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 앨범 수집가에게 레이블이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이는 자신의 재즈 취향을 설명해 주는 바로미터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나는 1960년대까지 녹음한 블루 노트 레이블이 최고라고 생각해”라는 발언은 당시에 존재했던 리버사이드, 어틀랜틱, 임펄스, 컬럼비아, 사보이 등의 재즈 레이블과는 비교우위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만큼 한국 재즈 애호가에게 블루 노트는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소개하는 기타리스트 랄프 타우너는 블루 노트와는 대척점에 서 있는 레이블에서 음반을 출시한 인물이다. 그는 Edition Of Contemporary Music의 약자인 ECM 레이블에서 50년 넘게 음반을 제작했다. 무려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오로지 한 레이블에서 자신의 음악 세계를 변함없이 이어갔다는 것. 이는 ECM 레이블과 자신이 일심동체나 마찬가지임을 증명해 주는 놀라운 기록지다.
ECM은 1969년 독일 출신의 만프레드 아이허에 의해 설립한 레코드사이다. 독일의 소도시 린다우에서 태어난 그는 베를린 음악 아카데미에서 수학했다. 그의 음악적 출발점은 재즈가 아닌 클래식이었다.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콘트라베이스 주자로 경력을 시작했던 그는 조 피에라가 리더로 있던 프리 재즈 트리오의 일원으로 합류하면서 음악 노선의 변화를 시도했다.
만프레드 아이허의 세 번째 선택지는 뮤지션이 아닌 음반 제작자였다. 그는 경영 악화로 폐업 위기에 몰렸던 뮌헨의 군소 레이블인 JAPO를 인수하는 모험을 강행했다. 이미 만프레드 아이허의 머릿속에는 블루 노트가 들려줬던 메인스트림 재즈와는 다른 색깔의 재즈가 존재했다. 그는 재즈, 프리 재즈, 아방가르드, 민속 음악, 클래식 등을 넘나드는 사운드를 ECM 레이블에서 구현하고자 했다.
ECM 레이블에서 랄프 타우너는 대중적인 측면에서 팻 메스니와는 차이가 있지만 만프레드 아이허가 원했던 큰 그림을 채워주는 간판 뮤지션에 속했다. 그렇기에 1984년 작인 <퍼스트 사이클(First Circle)>을 끝으로 ECM 레이블과 결별했던 팻 메스니와 달리 랄프 타우너는 죽을 때까지도 변함없이 ECM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12현 기타, 클래식 기타, 피아노, 신디사이저, 타악기, 트럼펫, 프렌치 혼을 연주하는 다중악기 주자이기도 했다.
1958년부터 미국 오리건 대학교에서 작곡을 배웠던 그는 오스트리아 비엔나 음악 아카데미에서 클래식 기타를 전공했다. 랄프 타우너는 1970년 폴 맥캔들리스, 글렌 무어, 콜린 월콧과 함께 결성한 진보 그룹 오리건의 창립 멤버가 되었다. 타임에서 오리건으로 그룹 명칭을 바꾼 이들은 뉴욕을 거점으로 재즈, 클래식, 인도음악, 아방가르드를 넘나드는 실험을 이어나갔다.
ECM에서 발표한 랄프 타우너의 앨범은 그룹과 솔로 작품에서 차이가 느껴진다. 실험정신이 돋보이는 음악이 그룹 형태의 레코딩이라면 상대적으로 편하게 감상할 수 있는 음악은 솔로 레코딩에서 확인할 수 있다. 때문에 랄프 타우너의 음악을 처음 접하는 이라면 2가지 형태의 음반을 함께 감상해 보기를 권한다. 여기에 오리건 그룹 시절의 음반도 추가한다면 랄프 타우너 트라이앵글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기타 연주는 벌판 위에서 불어오는 스산한 가을바람이 연상된다. 어떤 위로나 격려도 존재하지 않는 공간에서 외롭게 어쿠스틱 기타 줄을 튕기는 외톨이의 그림자가 떠오른다. 변함없이 슬픔의 진혼곡을 연주하는 랄프 타우너는 2023년 스위스 루가노에서 <앳 퍼스트 라이트(At First Light)>를 녹음했다. 나는 2019년 가을에 헤르만 헤세의 산책로가 있는 루가노를 방문했다. 그곳에는 외로움을 벗 삼아 예술혼을 불태웠던 작가의 발자취가 남아 있었다. 랄프 타우너는 길고 지루했던 팬데믹과, 허허로운 노년기의 일상을 루가노라는 침묵의 도시에서 <앳 퍼스트 라이트(At First Light)>에 담담하게 재현했다. 그는 2026년 1월 18일, 85세의 나이를 끝으로 영원불멸의 공간으로 산화했다.
[랄프 타우너 추천 앨범]
1. Diary 다이어리, ECM, 1973년
2. Winter Light 윈터 라이트, Vanguard, 1974년
3. Solstice 솔스티스, ECM, 1975년
4. Batik 바틱, ECM, 1978년
5. Five Years Later 파이브 이어즈 레이터, ECM, 1982년
6. At First Light 앳 퍼스트 라이트, ECM, 2023년
이봉호 문화평론가
[♪랄프 타우너-Stra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