 외국인과 기관투자가는 각각 2조5168억원, 2조2126억원어치 물량을 내던졌다. 개인 순매수는 ‘동학개미운동’이 정점에 달한 2021년 1월 11일의 4조4921억원을 뛰어넘는 역대 최대 규모다. 코스닥시장과 합한 개인 순매수액은 총 4조8016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최근 코스피지수 급등에 차익 실현 시점을 재고 있던 외국인은 반도체 주식을 중심으로 ‘역대급’ 투매에 나섰다. 외국인이 가장 많이 팔아치운 종목은 SK하이닉스였다. 무려 1조4550억원어치를 매도했다. SK하이닉스 지분을 약 20% 보유해 움직임이 비슷한 SK스퀘어 주식도 1465억원어치 덜어냈다. 두 종목은 이날 각각 8.69%, 11.4% 급락했다. 외국인은 삼성전자(-9718억원)도 1조원 가까이 팔아치웠다.
이날 기관도 두 종목을 각각 4615억원, 4799억원어치 순매도하며 ‘반도체 투톱’ 시가총액이 100조원 넘게 증발했다. 6.29% 급락한 삼성전자 시총은 우선주를 합쳐 65조7449억원 감소했다. SK하이닉스 시총도 57조5121억원이나 녹아내렸다. 두 종목의 시총 감소 규모는 이날만 123조2570억원에 달한다.
외국인과 기관은 이외에도 효성중공업, 현대차 등 최근 급등한 종목들을 수백억원어치 내던지며 차익 실현에 열을 올렸다. 한 자산운용사 주식운용본부장은 “지난달 국내 증시가 많이 올라 차익 실현 타이밍을 재고 있던 투자자들이 미국발 불확실성을 빌미로 매물을 쏟아냈다”고 말했다.◇“우려 불식시킬 것”…낙폭 과도 의견도다만 이 같은 급락세가 계속될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맞서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 지지세가 약해지는 상황에서 워시 차기 의장이 예상과 달리 자기 색깔을 고수하면서 유동성이 축소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JP모간은 “워시가 과거 매파적 기조에서 비둘기파로 전환한 것으로 보이지만 중간선거 이후 매파적 견해로 회귀할 가능성이 있다”며 “대차대조표 축소 추진 시 장기금리 상방 압력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나 이 같은 우려가 과도하다는 시각도 있다. 현재 Fed가 긴축 정책을 쓸 상황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김경훈 다올투자증권 연구원은 “시중 유동성 흡수가 과도한 수준에 가까워졌기에 Fed가 양적긴축 종료를 언급한 것”이라며 “공급 진작을 위해서도 금리가 낮은 수준에 머무르는 것이 전제 조건”이라고 말했다.
워시가 Fed 이사로 재직한 것은 약 15년 전으로, 의장 인준 과정에서 시장 우려를 불식할 것이란 기대도 나온다. 한 자산운용사 대표는 “Fed 리더십이 교체될 때는 항상 시장에 불확실성이 유입됐고 이날 낙폭이 적당한지 의문”이라며 “인공지능에 따른 생산성 향상을 중시하는 워시의 의견은 주식시장에 호재”라고 분석했다.
박한신/심성미/선한결/맹진규 기자 p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