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중3이 되는 아들의 방학에 맞춰 제주로 가족여행을 다녀왔다. 겨울 제주는 바람이 많고 따스했다. 돌담이 있는 작은 공원엔 벌써 유채꽃이 만발해 있었다. 한겨울에 노란색을 바라보니까 봄을 맞은 듯 금세 기분이 산뜻해졌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버스 정류장에 기쁘게 마중 나와 있는 사람의 얼굴을 봤을 때처럼 반갑고 좋았다.
그러나 가족여행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건 아마 부부싸움이 아닐까. 지금 와서는 왜 싸웠는지 기억도 안 나는데 하루도 거르지 않고 성실하게 싸웠다. 호텔 수영장 이용 수칙을 읽다가 수모 착용 필수라는 문장 때문에 싸우고 방 열쇠를 못 찾아서 싸우고 운전도 못 하면서 훈수 뒀다고 싸우고 사진 못 찍었다고 싸우고 사진 찍기 전에 먹었다고 싸우고 메뉴 고르다가 싸우고 걱정돼서 싸우고 아파서 싸우고 끝없이 싸웠다. 그러면서도 언제 그랬냐는 듯 웃으며 사진을 찍고 서로를 껴안았다. 그리고 재미있었다. 어쩌면 우리가 싸워서 여행이 재미있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데 아들은 좀 힘들었던 모양이다.
여행 셋째 날 아침, 창밖으로 동백정원이 흐드러진 카페를 찾았을 때였다. 그때도 서로가 주문한 브런치 메뉴를 놓고 티격태격했는데 아들이 말했다.
“엄마 아빠 그만 좀 싸우시면 안 돼요. 도대체 몇 번째예요?”
“우리 싸우는 거 아닌데? 이견 조율하는 거야.”
“사람들은 그걸 보고 싸운다고 해요.”
남편을 거들려던 말이 쏙 들어갔다. 그런데 남편이 바람이 가득한 창밖의 동백정원을 가리키며 뚱딴지같은 말을 시작했다.
“바람에 부대끼면서 자라는 동백나무 좀 봐라. 흔들리면서 피우는 꽃이 저렇게 아름답잖아. 너도 부대끼면서 잘 자라봐.”
“전 동백꽃이 되고 싶지 않다고요.”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웃음이 터졌다. 참고 견디는 걸 덕목으로 여기던 우리 세대의 뻔한 습관을 통쾌하게 무너뜨리는 대답이었다. 무자비한 바닷바람에 치이지 않아도 예쁘게 자라는 꽃이 얼마나 많은가. 온실 속에서 깨닫는 삶이 가치 없는 것이라고 누가 함부로 말할 수 있을까. 생생한 바람도 아낌없이 쏟아지는 빗물도 무한히 깊어지는 흙빛도 없는 세계에서 달리 깨닫는 삶도 있겠지. 겪어보지 않은 삶에 대해 속단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들 덕분에 한바탕 웃고 나니 분위기도 한껏 좋아지고 남편과 나도 싸우지 않으려고 말과 행동을 조심했다. 운전 중인 남편이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법원 등기가 반송돼 왔습니다.”
“무슨 등기인가요?”
“법원 등기를 받을 수 있는 주소만 확인 부탁드립니다.”
딱 봐도 보이스 피싱인데 남편은 대화를 이어 나가려 한다.
“그렇게 부대끼고 싶어? 보이스 피싱이잖아. 그냥 끊어!”
하마터면 넘어갈 뻔했다. 오른쪽 손목이 시려서 밤새 뒤척인 남편이 체력적으로나 심적으로나 지치긴 지친 모양이다. 겨우 찾은 병원에서는 손목에 물이 찼다고 한다. 그걸 참고 여태 내가 가자는 대로 따라다닌 걸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 제주 나무들도 물을 끌어 올리는 중이겠다. 저 동백나무도 제 속에 흐르는 물색을 붉게 바꾸고 나뭇잎마다 그늘을 만들어 반짝일 것이다.
3박4일 동안 머무른 봄의 내부에서 빠져나와 서울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날 밤 보일러에 물이 새서 차단기가 올라가고 말았다. 보일러 수리 기사님마다 예약이 꽉 차 있었다. 주말 동안 씻지도 못했다. 보일러가 다시 돌아가자 씻는 일이 가장 행복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모르는 것들이 많다. 2026년은 모르는 것보다 아는 것을 다시 공부하는 한 해가 되려는 모양이다.