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규제에 고환율·관세 덮쳐…'5重苦'에 질식한 K중기

입력 2026-01-30 17:51
수정 2026-02-10 15:27

대구·경북지역의 한 국가산업단지에서 약 15년간 자동차 공작부품을 제조하던 A사는 새해 들어 폐업 신고를 준비하고 있다. 매출 연 100억원에 한 자릿수 영업이익을 꾸준히 내왔지만 2020년대 이후 적자가 누적되며 작년 말 자본잠식 직전 수준까지 다다랐기 때문이다. 지난해는 철강 알루미늄 등 원자재 가격과 원화 약세, 은행대출 금리 인상이 겹치며 적자폭이 더 커졌다. 이 회사 대표는 “공장을 내놓고 땅값을 절반만 받겠다고 해도 매수하겠다는 곳이 없다”고 말했다.

중소 제조업체의 휴·폐업이 급증하고 있다. 중국의 추격과 각종 노동규제 등으로 경쟁력을 잃어가던 가운데 지난해는 미국 관세와 내수침체로 인한 매출 감소, 원화 약세로 인한 원자재 가격 상승 등 악재가 가중되면서 공장 문을 닫은 것이다. 노민선 중소벤처기업연구원 중소기업정책실장은 “제조업은 국내총생산(GDP)에서 27.6%를 차지하는 한국 경제의 근간”이라며 “이를 뒷받침해주는 61만 개 중소 제조업체가 어려운 상황이어서 대책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 경영 악화에 “차라리 문 닫겠다” 30일 한국경제신문이 구자근 국민의힘 의원을 통해 확보한 전국 35개 국가산단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휴·폐업 기업은 1090곳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하며 전년 대비 48.9% 급증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한창이던 2020~2022년 평균치의 약 1.8배다. 2024년엔 휴·폐업 기업이 732곳으로 전년보다 6.2% 감소했다.

보통 국가산단엔 상대적으로 우량 중소 제조업체가 입주해 있다. 이런 국가산단 입주 기업들의 휴·폐업이 급증하는 것은 그만큼 한국 제조업 하부구조의 경쟁력이 빠르게 약화하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전문가들은 설명한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기업의 경기 평가를 집계한 기업경기실사지수(BSI)는 올해 1월 중소기업의 경우 59를 기록했다. 대기업(87)과의 격차가 2021년 5월(대기업 110, 중소기업 80) 후 약 4년8개월 만에 최대치를 기록했다.

지난해엔 특히 고환율(원화 약세) 등으로 국내 중소 제조업체들의 원가 경쟁력이 낮아진 점이 휴·폐업 급증을 유발한 것으로 파악된다. 대다수 중소기업은 중간재를 생산하기 때문에 환율 상승으로 수입 자재 가격이 오르면 가격 경쟁력이 약화할 수밖에 없다. 중기중앙회가 지난달 635개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40.7%가 “환율 급등으로 피해가 발생했다”고 답했다.

중국이 국내 중소 제조업을 가격에 이어 품질 면에서도 바짝 추격하는 것도 폐업 증가의 원인이다. 지난달 중기중앙회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수출 감소를 우려하는 기업의 절반가량은 ‘중국의 저가 공세 심화’를 가장 큰 애로 요인으로 꼽았다. 한 중소기업 관계자는 “주52시간 근무제에 갇힌 한국과 달리 중국은 원없이 일할 수 있기 때문에 가격 뿐만 아니라 품질과 기술면에서 한국을 뛰어넘고 있다”고 말했다. 이밖에 정부의 상법 개정도 중소기업의 상장을 막고 인수합병(M&A)을 어렵게 하는 요인으로 꼽힌다. ◇ 노동규제·상속세도 한몫연매출 1000억원대인 전기·전자업종 B사는 외국인 근로자 한 명이 작업 중 사망하자 대표이사는 1년 넘게 수사를 받고 수백명의 직원들도 실직 위기에 빠졌다. 오너 경영이 흔들리자 50억원 넘게 나던 영업이익이 급감해 회사가 문닫을 지경에 이르렀다. B사 대표는 “고용노동부와 경찰에 수십차례 불려나가 수사 받다보니 더이상 경영을 유지하지 어려울 정도로 마음이 힘든 상태”라며 “직원을 잃어 나도 슬픈데 당국은 내가 (근로자를) 죽인 것 마냥 내 책임으로만 몰아갔다”고 한탄했다.

중소기업들은 강한 노동 규제, 세계 최고 수준의 상속세도 폐업을 확대하는 요인이라고 설명한다. 가장 큰 타격을 준 중대재해처벌법은 사업장에서 사망사고 발생시 사업주와 경영책임자 등을 형사 처벌할 수 있도록 한 법이다. 어길 시 징역 1년 이상으로 형량의 상한을 없애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사업주 형사 처벌법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한 중소기업 협동조합 임원은 “중대재해처벌법이 2024년 50인 미만 사업장으로 확대된 이후 실제 구속 사례가 늘어나자 공장을 운영하는 중소기업 사장들의 경영 의지가 크게 꺾였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중대재해가 발생하는 기업은 거의 문닫을 위기에 처한다고 봐도 무방하다”고 했다.

중소제조업체 C사 대표는 “아무리 철저히 안전교육을 하고 안전설비를 갖춰도 언제 사망사고가 터질 지 몰라 담벼락 위를 걷는 느낌”이라고 했다. D사 대표도 “중대재해처벌법 대응에만 130가지가 넘는 서류를 준비해야한다”며 “관련 인력도 구할 수 없고 예산도 없어 대다수 중소기업은 의도치 않게 불법 상태로 방치돼 있다”고 고충을 밝혔다. 수도권 임대 공장에서 제조업을 운영하는 한 업체는 중대재해법 대응을 위해 최근 설비를 개선했다가 건물주로부터 임대료 인상 통보를 받았다. 이 회사 대표는 ”중대재해처벌법을 지키려 최신식 설비로 교체했더니 건물주가 자금 여력이 많은 줄 알고 바로 임대료를 올렸다”고 토로했다.

오는 3월 시행을 앞둔 노란봉투법도 중소 제조업체들에 부담을 가중하고 있다. 이 법은 원청 대기업을 상대로 협력기업 노동조합이 교섭을 요구하고 파업을 할 수 있게 했다. 중소기업중앙회는 중소제조기업 50%가 수급기업인 상황에서 대기업의 거래처 해외이전 등 거래단절 우려가 있다며 정부에 제도 개선을 건의했다.

현 정부 들어 상속세 완화 조짐이 없는 것도 사업을 포기하는 큰 배경 중 하나다. 이전 정부에서 꾸준히 개편을 시도했지만 더불어민주당이 계속 반대해왔다. 자본시장연구원에 따르면 후계자를 찾지 못해 제3자에 매각하려는 중소기업만 21만 개에 달한다.

국내 상위권 금속부품업체인 E사 대표는 “중대재해처벌법 등 각종 노동 규제가 강화되고 상속세도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 한국에선 사업할 마음이 사라졌다”며 “동남아시아로 이민갈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대주주가 기업을 승계받을 때 할증률을 적용한 한국의 상속세 최고 실효세율은 60%다. 일본(55%), 프랑스(45%), 영국과 미국(40%) 등보다 높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한 세무법인 대표는 “세율 자체가 높은데다 선진국처럼 장기 분할 납부도 불가능해 많은 중소기업인들이 경영을 물려주기 보다 폐업이나 해외 이전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1970~1980년대 창업한 1세대 중소기업 창업주 대부분 현재 은퇴 연령기라 상속이냐 폐업이냐 기로에 서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구자근 의원은 “내수가 식는 상황에서 정부가 오히려 노란봉투법과 상법 개정 등으로 기업 발목만 잡고 있다”며 “노후화된 산단을 재정비하는 방안을 포함해 뿌리·기초 산업 육성에 힘을 쏟기 위한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며 “노란봉투법 시행 유예 등도 시급한 과제”라고 말했다.

안대규/정상원/원종환 기자 powerzani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