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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펜실베이니아 피츠버그. 쟈니(Gianni)는 한 건물 1층에 세 들어 잡화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건물주 알 러셀 컴퍼니(R. Russell & Co.)와 새로 임대차 계약을 맺으면서 "잡화점에서 더 이상 담배를 판매하지 않는 대신, 앞으로 이 건물에서 음료는 당신 가게에서만 팔 수 있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보장받았다고 믿고 담배 판매를 포기했다. 그러나 정작 계약서 어디에도 음료 판매 독점권에 관한 조항은 없었다.
새 계약 체결 이후 그 건물의 다른 공간에 새로 입점한 약국이 음료를 팔기 시작했다. 쟈니는 담배 판매를 중단하고 임대료까지 높인 조건을 받아들인 건 오로지 음료 판매 독점 약속을 믿었기 때문이라며 건물주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법원은 "음료 판매 독점이 계약의 중요한 내용이었다면 당연히 계약서에 명시됐어야 한다"고 보고, 건물주가 새 에이전트와 서면 계약을 체결하기 전 원고에게 사실상 그러한 약속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런 '외부 증거'는 인정될 수 없다면서 쟈니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Gianni v. R. Russell & Co., 126 A. 791, 792 (Pa. 1924)). '구두증거배제의 원리'란?임대 계약서(written lease agreement)가 존재하는 이상 그것이 양 당사자의 최종적이고 완전한 통합된 합의(final and complete integrated agreement)로 간주되며, 계약서에 명시적으로 포함되지 않은 구두 약속은 법정에선 원칙적으로 증거로 인정될 수 없다는 얘기다. 이 사건은 '구두증거배제의 원리'(Parol Evidence Rule)와 관련해 영미계약법 수업에서 자주 인용되는 판례다. 완전한 서면 계약은 당사자 간의 모든 합의를 담고 있는 만큼 구두 약속은 증거 능력이 없다는 점을 시사한다.
구두증거배제의 원리는 영미계약법상 아주 기본적인 계약 해석의 법리다. 이 법리에 따르면 계약 당사자 간 협상 등을 통해 서면 계약이 최종적으로 체결됐다면 구두(oral)나 서면(in writing)으로 협상한 내용까지 그 서면 계약에 최종적으로 통합(final integration)된 것으로 본다. 당사자 간에 최종적으로 통합된 서면 계약이 존재하는 경우 그 계약의 성립 이전 또는 동시에 이뤄진 합의나 구두 증거(parol evidence)는 그 서면 계약의 내용을 변경하는 등의 증거로 사용될 수 없다는 의미다. 이 원리는 이미 체결된 서면 계약의 내용과 모순되는 외부 증거(extrinsic evidence)의 사용을 금지해 계약 관계에서 확실성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당사자들이 합의한 완전한 표현을 서면으로 작성한 경우 그 내용에 따라 당사자들의 의도를 인정해 그 법적 효과를 부여하고, 그 이전 또는 동시에 이뤄진 협의나 합의 사항은 그것이 서면이든 구두이든 배제하는 효과가 있다.
이는 서면 계약이란 '확실한 진실'에 반해 그 계약을 체결할 당시 불명확한 기억에 기초한 믿기 어려운 증거는 인정할 수 없다는 데 근거한다. 계약 체결 이후 구두로 추가 협상이 이뤄졌더라도 그 구두 증거는 구두증거배제의 원리에 저촉되지 않으며 당사자들의 실제 의사를 결정하기 위해 허용될 수 있다. 이는 계약 해석의 일반적 원리로, 계약 체결 이전의 구두 협의, 편지, 메모, 당사자들이 교환한 계약 초안 등에도 적용된다. 당사자 간 협상 과정에서 제기되거나 생성되는 여러 논의나 합의 내용들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서면 계약에서 정한 대로 해석할 수 있도록 기준을 마련하고, 무분별한 소송을 예방하는 효과가 기대된다. 계약과 관련된 재판 과정에서 사기나 위증에 의한 일방적 주장이나 변경을 제한해 소송의 효율성을 높이고, 배심원의 합리적인 의사 결정에 기여할 수도 있다. 계약서는 약속의 종착역
구두증거배제의 원리는 '말은 흩어지지만, 글은 남는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서면 계약이 존재한다면 그것이 당사자 간 합의의 최종 버전이며, 그 바깥의 말들은 법정에 들어올 수 없다. 계약서를 기차의 종착역에 비유해보면, 사람들이 여정 중에 서로 이야기하고, 약속하고, 수정할 수는 있으나 결국 중요한 건 계약서에 적힌 내용이다. 종착역에 이르지 못한 말들은 플랫폼에 남겨진 먼지에 불과하다.
이 원리는 100년 전 한 소상인의 불운한 일화에만 머물지 않는다. 오늘날 스타트업이나 프랜차이즈 가맹점에서도 그대로 되풀이된다. 한 스타트업 대표가 투자자로부터 "Series A 전까지는 지분 희석을 막아주겠다"는 말을 듣고 계약서에 서명했지만, 문서 어디에도 그 약속은 없었다. 추가 투자자가 합류해 지분이 희석되자 이 대표가 소송을 내더라도 법원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정말 중요한 약속이었다면 계약서에 명시했어야 한다." 가맹점주도 비슷하다. "이 지역엔 당신이 운영하는 점포 한 곳만 낼 것"이란 본사 담당자의 말만 듣고 계약했으나 정작 계약서에 지역 독점권 조항이 없다면 점포가 더 생기더라도 법정에서 승소할 가능성은 낮다.
이 사건은 단순히 법학 교과서에 나오는 과거의 판례가 아니다. 오늘날 계약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일화다. 기억은 언제든 달라질 수 있다. 비즈니스에서든 일상에서든, 중요한 약속이 법적으로 보호받으려면 반드시 '계약서'라는 종착역에 도착해야 한다. 말이 아닌 서면으로 남겨놔야 당사자 간 합의를 증명하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 아무리 굵직한 말이라도 문서에 담기지 않으면 바람처럼 사라진다. "말은 바람, 글은 증거", 이 사건이 오늘 우리에게 전해주는 교훈이다. 오늘날 계약 사회에서 구두증거배제의 원리는 불필요한 분쟁을 막고 계약의 신뢰를 지켜주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오늘 저녁 약속은 말로만 해도 좋다. 하지만 내일의 사업 약속만큼은 반드시 기록으로 남길 필요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