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립밤이랑 리쥬란 크림 사려고요. 이건 올리브영에 없거든요."
29일 오전 서울 중구 명동역 6번 출구 인근 대형약국에서 야마다 마유(34) 씨는 손에 '큐립 연고'와 '리쥬비넥스'를 들고 이 같이 말했다. 다른 한 쪽에서는 40대 일본인 관광객 A씨가 스마트폰과 매대에 놓인 제품을 번갈아보면서 가져온 쇼핑 리스트를 대조했다. 그러자 파란색 유니폼을 입은 직원이 한 연고 제품을 들고 와 능숙한 일본어로 "이 스테로이드 연고인가요?"라고 물어보기도 했다
약국 내 통역사 직원 상주…"중국·일본인 관광객 많아"
명동 내 약국이 관광 쇼핑을 하러 온 외국인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다. 을지로입구역부터 명동역 사이에 위치한 약국의 정문 유리창에는 '텍스 프리(부가가치세 환급)', '텍스 리펀드(내국세 환급대행)' 표시가 기본적으로 붙어있었다. 규모가 큰 약국 안에는 텍스 리펀드 기계도 있었다. 사람이 붐비는 오후 8시에는 텍스 리펀드 기계 앞에 대기 줄이 생기기도 했다.
약국 안으로 들어가니 '투어리스트 픽(pick)'이라 쓰인 매대가 있었다. 매대에는 야마다씨가 골랐던 리쥬란 크림부터 여드름 연고, 붓기 제거 영양제가 있었다. 이를 넘어 다이소 품절 대란을 일으켰던 브이코스메틱의 'VT 리들샷 100' 등 리들샷 제품 라인업까지 판매하는 곳도 존재했다.
통역 직원이 있는 곳도 다수였다. 명동 유네스코회관 맞은편에 있는 '메가약국'에서는 손님들이 약국에 들어서면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지 파악해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했다. 메가약국 약사 A씨는 "통역을 도와주시는 직원분들이 항상 계신다"며 "주로 중국인과 일본인 관광객들이 약국을 많이 찾는다"고 말했다.
에잇세컨즈 명동역점 옆에 위치한 '레디영약국'에는 이날 오전 파란색 유니폼을 입고 외국인 관광객을 응대하는 직원이 3명 있었다. 레디영약국 약사 B씨는 "파란색 유니폼을 입은 직원분들은 통역을 전담하신다"며 "시간대별로 상주 인원이 다르다. 점심 등 사람이 많을 때는 더 많이 계시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통역 직원이 없는 작은 규모의 약국은 '영어를 할 수 있는 약사가 도와드리겠습니다'라고 쓰인 영어 팻말을 유리창에 붙여놓기도 했다.
외국인 약국 이용 비중 '59%'…피부과 제쳐
실제로 외국인 의료 소비에서 약국이 차지하는 비중도 확대되고 있다. 한국관광데이터랩에 따르면 외국인 의료 소비 건수 중 약국 이용 비중은 지난 2021년 38.24%에서 지난해 59.11%까지 늘었다. 피부과 이용 22.07%를 제친 수준이다.
약국에서 30만~40만원을 지불하는 외국인 관광객도 있었다. 메가약국과 1분 거리에 있는 '에이트명동 1번가 약국' 약사 C씨는 "보통 5만원이나 10만원 정도 사가는 데 하루에 한두명 정도 30만~40만원어치를 구매하는 외국인도 있다"며 "한 제품을 10개씩 사가는 고객도 있다"고 언급했다.
약사들은 외국인 관광객이 사는 특정 제품을 '지명품'이라고 불렀다. SNS에서 확인한 제품을 지명해 요구한다는 의미에서다. 약사 C씨는 "약국을 방문하는 고객 90%가 지명품을 산다. 10% 정도만 여행하다 탈 나서 오는 정도"라고 이야기했다. 약사 A씨 또한 "해외 SNS에서 공유된 제품을 가장 많이 찾는다"며 "잘 팔리는 제품은 따로 매대에 놓고 있다"고 전했다.
늦은 시간까지 쇼핑하는 외국인들을 겨냥해 밤시간까지 운영하는 약국도 많았다. 을지로입구역부터 명동역 사이에 있는 약국 40곳 중 23곳이 오후 9시부터 오후 11시까지 매장을 운영했다. 새벽 0시 30분까지 운영하는 곳도 있었다. "약품 찾는 외국인 증가…한국 위상 상승 의미"전문가는 외국인 관광객들 사이에서 명동 약국이 쇼핑 장소로 떠오르는 게 국가 위상이 높아진 것과 관련 있다고 봤다.
김남조 한양대 관광학부 교수는 "마치 한국인들이 일본을 여행할 때 돈키호테에서 약품을 사는 것처럼 외국인들이 한국에서 약을 사는 것"이라며 "약은 안전성과 신뢰성이 담보돼야지만 구매가 이뤄지는 상품이다. 한국 이미지가 신뢰성이 높아졌기 때문에 한국에서 약을 사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늘어나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이어 김 교수는 "예전에는 한국에서 외국인 관광객들이 아기가 먹는 분유를 많이 사간 적도 있었다. 약품도 마찬가지다. 한국에 온 김에 분유, 약 등 신뢰성이 중요한 제품을 사는 건 국가 위상이 높아졌다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부연했다.
박수빈 한경닷컴 기자 waterbe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